150화
히아신은 누군가 들어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래도 죽일 생각은 없는지 꼬박꼬박 그의 식사를 챙겨 주고 있었다. 웃을 기운도 없게 굴욕적이긴 하지만 히아신은 그래도 살아 볼 생각이었다.
“안녕.”
오늘의 식사 당번은 간이 작은 사람인지 피투성이인 히아신이 입을 여는 것을 보고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하루의 일과는 이렇다. 어째서 배신했는지, 그 이유가 무언지, 코르를 죽인 게 확실한지. 질문과 폭력이 함께하는 시간을 견디고 나면 하루가 무척, 정말이지 무척 느리게 흘러간다.
존경받고 두려움을 받던 왕자에서 이 꼴이 된 게 어떠냐는 말에 그는 웃었다. 존경이라. 누가누가 아버지 꼭두각시 노릇 잘하냐고 순위를 매긴 그 시험에서 무슨 존경씩이나.
식사가 끝나면, 그 식사를 게워 낼 때까지 때리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배 속에 넣은 걸 토해 본 적이 없었다.
“인사한 사람 민망하게. 대답도 없이 남의 벗은 몸은 왜 그리 빤히 봐.”
“자, 장난 걸지 마.”
“인사였어. 너무 겁먹지 마.”
입 안에 고인 피를 퉤, 뱉었다. 그에게 중요한 게 있었다. 지금이 며칠이나 흘렀는지, 그렇다면 도대체 그 여자에게서 떠나온 게 얼마나 된 건지 알고 싶었다. 알아야 나중에 변명이라도 하지. 히아신은 잠이 들 때마다 그녀의 꿈을 꿨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무언지. 잘 모르겠다.
그 작고 낡은 오두막집에서 일어나면 그녀가 숨 막히게 껴안으며 저를 깨워 준다. 그는 보답으로 입맞춤을 해주고 식사를 차려 준다고 한다. 내려가면 그녀의 다정한 어머니와 불친절한 아버지가 마치 그에게 아들처럼 인사해 준다. 잘 잤냐고 하면서.
히아신은 그 춥고 외진 도시에 사는 자신이 마음에 들어 기지개를 켜며 식사 메뉴를 말한다. 꿈은 예외 없이 거기서 끝이 났다.
“먹어.”
빵을 입에까지 가져다주는 식사 당번은 어서 이 일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딴 곳을 보고 있었다. 히아신은 입 앞까지 온 빵을 물었다. 전형적인 파르난의 빵 맛이었다. 빵의 맛에는 신경 쓰지 않은, 오로지 식량으로서의 빵. 그것을 씹어 삼키며 히아신은 계속 같은 장면을 머릿속에서 반복했다. 그가 끓인 스튜를 맛있게 먹는 나디사의 모습을. 그러면 이 빵의 맛이 조금은 특별해진다.
나디사, 여기서는 이런 거를 먹어. 그러면 나디사는 울면서 나에게 아주 예쁜 옷과 침실, 그리고 가족을 가져다주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이런 굴욕을 먹으면서도 드는 생각은 어떻게 이걸 활용해서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덜, 미움을 받을 수 있을까였다.
피가 터진 입술로 빵을 받아먹으며 웃는 그를 보고 식사 당번은 질린 표정이 됐다.
“완전히 미쳤군…….”
히아신은 빵을 목으로 넘기며 더 밝게 웃었다. 이곳에 와 있으니 하루가 까맣다. 어제도 그제도 그 여자 생각을 안 하는 날이 없어, 이제는 몸의 주인인 그가 제발 하루만 쉬자고 빌고 싶을 생각이었다. 생각을 좀 하게. 그녀 말고 다른 생각을.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갈지에 대한 생각을.
그래서 너를 만나서 뭐라고 해야 좋을지에 대한 생각을.
“다 먹었나?”
“내가 여기에 온 지 며칠이나 됐지?”
“알게 뭐야.”
히아신은 지난 식사 당번들에게도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 체감한 기간은 일 년이지만 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그 정도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단지 며칠만 떨어져 있다는 그 진실을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며칠만으로 이렇게 괴롭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그렇담 과연 몇 년을 보지 못하는 삶은 보낼 수 있을까. 아, 생각만으로도 진저리쳐지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나도 잘 모르지만 못해도 사흘은 넘었어. 그리고……. 전쟁도 시작했고.”
이제껏 왔던 식사 당번 중에서 가장 상냥하고 마음이 약한 바보였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정답을 알려 주듯 눈앞에 남자가 보였다. 파르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적당히 겁을 먹고, 적당히 비겁한 남자를. 터진 입 안이 쓰라린 것도 잊을 만큼 히아신은 화사하게 웃었다. 일단 그는 단 한 가지 욕구에 충실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모든 걸 갖고 싶어 하는 욕망에 충실하는 것처럼 그의 아들인 그도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다는 욕망에 충실하기로 했다.
“내가 말이야. 여기에 배신자, 도망자들을 많이 넣어 놨거든. 그래서 내가 잡혀 올 줄은 몰랐는데 환경이 열악하네.”
주절주절 떠드는 히아신을 보고 기가 찬 듯이 웃지만 식사 당번은 원래라면 감히 그와 말도 섞을 수 없는 위치였다. 좋은 대화 상대가 될 수 있겠다. 제 할 일이 끝났음에도 나가지 않고 있는 남자의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기회는 있어.
“그 사람들이 갖고 있던 재산들, 귀한 보물들. 누가 가졌는 줄 알아?”
“설마…….”
“나만이 아는 장소에 그것들을 숨겨 놨어. 나도 그런 거 좋아하거든.”
히아신은 손이 묶여 있든 말든 아랑곳 않고 몸을 내밀었다. 가까이 밀착되는데도 가만히 있는 남자는 눈에 일렁거리는 욕망을 숨기지 못했다. 히아신은 그를 유혹할 만한 모든 말을 속삭였다.
“네가 원하는 사람을 너한테 빠지게 할 수도 있고, 너를 무시하는 사람은 네 발밑에서 기게 해 줄 수도 있어.”
침을 꿀꺽 삼킨 남자는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는 듯이 입을 헤벌렸지만 완전한 멍청이는 아닌지 금세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눈동자에 남은 욕망의 여운은 꽤 끈질긴 놈이었다.
“그런, 그런 말로 나를 속이려 들어.”
“너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할 거야. 너는 놓치고 평생 후회하겠지.”
히아신은 그럼 더는 그에게 관심 없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모르긴 몰라도 남자보다 제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을 거다. 남자는 욕망에, 히아신 자신은 어떠한 그리움에. 모두 어떤 것에 미치면 한 치의 앞날을 보지 못하게 된다.
“무엇을, 도와주면 되는데.”
드디어. 그녀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히아신은 이제 남의 생각, 남의 계획은 안중에 없었다. 바라고픈 삶이 생겨 버렸다.
“내 시계를 가져와. 금색의 아주 예쁜, 내 이름이 박혀 있는.”
식사 당번인 남자는 듣자마자 콧방귀를 꼈다. 그게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안 되면 이로 이 밧줄을 물어서라도 자유를 얻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가서.
그 뒤는 생각하지 않는다. 히아신의 생각은 뒤가 아닌 앞으로 갔다. 과거에 그가 선물 받은 일상들과 그의 욕심을 더한 상상만이 진실이라고 믿으며.
“그리고.”
히아신은 떠나는 남자의 등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한쪽 눈이 부어 식사 당번의 표정이 보일 듯 말 듯 했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이 세상을 또렷하고 온전하게 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땅콩 사탕 좀 사 와. 맛있는 걸로.”
나디사 마로닌은 영악한 여자였다. 그녀는 맛만 보여 주었을 뿐인데 히아신의 세상은 온통 그 맛만 찾게 되었다. 그 맛을 잊고서 이 모든 걸 흘려보내듯이 살라니. 그건 웃기는 거짓말이었다.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 * *
코제나 공주의 귀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작전 자체는 훌륭했다. 무려 록이 보호하고 있었고, 라넌이 이끄는 라드 무리가 길을 터 줬다. 라드군의 위명이 거짓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난장판 속에서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동생인 코제스가 위험한 것을 느낀 공주는 어디론가로 달려가 버렸고.
록은 아군이 만든 바람이 부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의 가슴에 신성한 힘을 불어넣으며 쓰러트렸다.
기절한 적군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버려두고 록은 목청을 높였다.
“공주님!”
더러워진 신관 복으로 눈가에 묻은 흙을 닦았다. 적군의 수도 아군의 수도 줄었다. 그런데도 달려가는 사람들 속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금발을 찾기가 이리도 어렵다니. 마지막까지 공주를 잘 살폈어야 했는데. 그게 그의 마지막 의무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후회로 가슴이 저민 록은 불고 있는 바람을 끝없이 의식했다. 이 바람을 내는 사람들이라면 공중에서 찾아낼 수 있을 터다. 고개를 돌린 록의 눈에 적을 궤멸시키고 있는 금색의 여인이 보였다. 공주를 찾아 부르짖던 목소리로 록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라넌!”
발톱으로 사람의 내장을 파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절제된 살기를 갖고 있던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자신의 편이라는 사실이 이만큼 든든한 적이 없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사라진 공주.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는 알아먹은 것처럼 살벌하게 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