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떠나간 사람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되짚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바람에 갇힌 남자의 비명이 선명해진 때에 햇볕을 가르는 날렵한 발톱이 보였다.
의리를 지킨 디디가 숲으로 내려와 남자의 어깨에 발톱을 꽂았다.
“아으, 헉!”
목이 풀려난 나디사는 다급하게 밧줄을 던지고 일어섰다. 불어오는 바람에 쓰러질 뻔한 남자 둘이서 디디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틈을 노려 채찍을 맞고 쓰러진 로마에게 달려갔다.
“로마, 이리로 와.”
그러나 로마가 한 발을 떼기도 전에 디디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숲을 울렸다. 어깨를 부여잡고 있던 나디사는 잠시간 갈등했지만, 위험에 처한 디디에게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디디!”
“잡아, 그쪽!”
날개를 펼친 디디는 남자의 어깨에 박혀 있던 발톱을 빼냄과 동시에 비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남자 하나가 디디의 왼쪽 날개를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잡아!”
이대로 두었다간 디디도 잡혀서 채찍질을 당하겠다. 나디사는 그들이 정신 팔린 차에 노디를 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빌어먹게도 감각이 뛰어났다.
“야! 저것부터 해결해!”
남자가 디디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앞쪽을 가리켰다.
“저게 언제…….”
실컷 괴롭히던 날개를 놓고 남자는 그녀 쪽으로 달려왔다. 나무에 기대어 서 있던 나디사는 피를 흘린 탓인지 정신이 나갈 듯했다. 남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닌 건 분명한데, 날개를 잡힌 디디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저거 더 당기면 찢어질 것 같은데. 로마와 도망은 갈 수 있어도 디디는 어쩌지. 저를 도와주다가 잡혀 채찍질을 당하는 디디를 보자 하늘로 가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로마는 그녀와 연결되어 있어 떠나자는 명을 단박에 알아들을 것이었다. 하지만 디디는 그러지 못한다. 그녀의 노디에 반응한 로마가 상황과 관계없이 떠오를 준비를 마친 찰나였다. 눈물이 맺힌 디디와 운명처럼 시선이 섞였다.
디디와 손을 잡고 이곳을 떠나고팠다. 저를 버리지 않으려는 그녀의 마음이 닿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새까만 디디의 동공이 작아졌다가 다시 커졌다. 나디사는 이 손발이 짜릿한 감각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을 라드와 둘로 쪼개어 나누는 것만 같은 그 감각이.
로마 때처럼 디디와도 연결된 것이었다. 그리고 속을 파내는 것 같은 고통이 따른 뒤에 무언가가 픽 올라왔다. 입이 벌어지며 점토처럼 생긴 것이 핏물에 적셔져 나왔다.
“억.”
화상에 버금가는 통증이 목을 타고 올라오는 게 아찔했다. 디디는 그녀의 고통을 받고 살아난 양 날개를 회전시키듯 펄럭거렸다. 디디의 날개를 잡고 있던 사람이 나가떨어질 만큼 강한 바람이 불어왔으나 그녀의 주변만은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고 있었다.
뇌가 세 개가 된 기분이었다. 등에 채찍 상처가 난 로마까지 합세해 일어나자 통증은 네 배가 되었다. 나무에 기대 간신히 버틴 나디사는 흐르는 코피를 손등으로 닦았다.
시원한 반격이었다. 일어난 로마, 디디가 날아올라 바람을 일으키자 남자들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 형체들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 목을 잡은 남자가 쓰러진 순간 나디사가 달려갔다. 죽기 살기로 달려가 그들의 바람으로 검을 만들었다.
무형의 바람의 검으로 남자를 찌르고 이어서 남아 있는 이에게 마지막 칼을 휘둘렀다. 뺨에 촤륵, 피가 튀김과 동시에 나디사는 후들거리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피가 강물이 되어 그녀의 발 앞까지 영역을 넓혔다. 하얀 바지가 젖어 가는 걸 깨달은 나디사는 정신을 놓을 것 같아 고개를 흔들었다.
“돌아, 가자.”
이 남자들의 동료가 몰려올 것이었다. 도망쳐야 한다. 그녀의 쓰러지는 몸을 받아 낸 디디가 상대적으로 더 팔팔했다. 어떻게 두 마리씩이나 연결됐는지 모르겠지만 긴박한 현재 상황에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디사는 다친 목을 손으로 만지며 디디의 등에 엎드려 누웠다. 세심한 로마는 그녀의 다리가 떨어지지 않게 코로 밀어서 완전히 올라타게 했다.
“고마워…….”
아주 잠깐만, 조금만 쉬면 끝날 일이었다. 가슴이 불처럼 타들어 가는 데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그가 떠났다는 날부터 느낀 그 공허함과 상처보다는 실물의 상처가 훨씬 더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이 고통이 그 고통보다는 낫다. 스스로가 웃겨 미소를 지은 나디사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 * *
계획에 차질이 생겨 변경되긴 했지만 아버지의 계략대로 전군의 일부가 탐색조로 나섰다. 일이 이렇게 어렵게 된 건 주축이 된 다섯 왕자 중 두 명이 퇴출당하다시피 되면서부터였다. 원래는 이런 기습 작전을 감행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원래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오늘의 식사 당번인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감옥 쪽으로 걸음했다. 왕자 중 하나는 죽었다는 게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파르난은 장례식을 치르지 않는다. 저쪽 세상의 관례나 철칙은 여기서 통하지 않으니.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으니 왕자인 코르는 죽은 것일 테고.
“오늘은 어때.”
“아직도 멀쩡해.”
“독한 새끼.”
왕자 중 하나는 몹쓸 새끼가 되어 돌아왔다. 협박, 살인, 최면 등 안 좋은 일만 골라서 하던 놈이 파르난을 배신하려고 했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그 또한 아버지의 판단이니 그 콧대 높던 왕자가 저기에 갇혀 있는 거겠지.
그가 거는 환상에 빠지면 거의 반 미친놈으로 사는 꼴을 봤기에 두려운 것도 있었다. 환영술사 히아신. 하지만 얼굴이고 가슴이고 할 것 없이 피투성이, 손은 묶여 천장에 매달린 신세. 오늘치 고문이 끝났는지 두 눈 뜨고 못 볼 꼴이 된 그를 보며 식사 당번은 감옥의 자물쇠에 열쇠를 넣었다.
다 저가 벌인 짓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원대한 아버지의 계획에 재를 뿌리는 것도 모자라 배신까지 하려고 했으니.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조용한 감옥에 울려 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