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48화 (148/210)
  • 148화

    바람이 가르는 소리가 이처럼 작게 들리다니. 하늘을 나는 소녀들의 비명이 추적꾼에겐 좋은 먹잇감이 됐다.

    “여기서 더 왼쪽이요!”

    젠장. 아무도 듣지 못하게 욕을 한 나디사는 손에 감아 둔 라드의 목줄을 왼쪽으로 틀었다. 아래에서 날아온 검은 구체가 날개에 스치자 로마는 몸을 뒤집으려 했다.

    “로마! 진정해!”

    그녀는 훈련받지 않은 아이들을 안고 도주 중이었다. 겁먹은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붙잡는 것만 해도 진이 빠졌다.

    “저것들을 어떻게 따돌리지.”

    하늘 구멍으로 나타난 파르난의 침략자는 그녀를 생포하고 싶어 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산으로 대피했으나 일부는 시끄럽다는 이유로 칼에 맞아 죽었다. 이건 단순한 침략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기함할 만한 속도로 달려오는 저들은 아래에서 위로 힘을 실어 보냈다.

    “성이…….”

    백기가 꽂힌 성벽을 응시하던 나디사는 말끝을 흐렸다. 아이들이 들을까 봐서다.

    “저기 번쩍거려요!”

    아이라고 번개가 친 것처럼 번쩍거리는 성을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공주가 사는 성은 노란 불과 검은 불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맞붙고 있었다.

    신관인 란과 싸웠을 적에 보았다. 그의 힘이 저런 봄꽃 같은 색깔이었다. 신관들이 싸우고 있다는 건 저쪽도 침략당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일까. 성벽 밖으로 터져 나오는 밝은 빛이 그녀의 시야를 찔렀다.

    “어, 엄마한테 데려다줘요.”

    “언니이.”

    아이들이 우는 목소리로 그녀의 시선을 당겨 내렸다. 엄마가 보고 파 우는 여동생을 껴안고 그녀에게 돌아갈 곳을 요구했다. 그녀도 부모에게는 간절한 형편이니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아래에서는 파르난의 사람들이 쫓아오고 있고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도무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그 순간에 열심히 쫓아오는 디디가 보였다.

    그녀와 로마의 냄새를 추적해 따라온 모양이었다. 그랬다. 디디가 협조만 잘해 준다면 그녀들을 못 데려다줄 것도 없었다.

    “집이 어디니.”

    소녀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마을과 마주 보고 선 산이었다. 천천히 호흡한 나디사는 저들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네 명…….”

    디디는 그녀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 로마만큼 세심하게 조절하는 게 불가했다.

    그리고 그때 때마침 그녀에게 거짓말 같은 기회가 주어졌다. 높이 떠 있는 그녀를 맞추기가 힘든 건지 상대적으로 지시 없이 단순한 동선으로 날고 있는 디디를 노리는 것이었다.

    “디디!”

    말이 통하는 로마를 데리고 그녀가 시선을 끄는 게 나았다. 나디사는 로마의 머리를 돌리며 작게 속삭였다.

    “더 빠르게, 로마.”

    앞에 태우고 있는 아이 두 명의 허리를 안고서 경로를 변경했다. 그녀가 마을 쪽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남자 둘이 따라왔지만,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라드를 사람이 쫓아와 봤자였다.

    그물을 던지던 남자 무리는 튀는 행동을 하는 그녀에게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비로소 자유를 얻은 디디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저 위로 올라가 버렸다.

    “저기예요!”

    디디의 해방 이후 더욱 독해진 두 명이 그녀를 쫓고 있었다. 그녀가 가는 떨어지는 방향을 눈여겨볼 것이었다.

    소녀가 지목한 산자락에는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나디사는 손목에 두른 목줄이 빠지지 않게 팔을 돌렸다.

    “몸을 낮추고 로마의 목을 세게 안아 볼래.”

    숲으로 뛰어들면 저들도 단숨에 그녀를 찾아낼 순 없을 터다. 저쪽이 수색에 힘쓰는 동안 무사히 집으로 보내면 된다.

    믿을 게 그녀밖에 없는 아이들은 머뭇머뭇 망설이다가 팔을 뻗었다. 성격 급한 로마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벌써 날개를 하강하기 좋은 자세로 펼치고 있었다.

    “꺄아아!”

    “꽉 잡아!”

    아래로 떨어지면서 바람의 양이 달라지자 몸이 가벼운 아이들이 조금씩 뜨기 시작했다. 짧은 팔과 다리를 이용해 목에 달라붙어 본다. 나디사는 그 틈에 뒤를 돌아보았다.

    “디디…….”

    디디가 사라지고 없었다. 공격을 당해 추락한 것인지 저 나름의 길을 찾아 도망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마음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지.

    은둔하고 있던 상실감이 그녀의 심장을 후벼 팠다. 그녀의 영향을 받는 로마가 휘청거리며 내려가는 통에 아이들이 곧 죽을 것처럼 울어 댔다.

    “아! 무서워요!”

    “미안, 미안.”

    상실감이라는 단어로 지금의 이 엉망인 추락을 설명할 수 없었다. 사람을 태우고 애먼 곳에 정신이 팔리다니. 누군가를 태운 게 처음이어서 그런 거라는 말은 구차해서 하고 싶지 않았다.

    디디가 그녀를 의지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디디를 의지하고 있었다. 떠나간 히아신처럼 대하며 그를 의지하고 있었던 거였다.

    눈물이 시야를 가리기 전에 로마가 착지를 마쳤다. 감정 하나 조절 못 해서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비행에 지장을 주다니.

    로마가 기운 없는 것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미안했다. 고생한 로마는 쉬게 두고 그녀는 내려와 아이들을 안아 바닥에 놓았다.

    아이들은 땅에 오자마자 울음을 뚝 그쳤다. 수준 낮은 비행을 펼쳤으니 멀미를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런데 집이 어디니.”

    여기서 살지 않는 그녀가 보기에는 마을 근처나 여기나 다 같은 숲처럼 느껴졌다.

    “길을 찾아갈 수 있겠니?”

    목이 꺾인 꽃을 든 소녀의 눈빛이 믿음직스러웠다. 아이들만 보내도 될까. 파르난의 사람들이 구석 산속에 관심을 가질지 아닐지 그녀조차 잘 모르는데.

    “뛰어. 뒤돌아보지 말고. 혹시 누가 있으면 소리 지르고.”

    나디사는 망을 보며 소녀들을 보내주었다.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한동안은 그들이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달려가는 자그마한 몸이 나무 뒤쪽으로 빠져나가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도 가자.”

    우회하는 방식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나디사는 발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을 남자들에 대해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하필 떨어져도 그 마을에 떨어질 게 뭐람. 그 마을이 올해 재수가 없을는지 히아신이 한바탕하고 그다음엔 그 남자들이 어지럽히고.

    설사 그 남자들을 히아신이 보낸 거라고 해도 그녀의 기억은 망가트릴 수 없다. 그날 맡았던 숲의 냄새가 엉겅퀴 같은 마음을 풀어 주었다. 사파이어처럼 파란 강물에서 헤엄치던 남자에 대한 기억은 지금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안 돼.”

    그러면 안 된다. 어떻게든 교전하고 있는 공주의 성과 파르난이 점령한 마을의 상황, 그리고 도망치는 소녀들을 떠올리면 됐다.

    걸음이 늦은 것일까. 짐승의 감을 가진 로마가 그녀의 옷자락을 물고 뒤로 물러났다. 딴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는 저절로 발길이 묶였다. 하지만 곧 로마가 현명했다는 걸 두 눈으로 알게 됐다.

    “날아야 해.”

    달려오는 발소리는 히아신과 견줄 수 있을 만큼 빨랐다. 어디서 저런 훈련을 받았나 싶을 정도로 빠른 달리기는 그녀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하고 있었다.

    “로마!”

    그들의 몸에 새겨진 문양처럼 컴컴한 힘이 날아와 그녀의 어깨에 꽂힌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아악!”

    마치 그녀가 라드에게서 떨어지기를 바란 듯이 날아온 힘에 밀린 나디사의 몸이 로마와 분리되었다. 쿵, 등이 나무에 들이박혔다.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온 그녀는 아릿한 기분이 드는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 꼬맹이들을 대피시키려고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날아간 거야?”

    한 명이 더 왔다. 어깨를 제대로 다친 것인지 꼼짝을 못 하겠다.

    “살려서 데려갈까? 연구용으로. 이 도마뱀하고 같이.”

    “무거운데…….”

    “그래도 여자잖아.”

    피 섞인 침을 뱉은 나디사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어지자 로마는 방어에 힘썼다.

    적을 노려보고 있다가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다가오면 으르렁거리는 것이었다.

    “오호, 네 주인을 지키는 거냐.”

    자세를 낮춘 남자의 손에서 그물이 거미줄처럼 뽑혀 나왔다.

    “자, 그럼. 사냥을 시작해 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