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잠자코 사는 줄 알았던 파르난이 기습했다. 기습을 당하고 하루 지나 다시 기습이라니. 하지만 외부의 적이었다. 칼을 겨누는 방향이 명확해졌다.
하늘에 난 구멍은 어림잡아 수백 개였다. 공주의 성까지 덮은 터라 공주군이고 왕자군이고 할 것 없이 그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적을 상대해야 했다.
혹시 모를 반란을 대비해 무장하고 온 왕자군은 그나마 맞서 볼 만한 상태이지만 구멍을 타고 나오는 파르난 사람은 없애도 죽여도 채워지고 메워진다.
“아악!”
“후퇴해!”
파르난을 적으로 두면 골이 아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일반 병사를 제압할 만큼의 체력과 그 밖의 특수한 능력이 전투에 최적화됐다. 손등에 칼이 자라난 사람이 목을 찌르는 걸 보고서 기절해 버린 병사가 아군을 깔아뭉개며 쓰러졌다.
“공주님!”
훈련받은 신관들은 파르난의 힘을 막아 낼 수 있었으나 적에 비하자면 그 수가 말도 못 하게 부족했다.
“공주님, 이쪽으로!”
“코제스!”
협상이 무산되면서 왕자는 제 측근들이, 그리고 공주는 록이 맡아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중이었다. 록은 금색의 방어막을 펼쳐 이쪽으로 오는 검은 구슬을 막아내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것에 맞으면 기절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검은색 구슬에 맞은 병사는 잠든 양 기절해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파도를 부리고 환영을 보게 하는 수준의 힘은 없는 듯했지만 각자가 가진 묘한 재주가 아군들에게는 새로운 변수로 다가오고 있었다.
“록! 코제스를 데려와야 한다.”
“가셔야 합니다, 공주님. 지금은…….”
방어막이 언제까지 버텨 줄지는 록 자신도 모른다. 그건 신성한 힘을 허락한 하늘에 달려 있었다.
왕자 측이 뻐기듯이 말하기를, 전 군이 이리로 온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랬다. 그러니 저 군대가 전멸하면 왕실 측은 알거지가 될 거다.
“후퇴해라!”
록은 신관들이 있는 성내에 들어가 끝장을 보기로 했다. 힘을 모아 성벽에 정화하는 장치를 달아 두면 얼마간은 파르난의 침입을 막을 수 있을 거였다.
왕자 측은 신관을 데려오지 않은 듯했다. 수비타 왕국 전역으로 공격이 뻗어 나가게 된다면 그토록 얕잡아보던 신관의 필요성을 알게 될 거다.
당분간은 훗날을 기약하며 몸을 숨겨야 한다. 그러자면 구심점이 될 왕족은 반드시 지켜 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동생인 코제스의 안전이 걱정되는 공주의 걸음이 늦어지는 건 이해하고도 남지만 저쪽이 왕자를 잘 보호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록은 무례한 손길로 그녀의 허리를 안고서 성문으로 뛰어들었다.
“여깄다, 공주.”
양손에 칼을 든 파르난의 남자가 록의 앞으로 뛰어왔다. 남자가 휘파람을 불자 세 사람이 더 붙었다. 성문을 통과 중인 병사들은 제 목숨 부지하기에 바빠 관심을 두지 않는다.
후퇴하라는 명령을 아군에게 전하는 병사들의 배에 칼이 꽂혔다가 나온다. 파르난의 사람들은 겨우내 굶주린 늑대처럼 싸웠다.
“도망칠 곳은 없어, 신관.”
“공주를 내주면 너는 살려 주지.”
그를 촘촘히 에워싼 파르난의 사람들이 검은 구슬을 던졌지만, 파지지직, 방어막이 그 사특한 힘을 막아 냈다.
“튼튼한데.”
“네가 해.”
“왕자를 부르는 게 낫지 않겠어.”
“우리가 잡으면 될 것 아니야! 이것마저 그것들한테 뺏기자고?”
말다툼하는 파르난 사람들의 시선이 분산되는 동안 공주를 등 뒤에 숨겼다. 발에 걸리는 아군의 시체가 더는 놀랍지 않았다.
파르난의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검은색의 구체를 던지거나 신체 일부를 변형시키거나. 그게 보편적으로 보이는 능력인 듯싶었다.
“비켜 봐. 내가 하지.”
젊은 남자가 검은 구체를 방어막에 가져다 댔다. 맞지 아니한 정반대의 힘이 만나 불빛이 일었다.
“그래도 잘 버티네.”
“이봐, 다같이 하자고.”
사람이 만든 검은 불길이 병사의 등에 붙었다. 그 병사는 곧장 쓰러져 땅바닥을 뒹굴었다. 불이 꺼지지 않아 그는 눈을 뒤집으며 흰자위를 보였다. 그렇게 죽어 간 병사만 수십이었다.
버티기에 들어간 록은 땀이 비 오듯 했다. 방어막을 뚫고자 하는 사람의 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공주님. 도망칠 준비를 하세요.”
“록. 저들이 원하는 건 나야. 그러니…….”
“시간을 벌 테니 뒤쪽으로 도망가십시오. 성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을 겁니다.”
몇 년간 치료에만 힘을 쓰느라 방어와 공격 수련은 게을리했었다. 실력이 녹슨 게 당연했다.
“라드군이 있으니 조금만 힘을 내, 록.”
그러니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공주의 말은 역효과를 가져왔다. 실종된 나디사 마로닌이 떠오른 것이었다. 라드군이라는 단어에 피 흘리며 죽어가는 나디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마저 잘못된 거라면 이 땅에 미련이 있는 것이 없었다. 힘이 부족해 얇아진 방어막을 들고 록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수명을 생각 않고 힘을 쓰면 공주가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생각은 나중 일이었다.
공주는 저 연약한 몸으로 지키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었다. 전쟁의 피비린내가 그녀에게까지 미쳤는지 그 당차던 소녀가 파들파들 떨었다. 냉대와 무시가 세상에서 제일 아픈 공격인 줄 알았던 그녀는 팔과 다리가 없어진 이들의 난무를 보고서 공포에 질렸다.
병사 중 일부는 왕자를 따라갔고 나머지는 성안으로, 나머지는 도망을 쳤거나 죽었다. 책 속에서의 전쟁은 매우 비장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공주가 몸소 겪은 현실에서의 전쟁은 더럽고 비참한 것이었다.
죽어 가는 사람이 내보내는 오물과 피의 냄새는 살아 있는 사람의 감각을 못 쓰게 만들었다. 생명을 잃고 꺼져 가는 눈동자가 저를 향하고 있는 게 아닌데도 죄책감이 그녀를 마비시켰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저 사람들이 어떤 이의 부모이고, 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쓰임 다한 말처럼 쓰러지는 사람들이 주는 그 황량한 공포감이 그녀의 눈가를 적셨다.
그렇다면 저를 지키자고 신관복이 젖도록 뛰는 록은 어떠한가. 공주 하나 살리자고 수비타 왕국의 사랑을 받는 신관이 죽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공주님! 뛰셔야 합니다!”
귀에 거름막이 씐 것도 아닌데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그날따라 먹먹했다. 방어막 너머에 있는 파르난의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잡았다.”
그의 비웃음이 희미해지는 방어막을 뚫고 들어왔다. 방어막의 얇기가 양피지 수준이 되는 찰나 록이 한 손으로 공주의 손목을 잡아챘다. 공을 세우겠다고 들러붙는 사람들이 방어막 위에 엎드리거나 드러누웠다.
“저게!”
“아아아악!”
록의 방어막이 팍 소리를 내며 깨짐과 동시에 노란빛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라드군이다! 잡아!”
희망의 바람이 불었다. 라드가 내어 준 바람은 파르난의 검은 구체를 꺼트렸다.
“라넌!”
록은 맨 앞서 라드를 몰고 있는 라넌의 이름을 불렀다. 그 뒤로 날아오고 있는 수십 마리의 라드는 잔당들을 해치운 증거로 부리와 발톱에 피를 묻히고 있었다.
“아아악!”
라드의 날개에서 부는 바람을 이기지 못한 남자의 어깨에 샛노란 발톱이 박혔다. 그를 무게로 누른 라드의 머리 위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록! 공주님은 무사합니까?”
“누군가 성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야 될 듯합니다. 저는 알아서 갈 테니…….”
라드의 비늘을 자세히 보고픈 코제나는 공주는 목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그 순간 섬뜩한 느낌이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쌍둥이인 그녀만이 아는 느낌이었다.
“코제스.”
확실했다. 이건 동생인 코제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