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물을 잘못 들이켠 것처럼 코가 매웠다. 공주의 성 근방에서 회색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오느라 지친 나디사는 눈이 부신 양 얼굴을 찡그렸다.
- 끼이이이…….
탄 내가 계속되는 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란 소리였다. 빡빡한 눈을 비빈 나디사가 욕심껏 속력을 내 보려는 차였다. 하늘을 같이 날아오던 디디가 한계를 맞이한 듯 비실거렸다.
어젯밤에도 디디의 체력을 고려해 노숙하며 쉬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그녀가 기대했던 것보다 체력이 덜 찬 느낌이 착각은 아닐 거다.
하기야 양이 차지 않는 샌드위치로 배를 채우고 날려니 보통 힘이 들겠는가. 나디사는 구름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며 신속히 다음 쉼터를 찾아봤다.
척하면 척인 로마는 속도를 늦추며 뒤로 날아갔다. 주인을 잃고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디디는 로마가 제 옆으로 오자 콧김을 내었다.
본인의 상처를 알아달라고 치대는 그 표정이 제 주인을 닮았다. 저가 아파 보이는 기회만 있다 하면 앓는 소리, 약한 소리를 해서 자신을 무력하게 했었지. 디디가 죽지 않고 홀로서기에 성공한 것도 주인의 성격을 닮아서일까.
아픈 라드를 두고 별난 생각을 다 한다, 싶지만 이건 새로 생긴 그녀의 습관 같은 거였다.
그와 한 이별은 큰 가르침을 줬다. 예전에는 이만큼 생각에 빠진 적이 없었다. 생각이라는 건 그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전쟁이었다. 누구는 맞고, 누구는 틀리고. 그런 걸 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늘 이 전쟁에서 무승부를 얻어 냈다. 적군도 아군도 그녀니까. 그러므로 생각은 전쟁에 전쟁을 거듭하면서 그녀의 머릿속을 파괴하기만 할 뿐이다.
빈 머리나 마찬가지인 그녀는 그의 흔적을 온갖 곳에서 발견해 내고 만다. 무엇이든 그와 연관 짓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처럼 그를 생각했다.
“아, 미안.”
저를 무시하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디디가 몸싸움을 걸어왔다. 어깨를 부딪치며 로마의 몸을 흔드는 방식으로. 이 또한 히아신이 잘못 가르친 것일 터다. 저를 보지 않으면 쳐서라도 보게 만든다니. 그 남자에게 잘못 배워도 한참 잘못 배웠다.
“그럼 저기 잠깐 내려가자.”
알고 있는 마을이었다. 강과 산을 낀 저 마을이 심심치 않게 꿈에 나오는데 설마 위치를 모를 리 없지 않은가. 땅콩사탕의 냄새가 진하게 풍길 것 같은 마을은 잊고 싶은 기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래.”
로마가 내려가려는 건지 말라는 건지 빨리 정하라는 듯이 흔들거렸다. 나디사는 내려가기를 기대하고 있는 라드들의 눈을 피하며 대답을 미뤘다.
알고 있었다. 그 기억들과 그 남자에게서 도망치는 것만으론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도 다 한때의 감정이고 기억일 테지. 그 한때가 자신의 전부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 * *
“치수는 그 정도면 괜찮으세요? 더 줄일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걸로 비상 자금을 남김없이 털어서 썼다. 단추를 잠근 나디사는 헌 셔츠를 버려 주겠다는 점원의 말에 조용히 끄덕였다.
히아신의 실종, 어쩌면 그의 정체까지 밝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꾀죄죄하게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돈을 받아 낸 점원이 계산대로 가다 말고 빤히 그녀를 바라봤다.
“저기.”
“네.”
“저번에 잘생긴 손님하고 같이 오시지 않았어요? 저쪽 여관에 묵고.”
“아…….”
점원의 말이 들리지 않는 척하며 나디사는 벗어 두었던 망토와 짐을 챙겨 들었다. 점원은 그녀의 의중을 눈치 있게 알아듣고서 웃음으로 무마하려 들었다.
“아우, 괜한 걸 물었네. 남녀 사이가 그런 건데, 원래.”
“네. 가 보겠습니다.”
“저……. 그런데 지붕에 있는 것도 데려갈 거죠?”
천장이 무너지지는 않겠냐며 묻는 점원의 표정 덕분에 나디사는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라드들을 어디 둘 곳이 없어 점원의 허락을 맡고 지붕 위에 두었다. 저한테나 귀여운 아이들이지 남들 눈에는 이빨 달린 괴물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붕 안 무너지게 알아서 조절하고 있을 거예요. 금방 데려가겠습니다.”
“아, 물론, 예.”
어중간한 톤으로 대답한 점원은 더 손쓸 방법이 없다는 얼굴로 물러섰다. 나디사는 빠른 손길로 망토를 채우며 양복점을 나섰다. 딸랑, 거리는 종소리가 점원의 인사 대신이었다.
어디를 봐도 느껴지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느긋한 분위기가 자신에게는 위협적이라니. 뭣보다 슬픈 것은 이 아름다운 그것들을 그녀가 쫓아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잘하면 평생을.
“로마, 디디.”
지붕 아래로 꼬리를 내리고 있던 로마가 재빠르게 반응했다. 엉덩이가 무거운 로마는 앉아서 듣겠다는 듯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고기 사 올 테니까 여기 잠시 있어. 알았지.”
고기라는 단어를 알아들은 디디가 종달새처럼 울었다. 못 말리겠다며 웃은 나디사는 뒤로 돌다가 꼬마 소녀와 발끝이 닿았다. 저번에 꽃을 팔던 소녀, 그리고 그녀의 동생으로 보인다.
“안 물어요?”
소녀의 관심사는 꽃 판매 말고 다른 데로 간 모양이었다. 로마를 보는 눈빛이 영락없는 철부지 아이 같았다.
“착한 사람은 안 물어.”
소녀의 두려움을 이해한다. 그녀도 처음 한걱정이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꽃은 얼마니.”
풀잎 같은 손으로 꽃을 따 온 소녀들에게 연민을 느낀 나디사는 가벼워진 지갑을 꺼냈다. 라드들에게 고기를 사 주려고 남긴 돈이었지만 어차피 곧 공주의 성이니 괜찮을 터다.
하지만 꽃을 판다는 목적을 잃어버린 소녀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라드와 교감을 하려고 시도했다.
“화났나 보다. 이빨 보여.”
성질이 난 로마의 으르렁거림이 재밌는지 좋아서 손뼉을 쳤다.
“만져 보고 싶다.”
저게 고양이라도 되는 줄 아는 소녀는 내려오라며 손바닥을 팔랑거렸다. 로마는 서늘한 포식자의 얼굴로 소녀의 열렬한 호감을 튕겨 냈다.
“한 번만 만져 보면 안 돼요?”
나디사는 약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예를 들면 소녀나 아픈 히아신 같은 이들, 그들에게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게…….”
갑자기 덜컥하며 놀란 것처럼 로마가 고개를 쳐들었다. 새로운 동작을 보게 된 소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동생의 손을 잡았다. 로마는 주인이 아닌 사람의 시선과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는다.
“로마, 왜 그래.”
옆자리에 있는 디디도 한 점 흔들림 없이 하늘을 주시하고 있었다.
“얘들아.”
“네?”
“잠시만.”
세워진 꼬리 모양을 보니 전투를 앞둔 것 같았다. 나디사는 불안한 눈길로 하늘을 더듬었다. 이전과 바람의 흐름이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한가로이 오후를 보내는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게 들릴 즈음이었다. 하늘이 열렸다.
그건 하늘을 찢고 나타난 구멍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점원이 가져다준 차를 마시던 노인이 손가락질로 하늘을 가리켰다.
길 한복판에 멈춰 서서 구멍의 개수를 세던 이들이 같은 동작, 같은 자세로 저마다 가진 의문을 나타내고 있었다.
“로마, 디디.”
부름을 받은 로마가 준비 자세를 풀고 일어나 날개를 폈다. 구멍이 열린 건 그녀의 로마가 내려오기 전이었다.
“저거 사람 아니야?”
“세상에, 무슨 장난을 치는 건가?”
손이 나와 구멍을 잡고 머리를 빼낸다. 간만에 볼거리가 생겼다고 떠들던 이들도 하늘 구멍에서 사람이 나오자 몸을 뒤뚱이며 뛰어갔다.
비명과 두려움은 전염병같이 남에게 옮겨붙는다. 손에 잡힐 듯하던 오후의 평화는 사라졌다. 한 남자가 파랗게 질려 딸을 안고 달려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섞여 마을 밖으로 달려가는 때에 나디사의 눈은 침입자의 몸에 새겨진 문양을 훑어 냈다.
저 문양을 본 적이 있었다. 히아신의 몸에도 저와 비슷한 게 있지 않았나.
“이리 와.”
도망치기엔 늦은 소녀들의 손을 잡아끌어 로마의 옆으로 데려갔다. 지붕에서 내려온 로마는 쓸데없이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다. 로마의 등에 아이들을 태우기 시작하는 때에 쿵, 하고 땅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단체로 까만색을 맞춰 입은 침입자들은 내려오자마자 고향에 온 양 마을을 쭉 훑어보았다. 그들 중에 몇몇이 특이한 행색을 한 나디사에게 관심을 가졌다. 라드와 그녀를 두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건 뭘까.”
“라드군 같은데.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