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공주라는 지위가 몸에 꼭 끼는 옷인 것 같은 소녀의 이름은 코제나였다. 쌍둥이 동생인 왕자의 이름은 코제스였고. 아침이 밝아 오는 이른 시간대에 전서구를 보내온 왕자 측은 공주가 성 밖으로 나올 것을 명하고 있었다. 다분히 굴욕적인 내용이었지만 성문을 열기로 허한 그녀가 못 받아들일 것도 없었다.
저쪽이 명예를 포기한 저질스러운 집단이라는 것만 재차 확인했을 뿐이었다. 사툰 종족 정점에 서 있던 수비타 왕족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공주는 동생인 코제스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첫 번째 신관이 그녀를 선택했어도 허울뿐인 공주 신세를 면치 못했을 거였다.
시위하듯이 오후가 돼서야 움직인 공주는 머리를 땋아 주려는 시녀의 손을 물렸다. 패전한 공주 주제에 한껏 치장할 필요가 무어가 있나 싶었다. 시녀들은 당황한 눈치지만 공주의 상황을 보아 채근하지는 않았다. 어젯밤부터 저쪽은 축제, 이쪽은 장례식이었다.
왕이 죽고 왕세자가 죽게 생겼는데 그녀라고 안심할 이유는 없겠지. 죽으러 가는 이를 보듯 하는 시선을 나무라는 게 아니지만 조금 더 담대하게 굴 필요가 있었다. 코제나 공주는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거두며 일어나 울고 있는 시녀들의 손을 한 사람, 한 사람 잡아 주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왕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올랐던 그녀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을 거다. 공주는 명예로운 왕족다운 걸음으로 침실을 나섰다. 문 앞에는 신관 록과 측근 둘이 대기하고 있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는 걸 모르는 척해 줬으면 좋겠다. 지지해 주는 사람의 수가 눈에 띄게 차이 나던 시점부터 그녀는 회담이다 뭐다 하며 시간을 끌어 볼 참이었다. 신관 중에 적지 않은 수가 록을 믿고 있으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공주 측 신관 대표가 된 록은 책임을 느끼는 양 말을 아끼고 있었다. 과묵한 사내들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눌리기 직전인 코제나는 제법 발랄한 투로 말했다.
“보이나. 록.”
“네?”
생각에 잠겨 있던 록은 공주가 가리키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자리는 동생인 코제스와 마주 보는 위치였다.
“둘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가능하다면 안부도 묻고. 우리 남매 사이가 그렇게 나쁘진 않았으니.”
겁을 먹은 동생의 등 뒤에는 사람과 사람이 커튼처럼 쳐져 있었다. 신관 랍은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늙은 야비하게 생겼다. 저런 이에게 나라가 넘어가게 생겼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아버지와 나의 형제는 오랜 세월 우리가 수비타를 갖는 게 너무도 당연해져서 저런 이들을 믿고 사랑했지. 내 말은 힘이 없었고.”
“공주님. 저들의 요구가 과하다고 생각하면 우선 파하시고 다시 자리를 저희 쪽에서 만들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하늘에서 불화살이 날아오면 몰라도 저들은 오늘 나와 이 성을 끝내려고 할 거야.”
말을 마친 코제나는 저에게 마련된 지옥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귀족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테이블 앞에 섰다.
우유 냄새가 나던 코제스가 그때처럼 어리고 예쁜 점. 좋은 점은 그것 딱 하나였다.
“공주님. 오는 길은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성문 앞에 상을 차려 두고서 오는 게 힘들었냐고 묻는다. 공주를 온실 속 화초로 보며 비꼬는 것이었다. 상대측의 도발에 흥분하지 않기로 맹세한 코제나는 가볍게 끄덕이며 착석했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코제스는 쌍둥이 누이에게 말을 걸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회담 날짜를 정해 두고 기습하는 비겁자 무리의 왕으로는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다.
“왕자님, 그럼 시작하시죠.”
“아, 그래.”
늙은 너구리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동생을 보는 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무표정한 얼굴의 공주는 양피지를 펼쳐 드는 동생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숭고한 신의 뜻을 받들어 나를 수비타 왕국의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고 지금 당장 무의미한 반항과 세력 규합을 멈추도록 한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지금 당장 그들을 모두.”
놀란 것처럼 코제스가 숨을 들이마시자 신관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왕자님, 어서.”
얼굴이 새빨개진 왕자는 혀가 반토막 난 것처럼 우물거리며 글을 읽었다.
“……몰살할 것이다.”
동생의 앞날이 걱정된 코제나는 협상을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저곳에 인장을 찍으면 동생은, 저 애가 낳은 아이는 신의 이름 아래서 놀아나게 될 것이었다.
뒷배가 약한 그녀로서는 외국의 왕자와 결혼하여 힘을 비축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동생 구출은 그다음에 할 일이었다.
“그 뜻을 받아들이는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조건?”
속으로 어두운 나날을 보내게 될 코제스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어떤 협박과 회유를 당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유순하고 사랑이 넘치던 어린 동생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댈 곳은 그뿐이었다.
“동맹국 중 하나와 결혼하여 수비타 왕국에 도움이 되고자 하니 나의 시녀들과 지참금을 받기를 원한다.”
공주를 외국으로 내보내는 건 위험 부담이 컸지만 항복한 공주가 시집가는 걸 반대할 사유가 없는 귀족들이 헛기침만 해댈 때였다.
아무 말 없이 눈만 끔뻑거리던 첫 번째 신관 랍이 미소로 그 말에 응수했다.
“하면 혼인하게 될 사내는 저희가 정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시녀로 가장한 첩자를 심어 두는 것도 예상했다. 하지만 평생 그러진 못할 것이었다. 더욱이 그 나라로 시집가면 그녀는 최소 왕자비였다. 왕국의 신관이 그 나라의 왕자비를 어떻게 하진 못한다.
“그리고 하나 더.”
들어줄 만한 조건이라고 생각한 신관 랍이 허락한다는 의미로 미소를 보였다. 비록 잡힌 물고기 신세인 공주에게 보내는 시선은 혹독하지만.
“이 성은 왕실에 귀속되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나도 왕실의 일원이니 유산 하나는 물려받아야겠어.”
“유산이라니요.”
“왕세자인 내 형제가 죽으면 그가 생전에 모으던 왕실 보물에 대한 자료와 연구원을 내게 귀속시켜 주었으면 한다.”
근사한 성이나 영토를 바랄 줄 알았던 공주가 하필 최악의 패를 골랐다. 왕실의 몰락을 구경하고 있던 모두가 한마디씩 꺼내며 술렁거렸다.
“왕세자님의 그 보물찾기 말씀입니까?”
세간에서 한심하다고 평가받는 왕세자의 취미 중 하나였다. 잃어버린 왕실의 보물찾기. 전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 그것은 어떻게 생겼는지도, 무엇에 쓰는지도 알지 못한다. 증거라고는 역사서에 짧게 한 줄 써 있는 게 다였다.
그런 것에 국고를 낭비하는 왕세자에게 질려 오늘날 힘을 보탠 귀족도 있었다. 그런데 항복하러 나온 공주가 왕실 일원임을 내세워 그걸 유산으로 달라고 하다니.
“허, 참.”
“곤란한가? 어려운 것도 아닐 텐데.”
헛물 켜는 소리를 하는 공주에게 감사해야 하나 어쩌나.
“뭐, 그런 것이라면야.”
하지만 모두가 비웃는 그곳에 코제나의 희망이 있었다. 왕세자는 술과 파티를 사랑하긴 했어도 감이 없는 작자는 아니었다. 왕실 교육을 무사히 마친 왕세자가 운명처럼 꽂힌 게 그 보물찾기였다. 코제나는 제 형제를 믿었다.
“여기에 서명을 적어 주시면 끝이 납니다.”
비교적 평화로운 협상이었다. 그녀의 측근들은 신관 록을 포함해 총 세 명이 왔다. 하나같이 모욕 같은 이 시간을 견뎌 내는 얼굴이었으나 공주인 그녀는 웃어야만 했다.
하인이 전해 온 깃펜을 받아 들고 잉크를 묻혔다. 행동이 느려 터진 그녀를 닦달하는 이는 없었다.
- 아아아아악!
격조 있는 자리에 맞게 침묵을 지키던 이들이 산만해질 정도로 긴 비명 소리가 뒤쪽에서 뻗쳐 나왔다. 서명하던 공주는 뒤돌아보며 천천히 깃펜을 놓았다. 중요한 순간을 망친 이를 잡아 오라는 눈길이 오가고 있을 찰나 비명은 하나가 아니라 둘로 늘어났다.
- 아윽!
- 우으으억!
셋, 넷, 다섯. 왕실군 뒤쪽 열이 소란스럽자 실상을 알아보기 위해 앞 열에 서 있던 지휘관이 고개를 돌린 순간.
“저기!”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사람들이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았다. 회오리가 치는 구멍이 하늘에 수십 개 뚫려 있었다.
“이 무슨…….”
그 구멍으로 사람의 손이 툭 튀어나왔다. 그 손에 있는 문양을 알아본 자가 비명을 지른 게 시작이었다.
“파르난…….”
“파르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