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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44화 (144/210)
  • 144화

    적합한 군 통솔자가 없어 방어에 취약한 공주의 진영이 대낮에 기습을 당했다. 성벽을 에워싸기 시작한 왕실군과 귀족 연합의 수가 기염을 토할 정도였다. 나쁜 일은 겹치어서 일어나는지 식량 창고 쪽에서 작은 화재 사고가 나 버렸다. 사람 열이 달려들어 끄기는 금방 껐다지만 병사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데에는 충분했다.

    회담을 기대하던 공주 측은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나타난 왕실 군대가 코앞까지 왔다는 소식에 참담한 심정이었다.

    “공주님.”

    접전 준비 중인 군대를 창밖으로 내려다본 공주는 이렇다 할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평화적인 대화를 기대했던 신관 록도 이 사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신전과 연합한 왕실군이 기습할 줄 몰랐냐는 측근의 질문에 그는 낯이 뜨거웠다.

    데려온 신관들은 전투 능력이 미비했다. 그나마 란과 록이 보호막 정도를 펼칠 수 있으나 그게 얼마만큼 갈지도 알 수 없었고.

    “항복하겠네.”

    “공주님!”

    공주의 측근이라고 할 만한 자들의 군대를 다 모아 봤자 성문 앞에 모인 이들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숫자였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공주의 뒷짐 진 손에 들린 양피지가 뭉개졌다. 이번 회담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 잘 아는 록은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제 책임이 큽니다. 평화로운 회담이 잘 이루어질 줄 알았다니요.”

    통탄의 눈물을 흘리는 이는 공주의 책사로 왕자 측과의 회담을 주최한 이이기도 했다. 상대 병사들의 열기 띤 함성이 성벽을 넘어 공주의 창문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바람에 실린 살기를 정통으로 맞은 공주가 나긋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고한 피를 흘리지 않는 걸세. 저들은 적군이 아니야. 내 동생과 그들을 따르는 수비타의 국민들이지.”

    공주의 추락을 걱정하고 있던 록은 놀란 얼굴을 했다. 죽을힘을 다해 싸우라는 말밖에 못 하는 줄 알았던 왕족의 입에서 항복이 나온 것도 놀라운데 말이다.

    “나는 저들과 협상을 해 보겠다. 최대한 저쪽의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최후의 선은 지켜 보겠어. 어차피 원하는 건 나일 테니.”

    “공주님…….”

    마지막을 거론하는 공주의 말에 울음바다가 된 분위기 속에서 록은 하늘을 살펴보고 있었다. 보통이면 있어야 할 라드군이 보이지 않았다. 맑게 갠 하늘을 보는 그의 시선이 차갑게 굳어 갔다.

    라드군과 협상이 잘되지 않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작전 준비하고 있을지. 월등히 많은 라드군의 수를 생각해서라도 공주는 백기를 든 것이었다. 라드군이야 말로 수비타 왕국의 가공할 만한 무기였으니.

    적군이 아니라 나의 동생. 공주의 말속에 담긴 애정을 읽은 록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친동생과 대치 중에도 이성과 도리를 지키는 공주가 진정 왕관을 이어받아야 마땅했다.

    “세보라.”

    “네, 공주님.”

    “성문을 열라고 해.”

    공주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입에서 한숨과 탄식이 떨어져 나왔다. 공주는 소란을 무시하듯 해가 창창히 떠오른 바깥만 보았다. 곧 해가 질 거였다.

    * * *

    집을 떠나와 꼬박 반나절을 달려온 나디사는 공주의 성으로 가서 보고 없이 이탈한 벌을 받을 작정이었다. 당연히 그리사의 원망도 들어 줄 것이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히아신으로 인해 탈이 나 버린 자신의 삶을 고쳐 낼 거였다.

    “여기서, 쉬자. 로마, 디디. 이리 와.”

    라드 두 마리와 달려도 될 만큼 편평하고 드넓은 초원이 오늘의 여관이었다. 정식으로 허가된 여관에 묵기는 싫었다. 어쩐지 따듯하고 좋은 곳에서 잠을 자는 건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초원에 누워 있으니 바람이 지나는 방향이 한눈에 보였다. 마로닌 부인이 싸 준 샌드위치를 먹으며 나디사는 팔베개를 베고 누웠다.

    “별이 참 많다.”

    비늘이 떨어지게 놀던 라드 두 마리는 잠이 들 때가 되자 그녀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로마와 사이가 좋은 디디는 그녀의 명령 없이도 동행하는 것을 택했다.

    “이불 덮어 주게?”

    로마가 꼬리로 제 배를 누르는 걸 느낀 나디사는 피식 웃고 말았다. 불을 피울 생각도 없는 나디사를 나무라듯이 꼬리를 둘러 몸을 감싸 준다. 새초롬하게 눈을 뜬 로마 덕분에 그녀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 집 나간 망아지 같은 남자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파르난으로 돌아간 건가. 착실히 나라를 망하게 할 준비를 하고 있을까. 어쩌면 내 시선을 잠깐 돌리려고 한 것일 수도 있겠지. 그리고 나는 그에게 마음을 허락한 멍청이겠고.

    입맛 떨어지는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차지했다. 그대로 한 입 베어 문 샌드위치를 풀 위에 올려놨다. 그때 코를 들이미는 디디가 장난 걸듯 그녀의 손목을 들췄다.

    “먹고 싶어?”

    샌드위치를 먹어 본 적 없는 디디는 식욕이 돋는지 입을 벌렸다. 날카로운 이빨에 닿지 않게 혀를 말아 샌드위치를 가져가는 게 웃겼다.

    절정에 이른 여름의 풀냄새를 맡으며 나디사는 제 감정을 다시금 정리했다. 원망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이 감정의 실체는 그리움이었다.

    하늘에 뜬 별을 세어 보아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삶을 고치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 * *

    성문이 열린 것을 확인한 왕실군은 성벽 바깥에 천막을 쳤다. 백기를 든 병사가 성문을 열어 주어 아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를 거두었다. 축제의 밤이었다.

    왕자 측의 재정비는 해가 떨어질 즈음에 끝이 보였다. 그사이 라드군은 원래의 회담 장소였던 소라반으로 보내졌다가 점령이 끝나고 기습 소식을 들었다.

    소라반까지 라드군을 이끌었던 라넌 샤스는 공주의 성 앞에 쳐진 천막 사이를 가로질러 지나갔다.

    “라넌 경.”

    “나중에 해. 보고를 드려야 하니 왕자님의 위치부터 찾고.”

    “네.”

    소라반에서 힘을 빼고 돌아온 그녀의 표정은 누구 하나 죽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라드군은 기습 작전에서 제외돼 물을 먹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소라반에 맞게 전열을 정비하는 데에만 사흘을 썼다. 그런데 회담 장소로 보내졌던 이유가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서라니.

    “비켜.”

    수비타 왕국은 라드군의 가호를 받는 나라였다. 신전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도 이쯤 되면 재미없었다.

    “안에 첫 번째 신관님이…….”

    “비키라고 했어.”

    사람을 똥개 훈련을 시켜도 유분수지. 빈 벌판을 지키다가 온 라드군의 명성은 오늘을 기점으로 땅에 떨어졌다. 회의에서부터 배제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건만 일을 이렇게 진행시킬 줄은 몰랐다.

    “라넌 경!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만류를 뿌리치고 들어온 라넌은 보이는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숫자로 밀어붙여 공주의 성문을 열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만 그거야 어찌 됐건 지금은 전시였다. 상대의 성문 앞에 군인들을 쌓아 두고 지휘관이라는 자들이 모여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오, 라넌.”

    “늦었군 그래. 자네도 이리 와서 한잔하지.”

    라넌의 싸늘한 시선은 승리에 취한 고위 귀족들을 지나 중앙을 차지하고 앉은 신관에게 갔다. 술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는 첫 번째 신관의 표정은 의기양양했다. 품에 싸고돌던 왕자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진 말게. 그 쪽에도 혹시 공주가 사람을 보냈을 수도 있으니까. 가장 빠른 라드군을 보낸 거야.”

    승리의 주역인 첫 번째 신관이 여유 부리며 말했다. 그녀의 주인은, 아니, 라드군의 주인은 왕자였다. 그런데 왕자는 코빼기도 볼 수 없고 웬 늙은이들이 축배를 들고 있다니. 하대가 기본인 신전은 말할 가치도 없었다. 왕자가 이 자리에 없다는 걸 확인한 라넌은 인사 없이 돌아서 나갔다.

    그때 그녀가 떠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듯이 경박한 웃음소리가 천막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적군 없이 진 기분을 맛본 그녀의 발은 한곳에 멈추어 섰다.

    “날은 좋군.”

    하얀 깃발이 내달린 공주의 성벽을 올려다보던 중에 수하가 달려왔다.

    “라넌 경.”

    “왕자는.”

    “그게…….”

    왕자의 시녀가 전하길 초저녁에 잠들었단다. 자신이 방탕한 왕세자를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제 신세를 비하하듯 터져 나온 그녀의 헛웃음이 밤바람에 옮겨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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