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라드는 적이 오거나 위급 상황임을 알릴 때 주인만이 들을 수 있는 울음소리로 신호를 보낸다. 뒤이어 찾아온 정적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나가 봐야 돼.”
다음 신호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던 그녀는 벌떡 일어나 겉옷을 챙겨 입었다. 상대적으로 침착한 히아신은 그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디사는 여기에 있어. 확인은 내가 하고 올게.”
“나도 주인이야. 같이 가.”
하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타협점이 없는 것처럼 차가웠다.
“늦은 시간인데 둘이 다니면 어머니가 걱정하시겠다. 나만 보내는 게 나을걸.”
“왜 고집을 피우지? 너는 라드들이 우는 이유를 알고 있는 거야?”
“그럼 딱 10분만. 그만큼만 내가 확인하고 올게.”
10분이라는 시간을 정해 둔 히아신은 그녀의 재킷에 있는 회중시계를 가리켰다. 그리고 손가락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린 참에 그가 열린 창문으로 껑충 뛰어내렸다.
“히아신!”
다친 데 없이 떨어진 히아신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웃는 얼굴로 다녀와 다시 이야기하자는 그의 말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10분. 창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나디사는 그가 주고 간 은색의 시계를 재킷 주머니에서 꺼냈다. 낡고 헤진 시계의 초침 위로 그의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하루만…….’
고작 하루를 조르는 그의 목소리가 다름 아닌 그녀의 목을 조였다. 그녀도 그와 저녁을 보내는 날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나라와 사람을 개보다 못한 존재로 보던 히아신은 더는 없는 것일까. 저도 모르게 미소 지은 나디사는 비스듬히 벽에 기댔다. 히아신이 제 손으로 그려 준, 까만 연필로 칠한 그의 초상화. 그게 그녀의 책상에 있었다.
상상은 자유였다. 그와 손을 잡고 거리에 나가 초상화를 의뢰해 보는 날이 올까.
남은 시간은 이제 5분. 나디사는 강박적으로 시간을 재며 창밖을 바라봤다. 조금 있으면 히아신이 나타나 라드끼리 다투고 있었다고 말해 줄 것만 같아서.
거의 3분.
시계를 보고 싶지 않은 그녀는 작은 책장에 꽂힌 아무 책이나 뽑아 들었다.
‘나디사!’
한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이었다. 아래층서 들린 비명은 필시 마로닌 부인의 것이었다.
‘나디사!’
앞날을 예견하듯 심장이 뛰었다. 나디사는 한달음에 달려가 방문 손잡이를 당겼다. 밖으로 나오자 시커멓게 그을린 벽이 보였다. 혀를 날름거리는 새빨간 불길이 부엌을 망치고 있었다.
마로닌 부부의 손때가 묻은 세간들이 불에 타들어 갔다. 치마로 코를 틀어막은 나디사는 일 층에서 울고 있는 마로닌 부인을 발견하고서 곧 안심했다. 잠옷 차림의 로단은 욕실에 있는 물을 퍼 나르는 중이었다. 나디사는 빨간 불길 속으로 뛰어들며 약속한 10분이 다 되었다는 걸 가까스로 기억해 냈다.
10분. 히아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하루만 더 달라고 빌다니. 자존심을 땅콩사탕 값에 팔아먹은 히아신은 미친 사람처럼 키득거렸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게 무언지는 확고해졌다. 진작에 이러지 못한 게 사무칠 만큼.
아버지를 배신하자.
그렇게만 된다면 나디사의 삶에 얹혀살 수 있었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세상에서 잘 벗어난다면야.
결정은 빠르게, 실행은 뜨거운 불처럼 화끈하게. 배운 대로 하면 될 일이었다.
들키지 않고 파르난에 숨겨 둔 돈을 가져와야겠다. 부정하게 번 돈일지라도 그 정도 재산은 있어야 마로닌 부부의 사윗감이 될 수 있었다.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그는 나디사와 축복을 받는 한 쌍이 될 거였다.
폐가로 들어서자 그의 얼굴에 내리던 달빛이 걷혔다. 무엇 때문에 울고 있었던가. 아버지를 버리면 나디사를 얻는다니. 두 번 재고할 필요도 없이 한쪽을 놓아야 한다면 그건 아버지였다. 가질 수 있는 행복을 반복적으로 생각하던 히아신의 앞에 불행이 떨어진 건 그즈음이었다.
그의 디디가 다리를 다쳐 울고 있었다. 더욱이 로마의 전신은 밧줄에 묶여 있었다. 두 마리 라드는 울음소리를 낼 수 없게끔 입이 틀어막혀 있었다. 아까 그 울음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흘린 것이었다.
함정이다. 히아신은 목에 찬 금색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돌아가겠다고 말한 지 3분이나 흘렀다. 10분을 넘으면 그녀도 나오겠다고 할 터였다.
함정은 누가 팠는지. 둘 중 누구를 위한 건지. 그걸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양쪽에 라드를 두고 선 히아신은 비상한 청각에 집중을 부었다.
사랑에 눈이 먼 디디는 묶여 있는 로마를 구해 달라는 듯이 꼬리를 가만두지 않았다.
“디디. 가만히 있어.”
그에게는 로마와 나디사 같은 유대 관계가 없었다. 그는 어릴 적에 파르난의 힘을 받았다. 사람은 두 가지 능력이 공존할 수 없었다. 해서 그는 디디와 교감을 하는 대신 그의 능력으로 최면을 걸어 두었다. 거의 강제로 교감을 시킨 것이나 다름없음이었다.
최면으로 시작된 관계이니 애정이 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디디의 울음소리는 깊은 곳에 사는 그의 양심을 아프게 쳤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방관하고 있던 그의 뺨을 치는 듯한 충격이 있었다. 그래, 나는 이것들에 마음을 주고 있었구나.
그가 비웃던 것들이 커다란 가르침을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너는 그걸 갖고 싶어 괴롭히고 미워하고 있었다고.
“나와 봐. 얼굴 보고 싶잖아.”
그녀와 한 약속을 지키긴 어렵겠다. 환영을 걸 준비를 하던 때에 매복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르난의 표식을 한 검은 후드 무리가 떼거지로 나타났다. 그것도 총 여덟 명. 눈을 가린 이들이 나타난 그 순간 히아신은 삐딱하게 웃었다. 실수로라도 집이 있는 방향에 눈길을 줘선 안 된다.
7분의 시간이 흘렀다.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그의 귀에 꽂혔다. 불 냄새가 난다. 온 거리가 언 것처럼 고요해졌다.
그의 앞과 뒤에 사람 탑이 쌓였다. 라드의 목줄을 쥐고 있는 남자가 경직된 분위기를 즐기듯 앞으로 걸어 나왔다.
“히아신 님.”
이 남자들은 히아신의 특성을 알고서 대비한 듯했다. 그가 돌아갈 유일한 곳이 태워지고 있는데도 히아신은 웃어야 했다.
“누구야.”
“코르 님이 사망하셨습니다.”
그 목소리는 형제의 부고를 전하는 게 아닌, 히아신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듯했다.
“안타깝네. 장례식이라도 열렸어? 그럼 참석해야지.”
빈틈없이 저를 포위하고 있는 남자들 속에서도 히아신은 여유를 부렸다.
“아버지께서 지금 당장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히아신 님.”
“나는 조금 더 놀다 갈 거야. 너희끼리 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 남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일 층에만 붙어 있던 불이 위로 번지고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지켜보며 약점을 파악한 것이었다.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꺼. 저거.”
“죗값을 치를 시간이기도 하고요. 설마 몰랐다고 하진 않겠죠.”
“불 꺼.”
“힘을 쓰지 않고 떠나 주시겠다고 약속하면 저 불은 당장 꺼질 겁니다.”
사람의 수는 총 여덟. 다수를 상대하려면 필연적으로 환영의 힘을 써야 하는데 그 힘을 쓰기 위한 조건은 차단되어 있다. 마로닌 부인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그의 선택을 재촉하고 있었다.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우리 아는 사이도 아니고. 눈도 가리고 있잖아.”
잠시 생각을 하던 남자가 눈을 가리고 있던 천 한쪽을 슬쩍 당겨 내렸다. 감정을 새까맣게 까먹은 듯한 비정한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제 이름은 제키입니다. 만일 제가 약속을 어겼다면 죽이러 오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약속한 10분은 지났을 것이었다. 히아신은 약속을 어겼다. 인사 없이 불을 지르고 떠나간다면 그녀는 용서해 주지 않을 거였다. 불까지 내고 도망간 희대의 나쁜 놈.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 히아신의 입가를 스쳤다. 확인을 마친 제키는 다시 눈을 가렸다.
그래. 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겪었으니 이제 인생에서 가장 아픈 순간을 겪을 차례였다. 그는 자신이 두려워하던 것의 실체를 알아차렸다. 그것이었다. 자신의 인생이 그 법칙을 무시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름이 예쁘네, 제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은 어떨지 모르기 때문에.
히아신이 시계를 주머니에 넣자 이 층을 넘보던 불이 그녀의 집을 떠나갔다. 이건 거래이자 이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