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그녀의 집은 지난날의 추운 기억을 잊게 해 주는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었다. 히아신은 부인이 그에게 내어 준 침대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를 마음에 들어 하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삼류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았다.
한바탕 그녀와 전투적인 산책을 하고 나서 돌아와 보니 마로닌 부인은 손님용 침대를 펴 두었다. 그 과도한 친절이 민망스럽게도 그는 잠이 오지 않았다.
히아신은 조용히 촛불을 켜고 보기만 해도 배부른 잠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주었다. 나디사에게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가 부럽고, 이곳에서의 하루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만족스러웠다.
작은 바람 소리에도 놀랄 만큼 오늘의 저녁이 그는 소중했었다. 가진 것이 많은 나디사는 이해 못 하겠지만. 마로닌 부인이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양념을 가져다주는 순간조차 그는 동화를 체험하는 느낌이었다.
남을 깎아내리는 비난의 말도 없이, 그저 일상의 한 조각처럼 따스하기만 한 저녁 식사. 미소와 사랑스러운 눈빛이 끊이지 않는 그런 식탁. 한 마디, 한 마디에 애정을 섞는 사람들. 멍하니 그 시간을 회상하던 히아신은 주머니 속에 든 시계를 꺼냈다.
하루가 아니라 영원히. 여기에 살고 싶었다.
도망칠까. 나디사의 비난은 당연하고 정당했다. 그녀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면 바보 소리가 안 나올 수 없었다.
그는 성인이 되고부터 아버지의 계획에 가담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가 갈 곳은 죽어서도 살아서도 파르난뿐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그리고 여자와 그녀의 가족이 새로운 길을 알려주었다.
‘넌 바보야. 히아신.’
다 같이 날을 잡아 이사 가면 좋겠다. 사계절 내내 들판이 파랗고 향긋한 곳으로. 아버지도 찾지 못하는 땅에서 오늘처럼만 살고 싶었다.
소원이 가미된 상상은 그를 부추겼다. 한번 휩싸인 충동은 쫓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일어나 침실 밖으로 나왔다. 나디사가 잠들기 전에 이 말을 하고팠다.
그러나 성급한 발걸음을 이어 가던 히아신은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붙들리고 말았다.
“저번부터 왜 그렇게 히아신을 싫어하는 거야. 나디사와 잘될까 봐 그래?”
마로닌 부부가 차 한잔을 하며 부엌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는 입바람으로 촛불을 끈 히아신은 계단 뒤에 숨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전부터 말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남자야. 나디사와는 어울리지 않아.”
촛농이 고인 촛대를 나무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입이 썼지만 로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집안도 나쁘지 않아 보이고.”
집안. 마땅한 거처 없이 아버지의 명에 따라 철새처럼 이 땅에서 저 땅으로 돌아다니는 저를 떠올렸다.
“교육도 잘 받은 것 같고.”
사람 죽이는 교육도 교육이라면 말이다.
“무엇보다 나디사를 좋아하잖아.”
자신은 마로닌 부인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한다. 저 혼자 이 집안에 속하고 싶었던 것이지, 정작 이쪽에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무시하고 있었다.
“직업도 확실하잖아. 말투도 잘 배운 남자 같고.”
“그건 모르는 일이지.”
잘 배운 남자. 단언컨대 마로닌 부인이 잘 배웠으면 하는 것들의 목록 중 그가 체크할 수 있는 건 얼마 없을 거다. 그렇다.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면 그나마 저를 향해 호의적인 시선을 보낸 마로닌 부인마저 그를 매몰차게 버릴 것이었다. 이 모든 건 시한부였다.
먼 훗날 이런 집안에 어울리는 남자가 찾아와 나디사를 데려갈 것이었다. 그동안 자신은 무얼 하겠나. 늙지도 않는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한 가정을 죽이며 살고 있겠지.
“함부로 이사 가라고 그러는 것도 그렇고. 우리가 왜 여기 와서 살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지.”
“틀린 말은 아니잖아. 나도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긴 하는걸.”
“나는 아직 아니라고 봐. 예전에 우리를 따라다니던 그 이상한 남자들. 분명 고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말이지.”
듣던 중 쓸 만한 소리였다. 고기는 구경도 못 할 만큼 가난한 집이지만 대체로 평범한 축이었다. 원한을 산 게 아닌 이상 누군가가 감시할 이유는 없단 소리였다.
“그건 당신 감이었잖아. 그리고 그땐 티사가 죽어서 제정신도 아니었고. 우리가 너무 예민했던 게 아닐까.”
“글쎄. 그건 모를 일이지.”
“생각은 해 보자고. 아, 세상에…… 시간 좀 봐. 얼른 자자.”
부부의 대화는 찻잔을 치우는 소리에 막힌 듯이 줄어들었다. 필요한 이야기를 건진 히아신 또한 그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침대에 앉아 창문을 지켜보고 있는 건 그를 기다리기 때문이 아니었다. 저번 방문 때 그가 돌을 던져 창문을 두드린 게 생각이 났다.
무료해진 나디사는 비밀 일기를 쓰던 어린 시절처럼 초를 켰다. 창문과 맞놓아진 책상에 가 앉았다. 키가 큰 그녀의 허리보다 한 뼘 낮은 책상 위엔 펜 서너 자루가 있었다.
‘가만히 있어, 나디사.’
‘움직이고 싶어요.’
‘조금만 참아. 응?’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어린 그녀의 자세를 잡아 주던 로단은 의욕이 넘치고 젊었었다. 화가를 부를 수 없어 본인이 나섰다지만 그는 원체 그림을 잘 그렸다. 샤포드로 오기 전엔 화가를 지망했다고 들었다.
히아신의 말이 있기 전에도 그녀는 이사를 생각했었다. 돈도 모였으니 이번 겨울이 오기 전에 조금 더 안락한 곳으로 가는 게…….
모아 둔 돈의 액수를 떠올리던 나디사는 들려오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건 발소리였다. 한 사람의 발소리가 아닌 여럿의 발소리. 나디사는 상체를 내밀어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깊은 밤이 만든 헛소리인지 장작더미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바람을 맞으며 서 있던 그녀는 설산을 내려온 들짐승인가 싶어 다시 한번 아래를 눈여겨봤다.
“뭐를 보고 있어?”
나디사는 낮은 그의 목소리에 놀라지 않았다. 한집에 사는데 그녀를 보러 오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왜 왔어.”
나디사는 울고 투정하게 되는 자신의 모습이 끔찍하기만 했다. 창문에서 손을 뗀 그녀는 달빛이 받지 않는 곳에 서 있는 그를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히아신.”
헤어진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미소를 잃어버린 히아신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봤어.”
그의 생각은 좋은 쪽으로 결론 난 적이 없었다. 이런 비슷한 상황이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디사는 기대감을 내려놓는 연습을 수백 번도 더 했다.
“나한테 시간을 주겠어?”
나디사는 바보라고 그를 비하할 때까지만 해도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상황이 변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던 그녀는 천천히 숨을 죽였다.
“무슨 시간.”
“나를 정리할 시간.”
전과 다른 결심을 했다는 듯이 들렸지만 나디사는 변덕쟁이 같은 그를 신뢰할 수 없었다. 그는 본인이 꿈꾸는 다음을 위해서 오늘은 동료가, 내일은 연인이 될 수도 있는 남자였다.
“나한테 돌아온다고.”
그의 변덕에 속아서 삶을 망칠까 봐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왜, 갑자기.”
“나도, 너랑. 여기서 살면 안 돼?”
그래도 된다. 당연히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너의 무엇을 믿고.
너의 마음은 폭풍우가 지나는 섬 날씨처럼 오늘은 맑고 내일은 흐릴 텐데. 맑은 날에는 웃다가 흐린 날에는 나를 울릴 텐데.
“그러니까 나디사.”
무릎을 굽혀 앉았는데도 히아신이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약속한 날보다 하루만 더 있으면 안 돼?”
“…… 약속한 날보다 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기댄 히아신의 몸짓은 절박했다.
“그동안 부인하고 같이 시장도 보고, 또 로단 씨에게 잘 보이고. 같이 어디로 놀러도 가고.”
나디사는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지 조금 수척해진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시간을 달라던 히아신은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모레쯤에 그와 인사를 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하루만 더. 한 시간만 더. 그렇게 속수무책 히아신에게 갇혀 버리면 어쩌나.
“히아신. 그건 어려워. 돌아가야 되는 거 알고 있잖아.”
“하루만 더. 많은 것도 아니고 딱 하루만 더.”
“…… 그렇지만.”
아아아아
귀가 밝은 히아신이 순간 목에 핏줄을 세웠다. 주인을 찾는 라드의 울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