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문을 응시하던 마로닌 부인이 식탁을 쓸며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문을 내다본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누구지.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내가 나가 볼게.”
외진 곳에 사는 그들은 예고되지 않은 방문을 경계하는 습성이 있었다. 도끼 쪽으로 시선이 준 로단이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보다 발 빠른 그림자가 문으로 뛰어나갔다. 떠나간 그림자는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빠르고 민첩했다.
그 그림자가 만든 바람을 느낀 나디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큰 발소리를 내며 달려간 히아신이 문을 열어젖혔다. 두 팔로 문을 막고 선 그는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세 사람이 그를 불러세울 수 없었던 건 경계 중인 그의 등에서 시퍼런 살기가 돌았기 때문이었다. 몸으로 문을 지키고 서 있는 히아신이 거친 숨을 쉴 때마다 등 근육이 도드라졌다. 이윽고 바람을 막듯이 소리 나게 문을 닫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히아신. 누가 있었어?”
잠시의 침묵 속에서 집주인들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하나둘 깨어난 그들은 이 일을 문제 삼지 않고자 했다.
“가끔, 바람이 세면 노크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마로닌 부인이 두둔하듯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의 일에 무심하던 로단까지 나서서 문 쪽으로 가 보려 했다.
“아.”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거짓말처럼 멀쩡한 얼굴을 한 히아신이 몸을 휙 돌렸다.
“라드들을 훔치려는 도둑이라도 들었을까 봐 예민했었나, 내가. 이제 같이 식사나 할까요?”
말은 번지르르해도 이마의 흐르는 땀과 떨리는 손은 거짓말을 못 했다. 그가 그토록 무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나디사는 숟가락을 떨어트리다시피 놓았다.
“히아신.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라드들 상태를 볼 겸 다녀오는 게 어때. 듣다 보니 나도 걱정이 되네.”
턱을 소매로 문질러 닦은 그는 겨우 진정이 된 듯 고개를 살포시 끄덕였다. 무언가 일이 잘못됐다는 걸 알았지만 마로닌 부부는 함부로 나서지 않고서 두 사람을 막연히 지켜볼 뿐이었다.
“다녀올게요.”
“……그래.”
지금껏 히아신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마로닌 부인만이 간신히 웃어 주었다. 문 앞에 서 있던 히아신은 자기에게 걸어오고 있는 나디사를 집착적인 눈으로 바라봤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로단은 오랜 친구인 시가를 찾았다.
가족끼리의 단란한 저녁 식사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게 못내 속이 쓰린 나디사는 덜커덕거리며 문을 열고 나섰다. 그녀의 마음처럼 서늘한 여름밤의 공기가 그곳에 있었다.
코를 알싸하게 감싸는 설산의 냄새는 언제 맡아도 적응되지 않는다. 그가 만들어 준 수프를 마시며 마로닌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이 아주 머나먼 이야기 같았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에 나디사는 상념을 끝냈다. 그가 따라오는 낌새를 느끼며 앞으로 걸어갔다. 라드를 보고 오자는 말은 반은 핑계고 반은 진심이었다. 이참에 폐가에 두고 온 라드들이 잘 놀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따라오는 히아신의 발소리는 상당히 조용했다. 자기의 행동이 과하다는 걸 알고 하는 반성일까. 아니, 그라면 아마도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그 생각뿐일 것이었다.
다른 게 속상한 것이 아니었다. 히아신과는 그 어떤 평범한 것도 평범하게 보낼 수 없다는 게. 반복적으로 겪은 나머지 학습이 되어 버렸다.
히아신의 침묵 속에는 그만의 고민과 생각이 있을 테지. 나디사는 그게 현실에 나타나 원하는 만큼 꺼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보면, 그걸 읽으면 그가 앞으로 무슨 선택을 할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그녀의 짐작은 편견과 아집, 그리고 바람이 들어가 있어 현실의 결말과는 달라진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정확히 상대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알게 된다면 사랑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나디사는 오늘도 그가 예민하고 위험한 남자이기에 저런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의 불안과 마음을 모두 알아 버리고 여기서 더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나디사는 그에 관한 생각을 멈추고 걸음도 멈추었다.
두 사람은 라드들이 누운 작은 폐가에서 다시 마주쳤다. 수리해 둔 지붕 밑에 서로 목을 겹쳐 누운 라드 두 마리가 있었다. 단순한 동료 사이라기엔 애정 표현이 남달랐다. 목을 들어 턱으로 상대를 쓰다듬어 주는 그 모습에 나디사는 왠지 부끄러워졌다. 남의 정사 장면을 훔쳐보는 것처럼 뺨이 화끈거렸다.
“연인이 된 거야.”
옆으로 온 히아신이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이 낮게 속삭였다. 나디사는 그가 저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게 웃겼다.
“나보다 먼저 됐네. 부럽게.”
“디디가 수컷이었어?”
“디디는 암컷이야. 그래서 디디라고. 너의 로마가 수컷이겠지. 우리 디디를 꼬셨네, 저게. 감히.”
그의 억지 주장에 웃음이 나온 나디사는 그를 잠깐 올려다보았다. 그는 대화를 나누며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있었다.
“나는 우리 로마, 디디한테 못 줘.”
“나도 반대야. 배 아파서 안 되겠어. 나는 맨날 구박만 당하는데 쟤는 저렇게 다정하다니. 그게 말이 돼?”
언제 그를 구박했냐는 억울한 반박이 치솟았지만, 그래, 그가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었다.
나디사는 이쯤에서 그에게 수상한 점들을 물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약속한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무얼 묻기가 무서웠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을지. 들어도 해결하지 못하고 가슴으로 삭히기나 하지 않을까. 게다가 자신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는 불안에 시달리기나 하지, 그녀가 바란 것처럼 행복하지 않았다.
“히아신.”
이 질문은 그녀의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왔다고 봐도 좋았다.
“응?”
“행복해?”
당연히 아니겠지. 나디사는 본인이 한 질문의 쓸데없음을 잘 알았다. 걸핏하면 다치기나 하고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지도 못했다. 어둠을 두려워하고, 무언지도 모를 경계심을 느끼며 그녀의 옆에 붙어 있는 게 최선이었다. 자신 있게 좋은 기억을 주겠다고 한 자신을 비난해도 할 말이 없었다.
질문은 본인이 해 놓고도 손에 땀을 쥐었다. 나디사는 그와 떨어진 곳에 시선을 두었다.
“행복하냐고.”
담담히 되물은 히아신이 밖으로 나와 있는 그녀의 손을 채어 가듯이 잡았다. 감정이 연결된 것처럼 그의 뜨거운 마음이 일순간 그녀에게로 흘러 들어왔다.
그녀는 달빛을 한 몸에 받고 선 그를 정면으로 보게 됐다. 아름답다는 말이 그는 지겨울 수 있겠으나 그것 말고는 그에게 붙여 줄 수식어가 없었다.
“말로 해도 믿을 수 없겠지만, 나디사.”
“…….”
“나의 인생을 통틀어서 지금처럼 행복한 순간은 없었거든.”
히아신의 말은 꾸밈도, 과장도 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차분했다. 인생을 통틀어서 이런 순간밖에 없는 그를 동정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런 순간이라도 너에게 주어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잊자, 정리하자 하던 마음이 맥없이 수장당하긴 억울한지 악을 쓰는가 보다. 나디사는 헛된 말이 나오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울려고 그래, 나디사. 자랑스러워해. 네 덕분에 나는 어떤 값을 치르고도 못 얻을 것들을 얻었어. 사랑하는 여자가 아침에 일어나서 나를 안아 준다는 게 뭔지.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안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객관적으로 너에게는 쓸모없다고 볼 수 있는 것들이 나에게는 주관적으로 대단하다는 걸 기억해.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부모님과 같은 사람하고 식사를 하는 것도 말이야. 아버지 쪽은 나를 미워하고 있지만.”
히아신의 말에 칼이 달린 것도 아닌데 눈이 찌른 것처럼 아팠다. 해서 울 수밖에 없었다.
“넌 바보야. 히아신.”
아니라는 사람을 붙잡고 질척거려 미안하다만. 나디사는 하필 자기가 바라는 따듯한 세상을 포기하고 외딴 길로 가려는 그가 미웠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것처럼 히아신은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알아, 나 바보인 거.”
히아신은 익숙한 자세로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저가 바보임을 인정한 그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나디사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그를 껴안았다. 살아 있는 사람이 내는 따듯한 심장 소리가 듣기에 좋았다. 그거면 됐다. 그거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