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강렬한 햇살 속에서 눈을 뜨자마자 히아신을 보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흔들어 깨워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그는 자신의 손을 감싸 쥐고 잠들어 있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고자 고개를 돌렸다. 남쪽으로 난 작은 창문으로 해가 들이쳤다. 하루를 꼴딱 새지는 않았나 보다.
저는 이불을 덮고 베개까지 베고 있었는데 그는 뭣도 없는 맨바닥 신세였다. 위로 일어난 머리를 누른 나디사는 그에게 잡혀 있는 한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간만에 마음 편히 잠들어 있는 그를 깨우고 싶지 않긴 한데.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잠을 설치던 히아신을 생각하니 오길 잘했지 싶었다. 훗날 돌아갈 길은 걱정되지만 말이다.
재잘거리는 새소리가 주는 평안함이 그녀의 불안을 덮어 주었다. 어쩌면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던 것은 그녀였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평범하디 평범하게 자란 남자이고 우리가 연인이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확실히 로단은 그를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런 로단의 편을 들어 주지 못하는 건 그가 곧 떠날 사람이라서였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도 지나면, 그때부터 떠날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가 없어도 잘 살아 내고 싶었다. 하루걸러 하루는 그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세월이 흘러 어떤 형태로 그를 만나게 될 줄은 모르겠다만. 오늘과 내일은 그런 걸 모르고 살아가면 좋겠다.
히아신이 깨지 않게 조심히 다리를 들었다. 내려가 같이 식사 준비를 도울 참이었다. 그러나 얽힌 손을 풀 수 없었다. 조금 성가신 일이었지만 손가락을 하나씩 빼내며 실수 없이 풀어냈다.
그의 손이 팍 떨어지지 않도록 땅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산짐승처럼 예민한 그가 눈을 뜬 건 손에 든 이불로 어깨를 덮어 주려고 하는 차였다.
“깼어?”
히아신은 정신이 들자마자 비어 있는 손을 움켰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살짝 구겼다. 짧은 순간에 일어나 버린 그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어디 가.”
“아래. 식사 준비하는 거 도우려고.”
“나도 갈래.”
무거운 졸음이 묻어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히아신은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장에 다녀온 날부터 그는 제 옆자리를 사수하는 데에 목숨을 걸었다.
“잠은 잘 잤어?”
무작정 힘으로 떼어 놓을 수도 없으니 그를 뒤에 달고서 문을 열었다. 아래층은 걱정이 무색할 만큼 조용했다. 영문을 모르는 터라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기다리다 지친 마로닌 부부가 외출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다들 나가셨나.”
“안 들려. 집에 없어.”
귀가 비상식적으로 좋은 히아신의 말까지 더해지니 집안에 사람이 없는 게 믿어졌다. 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고서 계단을 내려갔다. 잠이 덜 깬 듯 걸음이 왔다 갔다 하는 그가 넘어질까 걱정이었다.
“앞에 잘 보고.”
“넘어지면 나디사가 받아 주면 되잖아.”
“잠 다 깼구나.”
시시한 농담을 하는 걸 보니 잠을 다 깼다 싶었다. 나디사는 그의 손을 놓고 일 층 부엌으로 향했다. 마로닌 부부가 식탁 위에 각종 채소와 냉장한 고기를 꺼내 놓아 두었다. 손님들이 자고 있으니 더 두고 보았다가 식사를 차릴 생각이었나 보다.
“내가 해야겠다. 너는 여기 앉아 있어.”
“나디사 요리도 할 줄 알아? 지난번에는…….”
나디사가 끓인 스튜 맛을 기억해 낸 그의 표정이 머쓱해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건 자랑할 게 못 되니 이해가 가는 바였다. 그래도 집에서 자주 해 먹는 요리 정도는 저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러지 말고, 나디사. 내가 하는 건 어때?”
“네가?”
“솔직히 내가 더 잘하잖아. 마로닌 씨와 그 상냥한 부인을 쓰러트리고 싶은 건 아니지?”
말로 당해 낼 자가 없는 히아신은 그녀를 식탁 의자에 데려가 앉혔다. 그러고선 꺼내진 재료들을 썰기 시작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잠이 깬 그의 얼굴은 청량하면서도 순수하게 보였다.
나디사는 재료들을 그의 옆으로 옮겨다 주는 역할을 했다. 구경만 하는 게 민망해서 손이라도 보태려는 것이었다. 다행히 히아신은 그것까진 막지 않았다.
지고 싶지 않은 해가 활활 타는 오후였다. 불을 켜지 않은 집 안으로 따스한 볕이 내리쬐어 그를 비춘다.
짤막한 칼을 놀려 모든 재료를 똑같은 크기로 자른 히아신은 요리에 집중하느라 제 모습이 어떤지 모르고 있었다. 이처럼 웃지 않는 그의 얼굴은 서늘하게도, 무섭게도 보인다. 미소와 다정한 말이 없는 히아신은 히아신이 아닌 것 같았다.
“히아신.”
“응?”
충동적인 마음에 동하여 그를 불렀다. 낯선 그를 지우고 싶어서였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순간 나디사는 비로소 가슴 속 떨림이 멎었다.
“예쁘다.”
생각으로만 주무르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단정하게 칼질을 하고 있던 히아신의 손이 멈추었다. 그는 부끄러운 듯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이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그 말을 뱉은 걸 후회하지 않는다. 나디사는 다음 재료를 건네주며 시선을 내렸다.
“너희 부모님. 자상하고 따듯해. 꼭 너처럼, 나디사.”
“좋은 분들이셔.”
“이사 가는 건 어떠냐고 물어봤어.”
“……네가?”
“응. 원한다면 이사 비용도 보탤 수 있고.”
두서없는 그의 말은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서 썰어 놓은 재료를 빠짐없이 솥에 부었다. 화로로 그걸 가져가기 전이었다. 몸을 반쯤 일으킨 나디사는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이유가 뭔데.”
“너무 외졌잖아. 사람 많고, 시장 가깝고. 그런 곳에서 살 데도 됐지. 나디사도 올 때마다 번거로울 거고.”
그는 이유가 그게 다라는 듯이 설득하는 어조로 말했다. 여전하게도 시선은 다른 곳에 두고서 말이다.
나디사는 확 오르다가 사라지는 그의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피하는 그와 찾으려는 그녀. 그렇지만 먼저 탐색을 접는 쪽은 나디사였다.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그날에. 그리사가 다치고 여관이 깨진 그날에. 그는 무언가를 본 게 틀림없을 터다.
“네가 본 무언가가 우리 부모님을 해칠 수도 있어?”
돌아가고 피하는 것에 서투른 그녀는 그의 감정으로 직진했다. 이지러지는 그의 눈동자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교활한 입은 언제나 딴소리지만 말이다.
“그런 거 없어. 그냥 걱정돼서.”
“……또.”
말을 자르듯 히아신의 문 쪽으로 돌아갔다. 그다음에 문이 열렸다. 집으로 돌아온 로단 씨의 팔에는 하얀 빵과 과일이 든 봉투가 들려 있었다.
“어머, 벌써 깼니?”
히아신은 굳어 있던 얼굴을 풀며 화로에 솥을 올렸다.
“제가 요리 좀 해 드리려고요.”
“상냥하기도 하지.”
마중하듯 걸어간 나디사는 로단 씨의 짐을 들어서 식탁에 내려놓았다. 억지로라도 웃고 이야기를 했다. 마음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불안은 저 혼자 견디면 될 일이었다. 그건 누구보다 잘할 수 있었다.
* * *
마로닌 부인까지 나서서 손을 대다 보니 식사는 거의 해가 질 즈음에야 먹을 수 있었다. 간단하게 허기만 채우자 했던 식사는 더 올려 둘 자리가 없을 만큼 식탁을 채우고 나서야 시작이 됐다. 자그마한 찻장에 숨겨 둔 술까지 꺼내 온 마로닌 부인은 오늘 아주 이를 간 모양이었다.
히아신은 부인이 바라는 손님 역할을 잘 해내 주었다. 노련한 말솜씨로 마로닌 부인을 상대하고, 식탁이 조용해질 때마다 하는 우스갯소리는 재치 있었다.
그가 분위기를 띄우는 동안 나디사는 조용히 식사에 전념했다. 그만한 입담은 그녀에게 없기 때문이었다.
“일은 힘들지 않고?”
“네.”
말수가 적던 로단 씨도 기분이 좋은지 적당한 때에 화젯거리를 던져 주었다. 모처럼 배와 정이 부른 식사였다. 저녁이 깊어질 무렵 식기를 내려놓은 마로닌 부인은 음흉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요리를 잘하니, 결혼하면 아내는 편하겠는데요?”
그간 식탁에 오르지 못했던 주제였다. 나디사는 눈을 내리깔고 수프를 떠먹었다. 맛이 깔끔했다. 확실히 히아신은 못 하는 게 없었다.
“피하지 말고. 그래서 두 사람은 언제쯤 얘기할 생각인 거니?”
눈을 빛낸 마로닌 부인은 좀이 쑤신다는 듯이 물었다. 씰룩거리는 그녀의 입꼬리는 다른 기대를 품고 있는 듯했다. 그걸 본 나디사의 입술이 바싹 마르는 때였다. 밤을 깨무는 노크 소리가 곧이어 들려왔다.
똑, 똑. 그 경직된 소리는 식탁의 시선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