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들떠 있던 로단 씨의 아침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눈에 진물이 나도록 그리던 딸이 앞에 있음에도 웃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거짓말같이 아름다운 날씨, 적당하게 부는 바람. 모든 게 완벽한 날에 온 딸은 혼자가 아닌, 웬 훤칠한 불청객을 함께 데리고 왔다.
“조금 더 줄까요?”
“괜찮아요. 지금도 충분한걸요.”
싱긋 눈웃음치는 히아신 아스의 미소에 아내는 뺨을 붉혔다. 그러나 그는 뻔지르르한 겉모습에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빈자리가 많은데도 굳이 나디사의 옆자리를 차지하지를 않나. 마음에 차지 않는 것투성이인 남자였다.
이름부터가 그랬다. 히아신 아스, 라니. 라넌은 아스라는 성을 알고 있었다. 옆 마을에 유명한 전당포가 그 사람의 것이지 않던가. 종족도 출신도 불투명한 남자에게 나디사를 맡길 순 없었다.
“그래서. 일하는 곳이 이 근처라 온 거야?”
“잘 곳도 마땅치 않아서요.”
“잘 왔어. 게다가 하룻밤 더 묵을 수 있다네, 로단.”
아내의 말에 장단을 맞추듯 끄덕인 로단은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남자는 같은 남자가 봐야 한다. 저 겉모습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아내가 가여울 뿐이었다.
“저기.”
입을 꾹 닫고 있던 로단의 한 마디에 이목이 집중됐다.
“장작을 패야겠는데.”
나디사의 옆에 앉아 있는 꼴을 더 두고 보느니 혀를 깨물겠다.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그 남자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그러면 좋겠다만.”
분위기를 좋게 끌어 가려는 아내에게 발을 건 셈이 됐지만. 무얼 하다가 온 놈인지 알 수도 없는데 저 잘난 허우대 하나만 보고 좋아하란 말인가.
“그러지 말고 두 사람은 쉬어. 여기까지 왔는데 장작을 패라는 건 너무하잖아.”
“아니요.”
곤란한 요청일 텐데도 남자의 반응은 느긋했다. 저를 경계하는 로단에게 웃어 줄 여유까지 있었다.
“도와드리고 싶은데요.”
당찬 남자의 말에는 실속이 없었다. 저도 남자라고는 하지만 손에 물 한 번 안 넣어 본 고운 느낌일 뿐이었다. 일어나 도끼를 챙기는 로단의 미소엔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쪽으로.”
* * *
이 마을 남자들은 사냥과 장작 패기에 능하지 않으면 놀림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장작 패는 것 정도는 기본적으로 할 줄 알아야 여자들에게 남자로 인정받았다.
“이 정도면 될까요?”
로단은 대답 없이 아내가 타 준 묽은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설산이 쪼개지길 바라듯이 우렁찬 도끼질 소리가 그를 괴롭혔다.
“아니면 더?”
저 정도면 이번 달은 쓰고도 남을 양이었다. 그의 작전은 대실패였다. 코코아를 가져다주러 중간에 들른 아내는 그것 보라며 그를 타박했다.
‘생긴 것만 예쁜 줄 알았더니 힘도 좋네.’
확신을 가진 아내의 표정이 떠오른 로단은 속이 갑갑했다.
“됐습니다.”
“네.”
집안 여자들 앞에서 자상하고 매너가 넘치던 남자는 로단과 둘이 남자 제법 무뚝뚝해졌다.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알기 때문에 저 남자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도끼질을 그만둔 남자는 꽉 낀 장갑을 이로 물었다. 로단은 나디사의 곁으로 돌아가려는 그를 막아서고 싶었다.
“우리 애랑 연인이라도 되는 겁니까?”
심술 난 그와 눈을 마주친 남자는 물고 있던 장갑을 놓았다. 몹쓸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시선이 불안정해졌다.
“여기서 두 분이서 사는 건가요?”
어느 정도 진정됐나 싶더니만 남자는 뜬금없는 말을 꺼내었다.
“……그렇소만.”
“다른 사람은 온 적이 없고.”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캐묻는 듯한 남자의 질문에 그는 긴장하며 허리를 폈다. 무언가에 쫓기듯이 불안한 남자의 시선이 휑한 주변을 뒤적거렸다.
“이봐.”
“이사를 갈 생각은 없고요?”
“뭐?”
로단은 도가 지나친 남자를 나무라고픈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건 애정이 있는 사이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열악하잖아요. 아이 키우기도 별로고.”
“그게 그쪽이랑 무슨 상관이지?”
본색을 드러낸 남자를 가만둘 수 없어 일어선 찰나에 문이 열렸다. 아내인 마이사가 마주 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 끝났어요?”
로단은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말을 우물거렸다. 그사이 저쪽은 이미 상황이 끝난 것처럼 웃으며 자기가 팬 장작을 보여 줬다.
“이 정도면 충분할지 모르겠네요.”
“어머, 세상에.”
마이사는 장작을 한 번, 남자를 부려 먹은 남편을 한 번 바라봤다. 무어라 변명할 새도 없이 나쁜 놈이 되어 버린 로단은 헛기침을 했다.
“그만하고 들어와요. 나디사는 피곤해서 잠들어 있어. 여기까지 오는 데 쉬지도 않고 왔다면서.”
“잔다고요?”
눈을 씻고 봐도 긴장감이라고는 없던 남자가 빠른 속도로 장갑을 마저 벗어 버렸다.
“어디서 잠들었는데요.”
그 낮은 목소리에 아내도 깜짝 놀라 입술 끝을 올리다 말았다.
“저도 피곤해서요.”
마치 변명하듯 말한 남자는 로단에게 장갑과 도끼를 돌려줬다. 로단은 그 찰나의 변화에 주목했으나 남자의 연기력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안 그래도 자리를 마련해 뒀어요. 한숨 자고 일어나서 식사해요.”
“언제나 친절하시네요.”
남자는 로단에게 목을 까닥여 인사한 뒤 아내와 나란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당했다는 기분을 지우기 힘든 로단은 힘이 빠져 컵을 놓칠 뻔했다.
“마이사.”
숨을 고르고 집에 들어가니 남자는 거실을 떠나고 없었다.
“그 남자는.”
“욕실에. 씻는다고.”
문 닫힌 욕실에 시선을 준 로단은 긴 한숨을 내쉬며 식탁에 앉았다.
“왜 그렇게 심술을 부려.”
“내가 무얼.”
로단 쪽으로 걸어온 아내는 식탁에 따끈한 수프를 올렸다.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아내를 보며 로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 놈이야. 너무 믿지 마.”
“나디사를 좋아하는 게 분명해. 물론 나디사도 그렇고. 얼굴이 달라졌어.”
“안 될 말이야.”
“왜 그렇게 저 남자를 싫어해?”
“종족도 알 수 없고. 성도 이상해. 아스, 라는 성은 말이야…….”
“하, 로단.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은 같은 일을 하고 있잖아. 고리타분한 옛사람처럼 왜 그래.”
“나한테 이사를 가는 게 어떠냐고 그랬다고.”
걱정할까 봐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완강한 그녀의 고집을 꺾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설령 아내가 상처를 받더라도 반대하는 제 마음을 이해해 줬으면 했다.
“나한테도 물었는걸.”
마이사는 그게 어떠냐는 듯이 눈썹을 구겼다.
“뭐라고. 당신한테도?”
“조금 더 사람이 많고 안전한 곳으로 가면 어떠냐고. 틀린 말은 아니잖아.”
서로 그 남자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달랐다. 입가에 묻은 코코아 가루를 닦은 그는 허탈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 마이사의 한숨이 식탁에 내려앉았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살 수 없는 건 맞잖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지.”
자나 깨나 나디사의 결혼을 바라는 아내의 심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나디사가 위험한 사람을 만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나저나 나온 건가?”
“그 남자?”
“응.”
바람에 덜커덩 욕실 문이 흔들렸다. 남자가 어디로 갔는지 찾기 위해 로단의 고개가 바쁘게 돌아갔다.
“로단?”
“어디로 갔지.”
“아, 그러게.”
마이사는 일어나 집안을 둘러보았다.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 위층을 바라봤다. 작은 물방울이 계단 쪽에 서너 방울 떨어져 있었다.
“둘이서 대화하고 있나?”
“아까 잔다고 하지 않았어?”
두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릴 듯싶었다. 티사가 고향을 떠나 라드군에 들어갔을 때도, 처음 나디사를 맡기러 그들을 찾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로단의 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정확히 콕 집어 말할 수는 없다만 그 남자는 불길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맡을 수 없는 위험한 냄새가 그 남자의 주변에 배어있었다.
“나디사.”
위층으로 올라간 로단은 주먹 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거센 노크 소리가 평화로운 아침을 뒤흔들었다.
“나디사!”
마음대로 문을 연 로단은 제 눈을 의심했다. 뒤따라온 아내는 입을 틀어막는 시늉을 하며 감탄사를 흘렸다.
“세상에…….”
아내와 다른 의미로 로단 또한 감탄하고 있었다. 위층 계단과 가까운 부엌에 있었는데 남자가 올라가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창문 아래에 누운 남자는 햇볕을 받으며 낮잠을 즐겼다. 그것도 나디사의 옆에서. 얇은 여름 이불은 그녀에게 양보하고 말이다. 잠든 두 사람은 손가락 하나만이 맞닿아 있었다. 흥분한 로단을 놀리는, 소꿉장난 같은 장면이었다.
“피곤했나 봐. 어서 이리 나와.”
흐뭇한 표정의 아내가 문을 닫는 사이 로단의 눈은 남자에게 꼭 붙어 있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든다. 저 남자는 그의 생각보다 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