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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35화 (135/210)

135화

바구니 안에 손을 넣어 봤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사 온 것을 꺼내 놓고 보니 식탁에는 잘 익은 사과 두 알뿐. 이만한 양으론 잼을 만들 수 없겠다. 이건 히아신의 탓이 컸다. 장터에서 웬 남자의 팔을 비트는 바람에 가지고 있던 사과를 다 떨어트리고 만 것이다.

다른 먹거리가 없으니 저녁은 사과 한 알이 됐다. 이참에 곁들여 먹을 빵도 사자던 말은 꿀꺽 삼키었나 보다.

하지만 나디사는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의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개울가 버들처럼 몸을 떨기에 화롯불 앞에 두었다.

“히아신. 저녁 먹어야지.”

나디사는 물그릇에 넣어 둔 사과를 꺼내었다. 다가가는 발소리를 들을 만한 거리임에도 히아신은 깊은 몽상에 빠져 있었다.

“히아신.”

부리나케 비둘기를 써서 편지를 보냈으나 그리사의 답장은 아직이었다. 범인의 가닥을 잡은 터라 복귀하지 못한다고, 조금이라도 좋으니 시일을 달라고. 그 말이 그리사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만.

“먹어.”

젖먹이 아이처럼 위태위태한 히아신을 두고 갈 순 없었다. 사과를 챙겨 온 나디사는 그의 옆에 앉았다. 눈물 자국이 남겨진 히아신의 열띤 얼굴이 낯설었다. 사람이 죽어도 콧방귀조차 안 나오던 남자였는데 말이다.

“괜찮아?”

“응.”

희게 질린 그의 대답은 힘이 떨어져 있었다. 나디사는 그에게 물기 맺힌 사과 한 알을 건넸다. 그 사과를 힐긋 본 그는 무엇이 생각난 것처럼 피식 웃었다.

“내가 저녁을 망쳤네.”

“우선은 먹을 것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

나디사의 장난스러운 말에도 그는 웃는 듯 마는 듯했다. 얼굴이 더 하얘진 걸 보니 불을 쬐는 게 소용없나 싶다. 나디사는 들고 있는 사과를 힘없이 깨물었다. 아그작, 단단한 과육을 씹는 소리만이 침묵을 긁어 댔다.

“갑자기 왜 그러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일렁이는 화롯불이 탁, 탁, 튀는 불티를 낳았다. 나무 타는 냄새가 수시로 코끝을 간지럽혔다. 히아신은 대답 없이 눈을 스르륵 감았다. 사과를 반이나 먹은 나디사는 그에게 되묻지 않았다.

들판 위에 지어진 집이라 그런지 풀벌레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히아신은 자꾸자꾸 내려와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그 큰 몸을 구기는 것을 보고 나디사는 먹던 사과를 조심히 들었다. 그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한 입만 하라는 뜻이었다.

“왜 먹이려고 그래.”

“너는 사냥까지 해서 나 먹이려고 하면서.”

“그러네. 생각해 보니까.”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하고 히아신은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다. 사과를 내려놓은 나디사는 그의 이마에 손을 넣었다. 간질간질한 머리카락이 감추고 있는 이마는 미지근했다.

“안 아파.”

“그럼 왜 안 먹지.”

“팔도, 다리도 피곤한데 배까지 부르면 잠이 올 것 같아서.”

그리고 히아신은 그녀의 품에 파고들듯이 상체를 흔들었다. 바지런하던 그의 머리칼이 어깨에 눌려 망가지고 있었다. 이마에서 손을 뗀 나디사는 그의 말을 다른 뜻으로 읽어 냈다. 그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집 안에, 저와 둘이 있음에도 잠을 잘 수 없다고 한다.

“혹시 유령이 나타날까 봐 무서워서 그래? 그럼 나도 안 잘게.”

“흐, 비슷해.”

예전처럼 웃기도 하고, 말도 하지만 이건 본래의 히아신이 아니었다. 나디사는 이 나이를 먹고 유령을 무서워해 본 적은 없어 그의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순 없었다.

“자고 싶어.”

조용히 눈 감은 히아신이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런데 그냥 잠들면. 누가 너를 데려갈 것 같아. 그리고 영영 못 볼 것 같아.”

벽돌로 지어진 작은 집이 그의 안식처가 되길 바랐다. 하룻밤 자고 나면 상황이 달라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히아신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남은 날을 이 집에서 보내는 게 의미가 있나.

“히아신. 자?”

일어나 이불이라도 덮어 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히아신은 그녀가 떠날 기미를 보이자 감은 눈을 번쩍 떴다.

“어디 가게.”

“아……. 저기 이불 가져다주려고.”

“그런 건 괜찮으니까 이리 와.”

아주 앉지도 못하고 굽어 서 있던 나디사는 그의 옆자리로 돌아갔다. 솜으로 채워진 인형처럼 그의 품에 안겨 있게 됐다. 이러고 날밤을 깔 작정인 듯싶어 나디사는 그의 커다란 손을 잡아 주었다.

달라도 워낙 달라 평생 가도 그를 모를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자신과 헤어지는 걸, 자신을 잃는 걸 두려워하는 듯한 그의 말에 다정해질 수 있었다.

따듯한 불도 녹이지 못한 그의 손을 가만히 쥐고 있었다. 번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날개 달린 라드군이었다. 저 밤하늘을 달려갈 수 있었다.

충동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웃지 않고 못 배기는, 화롯불 같은 기억이 되어 주고 싶었다. 어차피 돌아가는 날이 오늘이 아니라면 굳이 이곳이어야 하나. 무모하고 무리한 계획이 그녀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그러면 나랑 어디 가지 않을래.”

무방비한 자세로 앉아 있던 히아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어딘가로 떠난다는 말에 대단히 민감한 눈치였다.

“어디.”

“아주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따듯한 곳에. 거기라면 너도 유령이 나타날까 봐 무섭지 않을 거야.”

그녀가 떠나면 두말없이 따를 눈빛이었다. 아니라고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그도 떠나고팠나 보다. 그립고 정다운 목적지를 떠올린 나디사의 입가에는 미소가 깃들었다.

* * *

마로닌 부인은 서너 시간 째 손뜨개를 들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 마로닌을 따라 나온 로단 씨는 시가를 한 대 피우며 아내를 감상 중이었다. 그녀는 틈만 나면 비어 있는 편지통을 확인해 보곤 했다. 좋지 않은 꿈을 꾸면 그 증상은 말도 못 하게 심해졌다.

나디사를 라드군으로 보내 놓고서부터였다. 부쩍 섬약해진 아내를 안쓰럽게 바라본 로단은 새벽이 밝아 오는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이사.”

“응?”

멍하니 뜨개질에 열중하고 있던 마로닌 부인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시가를 눈앞에서 놓고 피워도 그녀는 지적하지 않는다. 사실 시가를 피우지 말라고 하는 것은 어린 나디사를 위함이었다. 그녀가 배울까 싶어서. 그녀가 떠나고 집안이 삭막해진 이후로는 시가 한 대도 못 피우게 하지 않는다. 나디사가 알면 눈 튀어나오게 깜짝 놀라겠지만 말이다.

“오늘 외식이라도 할까?”

“하하. 아니, 괜찮아.”

“극장에서 연극도 보고. 시내에 나가서 당신 예쁜 옷도 좀 사고.”

먹힐 만한 유혹을 해 봤지만 마로닌 부인의 눈가 주름은 깊어지기만 했다.

“오늘을 그럴 기분이 아니네요. 그사이 나디사한테 무슨 연락이 올지도 모르고…….”

“그런가.”

“말 나온 김에 당신은 시내라도 나가서 양파를 좀 사 와요. 다 떨어졌어.”

“알겠어. 그래도 정말 같이 안 갈래?”

못 말리겠는 남편과 눈을 마주치고 마로닌 부인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해가 떠오르기 전부터 이러고 나와 앉아 있는 아내가 반가울 리 없는데도 자상하기만 한 남편의 성격이 그녀는 좋았다. 나디사는 이런 로단을 닮아 담이 크고 다정하다는 게 그녀의 자부심이자 자랑이었다.

저처럼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하지 않았으면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게 문제였다. 무던하기는 또 웬만한 사람 저리 가라 해서. 집에서 걱정하는지도 모르고 너무 믿고 사는 게 아닌가 싶다. 여하간 어떤 일이든 장단점은 뚜렷한 법이었다.

그때 삭풍 같은 바람이 창을 때렸다. 설산 밑에 있기에 집 앞으로 바람이 지나갈 때가 많았지만 여름철엔 이 정도의 바람이 흔치 않았다. 심상치 않은 그 바람의 기운은 창 밑을 지나는 그림자로 변했다. 손님이 온 것이었다.

빠르게 눈빛을 교환한 부부는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동작을 멈추었다. 시가를 비벼 끈 로단이 손을 들어 아내를 진정시켰다.

“내가 나가 볼게.”

손이 닿는 거리에 있는 도끼가 있었다. 로단은 긴장된 얼굴로 문을 열어 손님을 맞았다. 여름에도 퍽 써늘한 바람이 문 안으로 들이쳤다. 이마를 치는 햇볕 때문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폈다. 빛이 시야를 방해했다. 여자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나디사!”

아내의 비명을 들은 로단은 자연스레 두 팔을 벌렸다. 잘못 본 게 아니었군.

집 나간 고집불통 아가씨가 여름날 바람처럼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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