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자리를 지키는 데에 급급했던 선왕은 신전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허락했다. 왕국끼리 동맹을 맺고 평화를 찾은 시대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터였다.
군인으로 길러진 선왕은 전쟁이 없는 정치를 부담스러워했다. 더군다나 염소 한 마리 죽여 본 일이 없던 왕세자는 어리석었으며, 신전이 새로운 왕으로 내세우는 왕자는 물불을 가릴 줄 모르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니. 신전의 만류를 뿌리치고 공주를 택한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음이었다.
공주의 경우엔 왕의 눈 밖에 벗어나 경치 좋은 외곽에서 배우고 자란 게 외려 득이 된 모양이었다. 왕실 특유의 건방짐이 없는 그녀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하기 좋아했다. 지금은 아군이라고 할 만한 것이 록밖에 없다만. 그녀가 왕좌를 차지하고 나면 따르는 사람들이 장마철 냇물처럼 불어날 것이었다.
“그나저나.”
회담에서 선언할 발표문을 읽던 공주의 눈이 들렸다. 나갈 채비를 하던 록의 걸음이 멎었다.
“네. 궁금한 것이 있으십니까.”
신전의 책을 찾는 이유를 물을 줄 알았다. 야무져 보여도 한창 호기심 많을 여자아이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의 편견을 비웃듯이 어린 공주의 시선은 사사롭지 않았다.
“그 사람을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여러 번 얘기해 두었는데. 독대도 허했고.”
공주의 눈이 총기 있게 반짝거렸다. 여기서 나온 그 사람이라는 건 나디사 마로닌을 뜻했다. 록이 제 이름을 걸고 소개했으며, 그 덕에 흥미를 가진 공주가 한번 자리를 마련해 달라 하지 않았던가.
“지금 바깥에서 일어난 일들 때문에 임무 중으로 압니다. 돌아오면 바로…….”
문득 거기까지 말한 록도 이상함을 느꼈다. 지원 요청이 들어와 신관을 보냈다고는 들었지만 그 뒤로 복귀 소식이 없었다. 힘이 들어간 그의 어깨에 낯선 긴장이 감돌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아닙니다. 돌아오면 바로 독대를 요청하겠습니다.”
“그래.”
누런 양피지로 떠나 버린 공주의 눈은 나이에 맞지 않게 서늘했다. 세간에서 어린 공주가 포기하면 간단한 일인데 괜히 피 흘리게 하는 것 아니냐고 떠드는 작자들이 있었다.
성에 사는 그녀라고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포기했을 때에 오는 수치를 아는 것처럼 그녀는 왕관이든 양피지든 놓지 않는다. 변방의 공주에서 왕좌로. 그 기회를 남의 말 때문에 눈치 보여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록은 그녀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끝냈다. 창문 틈으로 스민 노을빛이 높은 천장까지 얽혀 들었다. 록의 눈은 피처럼 붉은 해 위로 날아오는 작은 그림자를 그렸다. 얼른 그 시간이 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히아신의 콧노래는 늙은 닭이 홰치는 소리에 가려졌다. 산 너머 마을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훤칠한 벌판에 작은 장터를 열었다. 상시 열리는 장은 아니고 운 좋게 시기가 겹쳤다고 볼 수 있었다.
장터에 도착하자마자 싼값에 치마를 구매한 나디사는 그와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그곳에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있는지 목을 쭉 빼고 보느라 정신이 빠졌다.
오늘 저녁에는 사과 잼을 졸여 볼까. 사과만 한 바구니를 사 버린 히아신은 그녀가 저 없이 무얼 구경하든 내버려 두었다.
알고 있었다. 저 작은 머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는걸. 하지만 복귀하지 못해 안달하면서도 그녀는 착해 빠졌다는 약점이 있었다.
구두로 한 약속일 뿐이니 말이다. 어겨도, 심지어는 그를 버리고 떠나거나 고발해도 이쪽은 두 손 두 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길이 멀어 복귀가 어려운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저런 촌스러운 치마를 사서 허리에 두를 필요가 없단 말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그 사실이 그를 미치게 했다.
장을 다 보지도 않았는데 히아신은 건들거리는 바람처럼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사과 한 알을 아작 씹으면서 어떻게 그녀를 놀래 줄까 고민 중이었다.
“이 세월이 다 가도록 나는 가 본 길만 돌고 도는 중이네.”
턱수염 기른 노인이 북을 퉁기며 노래 부르고 있었다. 어제 지은 듯한 가사를 듣고 비웃은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감상 중인 그녀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계획을 바꿨다. 약아빠진 그는 그녀에게 우기고 떼를 써 보려 한다. 약속한 기한이 한 달 정도가 아니었냐고 얘기를 해 보아야겠다. 며칠은 심했다. 그녀라면 아마도…….
- 히아신.
그녀의 어깨를 잡기 위해 올린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내장 썩은 생선같이 비위 상하는 목소리였다. 노인의 노랫말에 몰려든 사람들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는 그의 눈이 가는 곳에 한 남자가 있었다.
검은 후드로 머리 부분을 감싼 남자는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아버지가 보낸 사람인가. 그렇다면 들킨 건가. 파르난의 도리와 의리를 저버린 자신을 벌하는 건 두렵지 않았다. 그거야 언제고 눈과 귀가 밝은 아버지에게 들킬 일이었다.
하지만 나디사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라면 그를 벌하기 위해 나디사를 데려가 죽일 수 있을 터였다. 더 나아가 그의 운명의 상대가 나디사인 걸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를 손아귀에 쥐고 싶어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잊고 있었던, 아니, 잊고 싶었던 현실이 그의 숨을 끊으려 들었다. 팽팽하게 당겨오는 긴장을 억누르지 못한 그는 헐떡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봐요.”
앞자리로 가고 싶은 남자 하나가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의식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히아신은 그 손을 잡아 반대로 비틀었다.
“아아악!”
“어머!”
바구니에 든 사과가 땅으로 떨어졌다. 땅을 구른 사과 한 알이 노인의 발치까지 갔다. 노래가 중단되면서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장터를 어렴풋이 뒤덮었다.
“히아신. 왜 그래.”
끓인 술처럼 뜨끈한 손이 그의 몸을 돌렸다. 다정한 보라색의 눈동자를 만나자 심장이 달리기를 멈추었다. 그 즉시 뼈가 틀어진 남자의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모두가 장터의 물을 흐린 그를 비난하며 수군거렸다. 심장이 싸늘하게 울렸다.
“히아…….”
“여기서 벗어나야 돼.”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
히아신은 그녀의 손목을 쥐고 뛰었다. 핀잔주듯 구시렁거리는 사람들을 밀쳐 길을 만들어 냈다.
“저기, 이봐!”
“비켜.”
안 돼. 사지 묶인 개처럼 끌려가는 저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멍청한 저 때문에 그녀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느니 눈이 멀고 말지.
고아 낸 풀을 한 사발 마신 것도 아닌데 입 안이 말랐다. 촉각이 곤두선 그는 뒤쪽을 경계하며 장터 밖으로 빠져나왔다. 쫓아오는 사람은 없건 말건 그의 심장과 다리는 멈출 줄 모른다. 떠나온 장터는 반딧불이라도 되는 듯이 한밤중인 들판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착각이었으면 좋으련만. 그 죽어가는 짐승처럼 캥캥거리는 목소리, 그리고 그 남자까지.
“히아신!”
모든 말을 외면하며 달리던 그의 몸이 뒤로 당겨졌다. 엉덩방아를 찧을 듯이 넘어가던 다리가 땅에 바로 섰다.
“왜 이러는 거야.”
소리 지르며 그를 당기고 있는 나디사가 보였다.
“왜 이러냐고.”
감정을 깎고 도려낸 그녀는 차분해지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볕에 타는 양 눈이 따가웠다.
“무서워.”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해 내지 못할 만큼 그는 한계에 부닥쳤다.
“……울어?”
숱한 별과 잇닿은 들판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녀를 잃는다는 가정만으로도 소리 없이 울 수 있었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나디사의 손은 방황을 끝내고 한 방향으로 흘렀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를 안아 준 것이었다.
저보다 키가 작은 그녀의 품은 건기의 파르난처럼 기온이 높았다. 익숙한 그녀의 품을 놓치기 싫었다.
나는 생각보다 더 그녀를 떠나는 게, 잃는 게 두려웠구나. 그게 눈을 감는 그날까지 나를 잠 못 들게 하겠구나.
심장이 없는 채로 사는 게 낫지. 멀쩡히 뛰던 것이 분리되어 떨어지는 그 느낌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그녀를 안은 팔에 힘줄이 섰다. 히아신은 아무도 오지 않는 들판에서 흐느껴 울었다.
마음 착한 그녀의 옆에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했었다. 그러나 그 밤, 그 순간으로 히아신은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똑똑히 배웠다.
이별이라는 단어가 남의 것이 아니었다. 그게 그가 눈물을 멈출 수 없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