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막을 내린 동화를 읊는 듯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기름진 아침을 야금야금 해치우던 그녀는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혹여나 그의 말을 중간에 끊을까 싶어서였다. 산책하다가 만난 토끼가 인상 깊었는지 그의 표정은 천진한 매력이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얼굴을 계속 보고 싶을 만큼.
“네가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사냥도 힘들지 않고, 요리도 좋고. 돌아서서 잠든 너를 보면 힘이 나고. 네가 일어나면 내가 한 요리를 보여 주고.”
수줍은 듯하면서도 맹목적인 강요가 있었다. 그녀가 하려는 말을 차단하고픈 느낌도 들었다. 히아신은 이쯤에서 말을 멈추려는 듯이 꽂아 두었던 포크를 빼냈다.
“그러니까 나랑 이러고 며칠만 살자.”
급진적인 결말로 이야기는 끝이 났다. 웬만해선 그가 이처럼 강하게 요구한 것은 들어주고만 싶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기에 고개가 저어졌다.
“그리사는 다쳤고. 살인 사건까지 일어난 마당에 내가 오늘 복귀하지 않으면 무슨 생각들을 하겠어.”
“나야 모르지.”
“나도 다쳤거나 죽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수색대가 꾸려지겠지. 일이 그렇게 커져 버리면 너나 나나 힘들어져. 갑자기 멀쩡한 모습으로 짜잔 하고 나타날 수 없다고.”
“그것도 나야 모르지.”
“모르고 싶은 건 아니니?”
회피에 능숙한 그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그와 같이 보내는 시간이 좋아서 잊고 있다가도 불쑥불쑥 생각이 난다. 그와의 차이가 느껴지는 이런 순간에. 그렇다면 그녀는 차갑고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냉정한 그녀에게 거스르듯 진심을 숨긴다. 그의 마음이 저 장난스러운 미소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녀로선 찾아낼 방법이 없었다.
“나한테 특별한, 평생 기억될 만한 나날은 그런 것들인 것 같아. 주기로 했으니 나디사 너는 따라 줘야지. 설마 그깟 땅콩사탕으로 퉁 치려고 했어?”
“……나는 너처럼 한가할 수 없어. 잊었겠지만 나는 여기에 들어오려고 모든 걸 걸었어. 너한테 내 시신을 담보 맡길 정도로 진심이었단 말이야. 그러니 적어도 밉보여 쫓겨나고 싶지는 않아.”
그에게, 아니 남에게 처음 털어놓는 속내였다. 세상일에 시큰둥하던 그녀는 라드군이 되고 나서부터 삶이 귀해졌다. 동료들을 만나고, 실력을 인정받고,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보았다. 친모라는 그늘에 가려져 있던 것들이 그녀의 삶을 밝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첫 남자인 그는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가 만들어 낸 무심한 말들이 심장에 얹혀 더부룩했다.
자신의 삶은 그에게 아무런 동기도, 아무런 흥미도 되지 못하는 거구나 싶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닌, 그가 신이나 운명 따위로 변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 이건 어때, 나디사.”
“……무언데.”
“내가 그리사를 그렇게 만든 범인을 찾아 줄게.”
“그게 무슨 소리야.”
“복귀해서도 이유가 생기잖아. 그 범인을 찾느라고 나돌아다녔다고 하면. 범인의 이름, 살인의 이유, 그리고 결말까지. 다 알려 줄게.”
나디사는 진정이 되지 않아 포크를 내려놓았다.
“저번에 나한테 한 말은 거짓이구나. 아는 건 그게 다라더니.”
“그렇게 나한테 속고도 또 속은 나디사의 잘못이 조금 있지.”
“그래서…….”
“너한테 욕먹고 미움받더라도 앞으로의 날들을 지키고 싶은 걸 어떡해. 이렇게 살짝 맛만 봐도 행복한데.”
히아신은 냉철한 사람이었다. 아침 햇살이 일렁이는 그의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 비가 갠 날을 맞이하는 그녀의 얼굴은 몹시 어두웠다.
“이건 특급 비밀인데. 내가 말해 준 거를 들고 가면 나디사는 아마 엄청 대접받을걸. 복귀는 걱정하지 마. 단 며칠이라도.”
“그리사도 걱정할 거야.”
“여기서 왜 그 애송이 이름이 나오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편지를 써. 너를 다치게 한 범인을 쫓고 있다. 기다려 달라. 이렇게 멋지게.”
노란 햇볕이 성큼 들어와 집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요구를 들어주다간 한도 끝도 없겠다만. 나디사는 시간을 더 달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소식을 전할 비둘기는 있어?”
“마을에 가면. 내가 사 올게.”
“생각은 해 볼게.”
“그럼 정한 거지?”
“생각을 해 본다고 했잖아. 일단 저녁까지는…….”
눈을 피한 히아신은 다 식은 고기를 자르고 나눠 주느라 바빴다. 주도권을 뺏긴 나디사는 끊긴 말을 이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보다 눈치가 좋았다.
“그거 알아? 저기 들판 너머에 마을 하나가 더 있다.”
“언제 그걸 보고 온 거야?”
“난 소리에 예민하거든. 이거 먹고, 나하고 소화 시킬 겸 산책하고, 또 거기에 저녁 만들 거리 사러 장을 봐야지. 두 끼를 사냥해서 먹이면 너도 질릴 거잖아.”
혼자 마음에 차는 일정을 짠 히아신은 하얗게 웃었다.
“말 나온 김에 약속하나 해 줘.”
약속이라는 단어에 자세를 고쳐 앉게 된다. 그러자 한 것도 아닌데 그는 합의를 본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것 또한 회피하기 위한 그의 연기가 아닐까. 나디사는 무어라 답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감정을 떼고 보니 그는 불안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외줄 타듯 아슬아슬한 일상을 가져갈까 봐.
“무슨 약속인데.”
“일단 첫 번째는 어디를 갔다가 들어오면 나를 꼭 안아 주기. 잘 다녀왔다는 것처럼.”
이 작은 집을 보금자리 삼을 생각인지 그는 요구 사항이 많았다. 그녀는 필기하듯 머릿속에 그의 말들을 적어 넣었다. 너무도 소박하면서, 감히 원해도 되냐는 그의 말들에 노력하지 않아도 그렇게 됐다.
“약속해 주는 거다.”
그녀가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 히아신은 뒤늦은 아침을 먹었다. 그녀가 아는 것 중에 가장 조용하면서도 격렬한 아침이었다.
* * *
록은 말을 배울 적부터 끌려와 신관으로 자라 왔다. 부모가 누군지 모르고 자라는 건 신관의 원칙이니 그러려니 한다만 그는 뒤늦게 두각을 보여 신전에 발탁된 사례였다. 부모의 얼굴과 냄새, 이름을 기억하는 그는 말 그대로 생이별을 했다. 하지만 신전에서 주는 돈을 거부하지 못할, 가난하고 형제 많은 집안이었다. 그렇게 속세에 무지하지 않은 그는 신관의 교리와 맞지 않는 면이 많았다.
티사 레나이를 알게 될 즈음엔 신관을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날로 뜨거워져 가는 마음을 밝히지 않았었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조력자이자 치료자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자신을 흠모하는 여인들 속에 티사가 있었으면, 하고 바란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좋은 친구니까요.’
평상시처럼 오가던 대화가 그의 은밀한 마음에 닿았다. 아주 늦은 밤이었고, 어쩌다가 그리로 이야기가 흘렀는지 모르지만.
그 시기 티사는 몸이 좋지 않았다. 사람들의 찬양이 그녀에게 독이 된 셈이었다. 무리하며 날다가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신전에 오곤 했었다. 그 힘이 그녀의 수명을 갉아먹는지도 모르는 머저리들 같으니라고.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온 그녀를 한 기도실에서 몰래 치료해 주던 날. 좁고 열악한 기도실에서 누가 들을까 무서워 속삭이듯 말하던 날.
‘우리가 좋은 친구인가요?’
그녀의 머리칼에서 나는 비누 향을 맡았다. 옷붙이가 가려 주지 못한 팔목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없어지는 게 아닐까. 아니면 멀미 같은 이 감정에 눌려 기절해 버리는 게 아닐까. 신관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말이 무심결에 나왔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만요.’
눈빛이 섞이던 순간, 그녀의 위로 올라타던 그 자세. 꿈에서나 가능할 것 같던 그녀와의 하룻밤은 이후 이별의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만일, 그게 이별의 계기가 아니라 자그마한 생명의 탄생이었다면.
“록.”
“네?”
자리가 자리였던 만큼 어린 공주의 긴장 어린 표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녀라는 말이 무례인 줄 알고 있으나 그만큼 잘 맞는 단어를 찾기도 힘들었다. 그는 불경스럽게도 공주의 얼굴을 보며 나디사의 어린 시절을 상상했다. 저렇게 순한 눈을 하고, 저만치 볼살이 있었을까. 키도 작고 엉뚱한 소리도 쉬지 않고 했겠지.
그가 외면하고 있던 과거가 말해 주고 있었다. 이번 회담이 끝나면 그는 진실을, 공주는 왕관을 얻게 될 터였다. 아니, 하늘과 땅이 바뀌는 한이 있어도 그리 만들어야 했다.
“그 책을 읽고 싶다는 게 전부인가?”
어린 소녀의 건조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계산속이 빠른 공주를 저를 지지하는 대가로 무얼 원하냐고 물었다. 그 말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수비교에는 첫 번째 신관이 되어야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이 존재했다. 신전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을 빠짐없이 기록해 두는 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