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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32화 (132/210)

132화

감각은 멀어져 가고 의식은 제 것이 아닌 듯 흐릿했다. 인식하는 건 오로지 고조에 달한 숨소리뿐. 선잠에서 깨어난 나디사는 손가락을 꿈지럭 움직였다. 아뿔싸. 몸이 물에 불어난 양 꼼짝을 못 하겠다.

“히아신?”

어둠이 익숙해진 그녀의 시야에 부드러운 맨살이 들어왔다. 몸에 얹어져 있는 손의 정체를 밝혀내려던 그녀는 불현듯 이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이 남자가 무엇인지 생각해 냈다. 지난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서 그가 벌인 행동들도.

‘그만…….’

그는 말을 반대로 알아듣는 사람 같았다. 만지지 말라는 곳에 손이 가고, 건들지 말라는 곳에 입을 맞췄다. 넌더리 나던 그 밤의 일들이 머릿속에 책장처럼 정렬됐다. 그녀는 일어나 고약한 그의 팔부터 치웠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창밖을 볼 수 있었다. 여름과 싸우는 듯한 빗물 덕에 습도는 높고 온도는 낮았다. 그가 끌어안고 잔 이유를 조금은 이해했다. 홀딱 벗고 있어서 그런지 몸이 떨려 왔다.

“하아…….”

다리 하나를 뻗을 때마다 근육이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히아신은 상태가 좋아 보였다. 중간이랄 게 없는 저 남자만 살판났지 싶다.

그렇다고 자는 사람을 깨울 수 없는 거 아닌가. 뭉친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화로 쪽으로 갔다. 불시울이 꺼져 가는 것을 본 나디사는 혀를 찼다. 장작을 주우려고 하는데 다리 안쪽이 뻐근하게 당겨 왔다.

“아.”

며칠은 휴식이 필요한 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주저앉은 그녀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을 찰나 침대서 이불 밀려나는 소리가 들렸다.

알면서도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마른 잎이 부스러지는 듯한 이불 소리는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나디사…….”

눅진한 손길이 그녀의 머리카락 한 줌을 쥐었다.

“왜 거깄어.”

장마처럼 끈적끈적한 그 목소리를 거부할 재간이 없었다. 갸운 듯이 돌아보자 침대에 엎드려 누워 있는 히아신이 보였다. 내놓고 보여 주는 그 몸이 부담스러워 다시 앞을 보려는 차였다. 만족을 모르는 히아신은 그녀의 머리끝에 무수한 입맞춤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머리칼에 눌릴 때마다 목 근처가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나디사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놓으라는 의미였지만 그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척 조금씩 앞으로 왔다. 청각을 건드리는 숨소리에 나디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앞만 보고 있는 그녀의 뺨을 손으로 슬쩍 건드렸다.

“내가 너무 늦게 일어나서 심통이 났구나. 이거 미안한걸.”

“혹시 미쳤니.”

“나?”

“응, 너.”

히아신은 난데없는 그녀의 질문에 눈치 보듯 눈을 굴렸다.

“음……. 살짝?”

나디사는 부정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정말로 말문이 막힌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했다. 어젯밤, 그리고 잠들기 전까지의 상황을 똑똑히 기억하는 나디사의 눈에는 그 모든 게 연기로 보일 뿐이었다.

“나디사아. 배는 안 고파?”

“괜찮아.”

단순한 그는 턱을 괴고 누워 밝게 웃어 댔다.

“나디사가 추워서 깨어났구나. 그럼 내가 따듯하게 만들어 줄게.”

여러 의미를 내포한 말에 나디사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히아신은 차가운 눈빛의 의미를 아는 것처럼 히죽 웃었다.

“아니, 그게. 내가 불도 켜 주고. 아침도 구해 오고. 나디사는 한숨 더 자. 응? 여기서 예쁘게.”

날이 밝는 대로 이 집을 떠날 예정이었던 나디사가 무얼 해 보기도 전에 일은 일어났다. 잠을 자기는 글렀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녀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이 쑥 들어왔다. 몸이 위로 들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히아신!”

발끝이 땅에서 멀어질수록 불안한 마음은 커갔다. 침을 꼴깍 삼킨 그녀는 순식간에 침대 위로 옮겨져 있었다.

“놀랐어?”

뒤에서 끌어안은 그가 턱을 어깨에 걸쳤다. 굳어 있던 표정을 푼 그녀는 경고의 뜻을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너무 예쁘다, 우리 나디사.”

그는 새 부리처럼 튀어나온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달콤한 말에 속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 어제였나 오늘 아침이었나. 나디사는 저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눕히는 손길에 한 번. 그리고 이불을 덮어 주는 그의 친절함에 두 번. 잘 만들어진 그의 연기에 속을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진짜 눈이 멀 것 같아.”

“그만해.”

어젯밤의 그 포악한 느낌을 지우려는 듯이 그의 칭찬이 과해졌다. 나디사는 제 눈을 감겨 주려는 그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알몸으로 앉아 그의 눈빛을 받는 것보단 이게 나았다.

“잘 자.”

할 일을 끝낸 히아신의 손이 떨어졌다. 통 오지 않던 잠이 기적처럼 쏟아졌다.

약해진 불시울에 연달아 장작을 넣는 소리가 났다. 그의 정성에 보답하듯이 손과 발이 따듯해졌다.

“조금 더 자.”

누가 속을 줄 알고. 밤이 오면 껍질 하나 남기지 않고 잡아먹을 거면서.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걸 만회하려는 듯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토닥 어루만졌다.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마로닌 부인이 해 주던 것이었다. 그는 누구에게 이런 걸 배운 걸까. 그도 이런 토닥임을 받은 적이 있을까. 질문으로 끓어 넘치던 나디사의 머릿속에 소등 시간이 찾아왔다. 눈꺼풀이 무거워진 그녀는 잦아든 빗소리와 함께 잠들고 말았다.

* * *

비를 물리친 햇살이 창으로 들어와 나디사의 잠을 깨웠다. 날이 밝으면 해야 할 일들이 생각난 그녀는 몸을 뒤틀며 일어났다. 구운 고기의 구수한 냄새가 연기의 형태로 집 안을 덮고 있었다.

“나디사. 좋은 아침.”

머리가 젖어 있는 히아신의 인사는 참지 못할 만큼 다정했다. 그녀는 잠들기 전과 같은 알몸이 아니었다. 부지런한 히아신이 잠옷을 입혀 놓은 모양이었다.

“앉아.”

눈가를 비빈 나디사는 조촐한 아침 식사가 차려진 식탁으로 갔다. 팔을 걷고 있는 히아신이 신사 흉내라도 내듯이 의자까지 빼 주었다. 엉망인 머리를 손질하며 천천히 의자에 앉은 나디사는 녹색 접시에 올려진 고기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뭐야.”

몸을 회복하는 데엔 잠이 약이었다. 수건으로 손을 닦은 히아신은 정체불명의 고기를 잘라 그녀의 앞접시에 덜어 주었다.

“몸에 좋아. 얼른 먹어. 아, 참고로 밖에 있는 두 명의 골칫덩이한테도 내가 식사 챙겨 주고 왔어.”

“사냥 갔다 왔어?”

“근처에 먹을 게 많더라. 직접 잡은 걸로 요리해 주고 싶어서. 얼른 먹어 봐. 응?”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나디사는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이게 뭔데.”

“토끼.”

포크로 살점을 찍은 히아신이 대답했다. 창문에 널어 놓은 회색 토끼 가죽을 가리키며 말이다. 그는 나이프를 들며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가장 통통한 놈으로 잡아 왔어. 아마 어디 토끼 굴의 대장이지 않을까? 나 잘했지?”

토끼 굴을 책임질 정도면 새끼도 있고 아내도 있을 텐데. 그가 괜한 설명을 붙이는 바람에 동정심만 느는 꼴이 됐다. 하지만 요리로 변한 토끼를 거부할 정도로 비위가 약하진 않았다. 무심한 얼굴을 한 나디사는 토끼 고기를 조금 잘라서 먹었다. 어제 말려 둔 웃옷이 다 젖을 정도로 숲을 뛰어다닌 그의 노력을 모른 체하기도 어려웠다.

“잘 익었어?”

“응. 맛있어.”

히아신은 그녀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식사에 들어갔다. 평범한 아침 식사처럼 식기 부딪치는 소리만이 식탁을 채웠다. 그녀는 식사 중인 그가 체하지 않게 감정을 죽인 어조로 말했다.

“먹고 가자.”

“어디를.”

“복귀해야지.”

“아.”

그러한 주제에 관심이 없는 히아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올 말을 기다리던 나디사의 시선은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는 떠날 사람이라서 복귀에 관심이 없을 수도, 어쩌면 같이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나디사의 예상을 비껴가지 않듯이 그는 포크를 식탁에 콕 찍었다.

“있잖아, 나디사.”

“응.”

오늘은 무슨 말로 놀라게 하려나. 긴장하고 있는 그녀와 눈을 맞춘 히아신의 무표정했다. 새벽이슬을 맞고 돌아다닌 그의 전신이 아름답게 젖어 있었다.

“그게 말이야.”

히아신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시선을 직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식탁을 찍은 포크는 놓지 않은 채였다.

“이상하단 말이지. 아침에 일어나 숲을 산책하다가 토끼를 봤어. 토실하고 예쁘길래 너의 아침으로 완벽하다 싶었지. 그리고 그걸 잡아서 집에 돌아왔는데 너무 행복한 거야. 네가 있는 게.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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