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힘들여 옷을 만들어 두었는데 모셔 두고만 있는 게 심술 나는지 입술이 부어 있었다. 인내심이 그저 그런 히아신은 잠옷을 손끝에 걸고 휘날리는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정작 그러는 저 심술 사나운 남자의 몰골은 어떻던가. 웃옷은 장식이고 예의상 바지 하나 입고 있으면서. 생각할수록 괘씸한 나디사는 그의 손에서 놀고 있는 잠옷을 빼앗아 갔다.
“그러는 너는. 왜 네 잠옷은 안 만들고.”
“남자는 필요 없지. 이대로 자도 돼.”
새삼 음흉한 눈길로 웃고 있는 히아신이 웃긴단 생각이 들었다. 벼락이 치고 돌풍이 불어도 히아신은 미치광이처럼 밝고 긍정적이었다. 이걸 긍정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불안을 잠재우듯이 히아신은 앉아 있던 의자를 앞뒤로 흔들었다. 의자로 타는 그 리듬 소리에 맞춰 아래 바닥이 잇따라 버그덕거렸다. 터덕, 터덕 장작 타는 소리 사이로 들어오는 그 소음이 거슬릴 무렵 무작위의 콧노래가 시작됐다.
왜 잠시도 몸을 가만두지 못하는 걸까. 멍하니 잠옷을 쥔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그가 발을 뻗어 움직임을 멈췄다.
“왜 그럴까, 나의 나디사?”
“뭐가.”
“부끄러운 시선으로 나를 보잖아. 나 웃옷도 거의 벗었는데.”
셔츠가 다 마르지 않은 탓에 체온 유지 삼아 걸치기만 한 모양새였다. 앞 단추는 죄다 풀었다. 저 불건전한 차림이 문제여서 문전박대당한 건가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엄밀히 말하면 벗은 건 아니지. 그나저나…….”
나디사는 일어나 걷지 않고 눈으로만 집 안을 두루 돌아다녔다. 천장의 높이를 재 보던 그녀의 시선은 슬금슬금 내려와 하나뿐인 침대에 미쳤다. 밤이라는 시간대를 상기한 그녀는 차분히 목을 가다듬었다.
“어디서 자? 너랑 나랑.”
“무슨 소리야, 나디사. 저기 내가 만들어 둔 침대가 보이지 않는 거야?”
“하나잖아.”
“원래 침대는 하나야. 집 하나에 침대 하나. 사람은 둘이면 더 좋고.”
“나랑 같이 자겠다는 말을 하는 거니?”
사람의 말이 사라진 자리는 비를 맞는 라드의 울음소리가 발 빠르게 채웠다. 벽돌색 지붕 밑에 누운 라드의 존재가 흐릿해지는 순간이었다. 불그스름한 그의 뺨 언저리만 지겹도록 보고 있었다.
“나디사.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그 목소리에 장난기가 어려 있지만 나디사는 거부할 수 없었다.
“뭔데.”
“우리가 말이야…….”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 효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 뒤에 이어질 말을 멋대로 상상한 나디사는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분하고 미웠다. 분풀이하듯 움켜쥐고 있는 잠옷에 주름이 졌다.
“이것저것 해 봤잖아. 예를 들어 나는…….”
“뒤돌아.”
“응?”
“옷 갈아입게. 뒤돌라고.”
그의 입을 사전에 단속한 나디사는 발끈 일어섰다. 물기 머금은 옷을 벗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기에 눈짓으로 그를 채근했다. 히아신은 한숨을 내쉬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돌려. 그것만으론 부족해.”
“안 훔쳐볼게. 신께 맹세해.”
“맹세하지 말고 제대로 돌아.”
“조금만 훔쳐볼게. 이번엔 너한테 맹세하고.”
“히아신.”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는 그녀의 채근이 계속되자 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와의 입씨름에 자신이 없는 나디사는 한숨 한 번에 단추 하나를 풀었다.
그를 감시하는 눈빛이 물샐틈없어졌다. 기가 막히게도 그는 단추 푸는 소리에 맞춰 식탁을 두드렸다. 가만히 있기엔 심심한 양 허밍으로 엉망진창인 노래까지 곁들였다.
어쩌다 보니 그 음에 맞춰 단추를 풀던 나디사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 까마귀 같은 노래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취향이 뚜렷한 그는 오로지 한 곡만 팠다. 물어봐 준 게 기뻤는지 그의 입꼬리가 하늘로 솟았다. 그는 눈을 가리고 있는 자세로 고개를 돌렸다. 두말할 것 없이 그녀가 있는 방향이었다.
“내가 만들었어. 마음에 들어? 제목은 아직 없는데 나디사가 지어 줄래?”
“고개 돌리지 마.”
“단추는? 다 풀었어?”
“…… 물어보지도 말고.”
“상상만 할게.”
젖어서 살갗에 달라붙은 셔츠를 벗고 있던 그녀는 눈을 사납게 떴다. 상상이 지나친 그의 입꼬리는 유순하게 올라가 있었다. 한쪽으로 꼬인 다리는 보기 싫게 까닥거렸다. 바지 벨트는 하나 마나 한 상태이고 가슴골과 근육은 너무 미끈했다.
긴장이 고조될수록 삭삭거리는 옷감 소리가 시끄러웠다. 꿋꿋이 셔츠를 벗고 매일 하던 순서대로 속옷 버클을 끄르던 차였다. 시선을 끌 의도인 것처럼 히아신의 숨소리가 적어졌다. 고정된 속옷이 풀리는 소리에 그가 손을 내렸다.
“히아신! 손.”
“눈 안 떴잖아. 그리고 난 이미 다 봤는걸…….”
히아신이 딴마음을 먹기 전에 바지부터 벗었다. 아래 속옷 끈을 끄르는 손동작을 빨리했다. 자유의 몸이 된 속옷이 다리를 타고 내려갈 때가 되자 그의 행동은 더욱 수상해졌다. 불필요하게 다리를 꼬았다 풀지를 않나. 찻물을 마시는 척하며 어깨를 틀지 않나.
“움직이지 마.”
벗은 속옷을 밟고 올라탄 나디사는 알몸으로 그에게 윽박질렀다.
“다리도 그렇게 하지 말고.”
이상한 일이었다. 길고 짙은 히아신의 속눈썹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데 말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의 앞에 나신으로 끌려가 전시되는 기분이었다. 말수를 줄인 히아신을 의식하듯 그녀의 동작이 굼떠졌다.
“나디사.”
“왜.”
“다 입었나 해서.”
“아직.”
아래가 뚫린 잠옷을 펼치고 천천히 머리에 씌웠다. 바깥이 비치는 하얀 천이 머리를 통과했다. 히아신은 기도하는 양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팔을 넣고, 목을 뺐다. 바람이 통하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히아신. 눈 떠도 돼.”
그 말을 남기고 나디사는 떨어진 옷들을 주웠다. 화롯가 근처에 둬서 말려 두어야 될 듯했다. 빨랫감을 한가득 품에 안고 그의 등 뒤로 지나려는 참이었다.
“나디사.”
“응.”
시선을 내려 짧게 잘린 그의 뒷머리를 쳐다보았다. 히아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아 벽을 바라보는 듯했다. 대번 분위기를 파악한 나디사는 떠나지 못하고 그의 등을 지켰다.
“무슨 일 있어.”
“좋아해.”
대답이 한발 늦은 나디사는 그 고백을 마음으로만 받았다. 굵어진 빗줄기를 맞이하는 창문가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 오고 말 것처럼 열심인 빗물이 유리창을 닦고 있었다.
기운찬 빗소리의 힘을 빌려 나디사는 다시 화롯가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의 고뇌를 아는 듯이 히아신도 막지 않는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넘어지듯 앉아 버렸다. 옷을 말린다는 핑계를 대듯이 셔츠를 촥 펼치면서.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화롯불에 뒤지지 않을 만큼 뜨거웠다.
“나디사. 거기 있게?”
“응. 추워서.”
실은 심장이 펑 하고 터질 것 같아서지만. 나디사는 마음을 조여 오는 죄책감과 헛된 설렘에서 도망치고팠다. 그녀의 바람과 다르게 의자를 밀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땅이 꺼지는 게 낫다 싶을 만큼 천천히 다가오는 발소리도.
“그럼 나도 여기 있을래.”
마음을 보답받지 못한대도 히아신은 그녀의 옆에 앉았다. 나디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화롯불에 장작을 넣었다.
“나디사.”
“응.”
“여기 봐.”
매끄러운 금색의 시계에 타닥타닥 번지는 불똥이 비쳤다. 그리고 그즈음 하트 모양의 비눗방울이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에서 시작한 것들이 둘, 셋, 넷, 늘어나더니 강줄기처럼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오색 비눗방울의 출처는 저 유치하고 사랑스러운 남자겠지.
“나한테 너무 쉽게 환영을 거네.”
“이게 조건이야.”
“조건?”
“파르난의 사람들은 모두 힘을 쓰려면 특정 조건이 필요해. 그 조건을 알면, 이길 수도 있겠지.”
히아신은 그녀의 손에 갓 나온 빵처럼 따끈한 시계를 넘겼다.
“난 이게 조건이야. 상대에게 시계를 보여 주고, 그다음에 나와 눈을 맞추면…….”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의 말에 감긴 나디사는 눈길을 내어 주었다. 제 손으로 약점을 알리는 그의 눈은 패배자의 그것이었다.
“나의 마법에 걸리는 거지.”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칠을 한 것처럼 예쁜 그의 뺨을 만지고 싶었다. 비눗방울에 마법을 걸어 둔 게 분명했다. 나디사는 본능에 맡기듯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