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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28화 (128/210)

128화

라드군 복장을 하고 하룻밤 묵을 곳을 찾는 건 밤하늘의 별 따기였다. 여관 하나를 박살 낸 후라 그런지 마을에서는 천방지축 라드군을 손님으로 들이길 싫어했다. 자리가 없으니 다른 가게를 알아보라는 말들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었다.

“어떡하지.”

“응? 뭐가.”

이럴 줄 모르고 미리 여관에서 라드 두 마리를 찾아왔다. 문 앞에서 내쫓긴 이력이 열두 번인 두 사람은 강가로 다시 돌아온 참이었다. 배고파 우는 라드들의 노래는 수풀이 우거진 길을 들썩여 놓고 있었다.

해도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싶어 나디사는 얼굴을 찡그렸다. 특별한 하루는 어림없을지라도 만족스러운 하루는 가능한 것 아닌가.

유난스럽게도 가게마다 오늘은 영업하지 않는다는 팻말을 걸어 두었다. 복귀는 시간상 글렀으니 어디서 하룻밤을 자야 하긴 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나디사, 이것 봐.”

“무얼.”

히아신은 삐쩍 마른 나뭇가지를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보여 주고 싶었던 건 나뭇가지 끝에 앉은 애벌레 한 마리일 터였다. 고물거리는 애벌레를 본 나디사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일평생 고민 같은 건 한 적 없는 듯이 해맑은 남자의 기질은 이런 상황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벌레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 나디사를 보며 그는 상당히 머쓱한 표정이었다.

“왜 안 놀라지?”

“히아신.”

그녀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파충류를 비롯한 모든 짐승을 사랑했다. 도마뱀, 가제, 애벌레 등 그 나이대 여자애들이 질색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별종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마로닌 부부는 그렇지 않은 걸 보니 친모에게 물려받은 취향인가 싶다.

“애벌레 좋아해?”

“귀여워.”

“……와.”

히아신은 납치된 애벌레를 먹어 치울 듯이 보고 있었다. 납득할 수 없다는 그의 반응 때문에 엷은 웃음이 흘렀다.

“그렇게 화려한 걸 보니 다 크면 예쁜 나비가 되겠다.”

“얘가 나비가 돼?”

“응. 수비타에서는 흔하잖아.”

“난 본 적 없는데.”

타국에서도 수비타의 나비는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이름나 있었다. 향긋한 꽃망울이 부풀어 터지는 시기엔 그물주머니를 든 아이들이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다. 색깔별로 나비를 수집해 보고 싶다며 이제나저제나 봄만 기다리는 아이도 있는 것을.

“얘가 나비가 된 것도 보고 싶어.”

마치 애벌레를 처음 본 양 이름도 지어 줄 기세인 히아신이 재미있었다.

“나비 한 마리 나타나면 말해 줄게.”

그러나 히아신은 그 가여운 애벌레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른 애 말고. 얘가 나비가 된 거.”

이상한 그의 고집이 싫지 않아 나디사는 픽 웃고 말았다.

“얘 키울래.”

“쉽지 않을걸. 먹일 나뭇잎도 가져다줘야 하고. 번데기 시기도 기다려야 되고.”

“예쁜 나비가 되면 나디사한테 선물해 줄게.”

매일 아침 애벌레를 위해 신선한 나뭇잎을 구하는 히아신을 상상하자 저절로 아랫배가 당겨 왔다.

“웃어?”

“안 웃어.”

여기서 웃음을 터뜨려 그의 순수한 마음을 짓밟을 생각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디사는 찬란한 은색 강이 되어버린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날씨는 좋아서 다행이다.”

그러나 5분도 지나지 않아 나디사는 그 말을 후회했다. 심술쟁이 하늘은 그들의 하루를 망칠 작정인지 단 하나 남은 장점마저 뺏어 가려고 안달이었다.

히아신과 애벌레의 수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곤두박질친 물방울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하늘 보기 무서워 고개를 숙인 그녀의 귀에 후드득 빗소리가 들렸다.

“비다!”

빗물과 어우러진 목소리는 현실을 회피할 수도 없게 했다. 후드를 뒤집어쓴 나디사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날씨가 좋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 * *

하늘이 무너져도 그와 단둘이 노숙하는 일만은 막고 싶었다. 비를 맞는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언젠가처럼 라드 두 마리를 데리고 강 건너편으로 갔다. 그 와중에도 애벌레를 지키겠다고 망토로 가려 주는 히아신 때문에 우울할 틈이 없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새까만 비구름을 몰고 달렸다. 산과 강에서 멀어져 한 들판이 있는 방향으로 질러갔다. 밤하늘과 손을 잡은 듯한 형상의 들판은 풀벌레 소리 말고는 들리는 게 없다.

붉은 벽돌과 굴뚝이 있는, 작은 집을 발견한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살던 사람은 전쟁 통에 떠났는지 살림살이라곤 빗자루와 타다 남은 장작뿐이었다.

“비가 그칠 생각이 없네.”

그 집을 최초로 발견한 히아신과 나란히 지붕 밑에 서서 비를 피했다.

“괜찮아? 비비?”

보라색 줄무늬를 가진 애벌레는 비비라는 괴상한 이름의 주인이 됐다.

“세상에.”

오늘 밤은 옷도 웃음도 마를 일이 없나 보다.

“비비가 뭐야.”

“이상해?”

“아니, 그런 것보단…….”

비비가 젖지 않도록 망토에 숨겨 둔 히아신은 시선을 빨아들일 것 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왜.”

무언가에 굶주려 있는 그의 눈길을 피하지 못했다. 서로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웃음은 먼 곳으로 떠나갔다. 저를 보는 그의 눈빛 때문에 몸의 열기가 식지를 않는다.

“왜 그래.”

“아니.”

딴청을 피우고 싶어진 나디사는 고개를 돌려 집 안쪽을 보고 또 봤다. 깔고 잘 천을 구해 오면 그럭저럭 이 밤을 보낼 수 있을 듯했다.

“마을에 가서 이불이라도 얻어 와야 되나.”

그때 꼼짝 않고 있던 히아신이 느린 걸음으로 집 안에 들어섰다.

“뭐 하게, 히아신.”

“신기한 거 보여 줄까.”

“신기한 거?”

그러더니 냉정한 태도로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들판에 주저앉은 라드 두 마리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로써 집도 뺏긴 나디사는 로마와 디디의 머리를 차례차례 쓰다듬어주었다.

“하여간 네 주인은 참 이상해.”

까치발로 서서 집안을 들여다보던 나디사는 청소라도 하는가 싶어 문을 두드렸다.

“히아신.”

똑똑똑똑, 쉬지 않고 문을 두드리자 이번에는 응답이 들려왔다.

‘잠시만.’

장난은 이쯤 하라고 얘기를 해 두려는 찰나에 문이 찰카닥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만일에 상황을 대비해 문의 잠금장치를 고친 것인가 짐작했다.

“뭐 해.”

“들어와.”

퍽 자랑스러워 보이는 그의 미소를 본 나디사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천천히 발을 뗐다. 붉게 타는 화롯불 위에 올려 둔 주전자가 첫 번째로 눈에 들어왔다. 내부는 옷이 마를 정도로 후끈했다. 거미줄과 유리 조각들은 쓸어 없앤 듯 깨끗하고 카우치와 식탁, 그리고 갓등이 있는 침대가 들어와 있었다.

“어때? 우리의 새 보금자리.”

“갑자기? 내가 꿈을 꾸나?”

“이것 봐, 나디사.”

아직 놀라긴 이르다는 듯이 히아신은 그의 망토를 풀어 식탁 위에 펼쳐 두었다. 그걸로 식탁보를 대신하는 줄 알았더니 히아신의 손에서 담배 연기 같은 것이 풍 뿜어져 나왔다. 연기를 먹고 발발 떨던 망토는 점차 하얀색의 천으로 변해 갔다. 라드군의 상징인 푸른색의 망토는 사라지고 식탁 위엔 여성용 잠옷만이 남았다. 눈 뜨고 별천지를 구경한 나디사는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걸로 갈아입어, 나디사.”

“어떻게 한 거야?”

“사실 말이야. 아, 조금 춥다. 기다려 봐.”

화롯불 앞으로 간 히아신은 끓고 있는 주전자를 꺼내 오며 콧노래를 불렀다.

“나는 두 가지 능력이 있어.”

“어떤.”

“너한테만 보여 주는 거야.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

주전자에 찻잎을 넣는 히아신의 얼굴엔 기쁨이 톡 터져 나왔다. 식탁 앞에 앉은 나디사는 신기한 눈으로 그를 기다렸다.

“이건 환영. 실제가 아니지.”

히아신의 주전자에 있는 뜨거운 물이 용암처럼 솟구쳐 오른 건 그즈음이었다. 찻물이 우러난 연둣빛 물은 폭포라도 되는 듯이 찻잔 안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이건 실제야. 내가 교환해 온 거야.”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만지자 환영으로 만들 수 없는 열기가 느껴졌다. 나디사의 시선은 맞은편 자리에 앉는 히아신을 따라다녔다.

“그럼 이건 어디서 가져온 건데? 네 그 능력으로 만든 거야?”

“내가 갖고 있는 물건과 내가 갖고 싶은 걸 교환한 거야.”

우쭐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신 히아신은 이윽고 식당 직원처럼 눈인사를 했다.

“맛은 어떠신지.”

“하, 뭐 하는 거야…….”

하지만 히아신을 타박할 수 없었다. 돈 한 푼 안 쓰고 옷에, 잠자리에, 몸을 녹일 차까지 생겼다.

“이건 아버지도 모르는 거야. 내가 몰래 개발한 능력이거든.”

“그걸 나한테는 보여 줘도 돼?”

“응.”

화롯불에 데운 차보다 그의 눈빛이 더 뜨거웠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꿀 수 있는 말을 찾던 나디사는 우선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나저나 나디사.”

“응?”

“안 입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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