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자신의 의지로 빠진 것은 아니었다. 발목에 쇠줄을 묶은 듯이 물속으로 끌려가고만 나디사는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히아신!”
정신을 확 깨는 데에는 물놀이가 최고였다. 갈아입을 여분의 옷이 없다는 걸 떠올린 나디사는 도끼눈을 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왜 그랬어.”
“들어오고 싶어 했잖아.”
“내가 언제.”
“방금 눈으로 그렇게 말했는데, 히아신 자기야, 들어오고 싶어요.”
황당한 소리를 하는 히아신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 끝에 달린 물방울이 추락했다. 별별 모습에 마음이 다 약해진 나디사는 자신이 떠내려가지 않게 잡아 둔 그의 팔을 밀쳤다.
“수영할 수 있어.”
비록 발이 땅에 닿지 않지만 크게 무섭진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아신은 매력적인 미소를 입술에 달고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래? 누구한테?”
“아버지 같은 분.”
이모부, 혹은 삼촌이라고 불렀던 그 시절의 마로닌 씨에게 생존 수영을 배웠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지금은 그를 어떻게 소개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함부로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래서 그가 불편해한다면 슬픈 까닭이었다.
“누군지 알 것 같아. 좋은 분 같던걸?”
“정말로?”
다리는 오리발처럼 바쁘게 움직이는데 물 밖에 나와 있는 상체는 얌전을 뺐다. 물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바쁜 하체 생각에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춤 신청을 받은 것처럼 그의 팔뚝에 손을 올리고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춤을 추기엔 너무 죽다 살아난 사람의 전형이었다. 상처를 살피는 시선을 알아차린 히아신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자세히 보지 마. 하나도 안 예뻐.”
“누가 그랬어.”
“돌이? 벽이? 아무래도 바다가 그랬다고 하면 안 믿어 주겠지?”
“히아신.”
별을 담은 강물이 흐르는 소리만 들려왔다. 파란 강에 빠져 있는 히아신은 도망칠 곳을 찾는지 시선을 비꼈다.
“배 안 고파? 나디사?”
“왜 나한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거야.”
“설명. 설명하면 달라질까? 말은 바꿀 수 있는 게 없어. 어차피 나중 가면 다 알게 될 거야. 아, 걔가 그래서 나한테 설명을 안 한 거구나. 진짜 예쁜 구석이라곤 없는 이야기들뿐이거든.”
제풀에 지친 나디사는 설득을 그만두고 그의 손을 놓았다. 헤엄치듯 물살을 밀어 내며 그와 거리를 벌렸다. 그녀의 뜻을 존중하여 놓아주는 듯하던 히아신은 살며시 그녀의 손가락 끝을 붙들었다.
“헤엄치고 싶어? 너무 멀리 가지 마.”
“그럼 이야기해 줘.”
“나디사…….”
“네 입으로 듣고 싶어. 다른 사람의 말로 널 오해하거나 미워하고 싶지 않아.”
머리칼이 뺨에 붙도록 젖은 두 사람의 시선은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차가워졌다. 웃음과 설렘이 사라진 강에 빠진 히아신은 혀로 입 안을 눌렀다. 튀어나온 볼에 난 멍 때문인지 그는 매우 반항적으로 보였다. 그리사의 상처를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의 상처는 깨진 유리로 눈알을 긁는 듯 괴로웠다.
“그런 기특한 이유라면 말하지 않을 수 없잖아.”
그러나 그의 표정은 전혀 녹록하지 않았다. 끈질긴 시선과 침묵 끝에 히아신은 본인이 한 수 져 준다는 어조였다. 그 모든 게 계산된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만.
“형제가 왔어. 아무래도 그 경비병 두 명을 죽이는 걸 그리사가 목격해서 찾아와 없애려던 모양이야.”
“네 형제?”
“응. 엄청 사나워서 내 뺨과 목도 이렇게 만들었다고.”
“그래서.”
“그게 다야. 좀 다퉜지. 그리사를 죽이려고 하길래 그러지 말라고 그랬어.”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목소리 속에 감춘 말들이 있었다. 탐색에 질린 나머지 나디사는 그의 어깨를 잡고 앞으로 당겼다. 죄 없는 양처럼 끌려 온 히아신은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더 얘기해.”
“그게 다야.”
“그게 다일 리 없지. 왜 경비병을 죽인 건데. 그리고 그리사를 죽이려다가 네 말에 돌아갔다는 것도 안 믿겨.”
“그럼 믿기도록 몇 가지 더 추가해서 얘기해 줘야 하나? 그날 날씨는 어땠는지, 우리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히아신의 어깨를 놓친 손이 물에 빠져 퐁당 소리를 냈다. 물속을 떠도는 손과 발을 물끄러미 봤다. 진실을 얼버무리려고 내놓는 농담들이 물리는 찰나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는 손이 있었다.
“나디사.”
“왜.”
“나를 실망하게 하지 마.”
실망이라는 단어에 그녀는 눈을 들어 올려 그를 바라봤다. 물과 눈물. 무엇이건 간에 가득 담겨 있는 그의 눈은 나 좀 봐 달라는 애걸과도 같았다.
“나에게 주기로 한 날들이잖아. 난 그날들도 온전히 가지지 못하는 거야?”
“…… 지금도 난 노력하고 있어.”
“노력으론 부족해.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너와 같이 지내는 이 시간을 즐길 수 있단 말이야. 그런데 왜 너는…….”
“…….”
“노력이 필요해?”
자신의 불안은 알 수 없는 어둠을 가진 히아신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불안정한 저울에 서 있는 기분으로는 그를 온전히 이해하고 느낄 수 없었다.
“나디사.”
무너져 있던 히아신의 표정은 빠르게 수습됐다. 그녀의 손을 들어 올린 그가 절박함을 담아 손끝에 입을 맞췄다.
“오늘 저녁은 너무 맛있었어. 정말이야. 진심으로.”
떨리는 손 키스를 받은 나디사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은 거였다. 그들이 처한 상황, 감정을 모두 잊고 그저 강가에서 노는 연인이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러니 진실을 캐묻는 그녀가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마을 어귀를 걸으며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그리던 그가 기억났다. 그때의 그는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강가를 기대하진 않았을 텐데.
“그래서. 네 형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는대? 그리사를 죽이려고 했다면서.”
마음을 바꿔 먹은 나디사는 조금 더 가벼운 투로 물었다.
“응.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머나먼 길로 보내 버렸지.”
그 말이 꼭 죽였다는 말처럼 들렸지만 나디사는 더 따져 묻지 않았다. 떠날 시간을 알리듯 밤바람이 날아와 젖은 두 사람의 어깨 위를 스쳤다. 강물에 담근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던 히아신은 갑자기 바람에 굳은 양 멈추어 버렸다.
“히아신. 왜 그래.”
흐느끼지만 않을 뿐이지 그 모습이 우는 사람 같았다. 그의 숨소리가 일정하지 않았다면 의심해 볼 법도 했다.
“나디사.”
송곳니에 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응.”
“나는 잘 모르겠어.”
“무엇을.”
“어떻게 너랑 완벽한 날들을 보내야 할지. 내가 말하면 모든 게 망가질 것만 같아. 지금도…….”
“손, 내려 봐.”
“…….”
“얼른.”
근사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기 싫다던 그의 말이 떠오른 나디사는 천천히 남자다운 손을 끌어 내렸다. 가림막 역할을 하던 손이 치워지자 젖은 속눈썹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멍의 개수를 보니 오늘 하루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갔다. 엉망인 얼굴이었지만 그 음울한 녹색 눈동자만큼은 마음에 쏙 들었다.
“지금도 내가 망치는 것 같아.”
웃는 얼굴에 가려져 있던 그의 본질은 이렇게나 연약하고 섬세했다. 탐스러운 꽃봉오리 같은 그의 진심이 말실수 한 번에 져 버릴까 싶어 입을 떼지 못했다.
그녀도 기대가 지나쳐 무서웠던 적이 있었다. 마로닌 부부와 공원을 가기로 약속한 어느 여름날 밤. 라드군 합격 통지서를 받고 나서의 그런 기대감. 조건 없이 온 행운이 물거품처럼 사라질까 싶어 감정을 단속했던 그 순간들이.
이렇듯 엉망인 얼굴을 하고도 생각하는 거라곤 오직 그녀와의 하루뿐. 나디사는 마주 잡은 그의 손을 천천히 놓아 강물 속에 빠트렸다.
“그럼 내가 준비한 대로 해도 돼?”
“…… 어떤 건데?”
“저녁을 먹고, 수영도 했으니. 씻고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때. 오늘 어땠는지, 내일 무얼 할 건지.”
꽃이 피듯 화사한 미소를 되찾은 히아신은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물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를 등지고 그녀는 그의 등에 업혔다.
“히아신! 무서워.”
“힘들잖아. 내가 저기까지 데려가 줄게.”
업은 상태로 수영을 시작하려 하다니. 히아신은 용감한 만큼 재주도 참 좋았다.
“히아신.”
“응?”
“아니야.”
완벽한 하루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서글픈 생각이 드는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