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나디사는 장담한 것과 다르게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신관들과 여관 주인의 호소를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니 거지가 되게 생겼다는 주인의 입술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일의 진행이 더뎌 답답해진 나디사는 꽉 죈 망토 끈만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리사는요.”
“그리사 경은 지금 옮기고 있습니다.”
“어딨죠?”
친절한 신관의 뒤를 따라가 보니 그리사가 들것에 실려 나오고 있었다. 나오기 전보다 상태가 말도 아닌 그리사를 보고 눈물이 질금 날 뻔했다.
“……그리사.”
목소리로 그녀를 알아본 그리사가 고개를 돌렸다. 저도 사내라고 다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하는 듯했으나 나디사는 그딴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사. 괜찮아?”
“아직까지는요.”
“에이도 같이 돌아갈 거야. 여긴 걱정 말고 몸을 회복하는 것에 집중해.”
고개를 끄덕인 그리사는 아직 할 말이 더 남은 눈이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전후 사정을 알아야지 이리 만든 범인을 잡을 것 아닌가.
안심하라는 뜻을 전하고 싶어 엉성한 손길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그리사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부대도 반으로 갈라진 마당에 그리사마저 잘못됐다면 나디사는 평생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을 터였다.
그리사는 그녀의 여린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나직한 한숨 뒤에 위로를 더했다.
“나는 멀쩡하니까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도 정확히는 몰라요. 히아신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히아신을 언급했다. 혼자 의심하던 것처럼 그와 관련이 있음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듣는 귀가 많으니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나디사, 잠시만.”
그녀보다 평온한 그리사는 침대라도 되는 양 편하게 누워 있었다.
“조금 쉬고 싶을 뿐이에요. 나머지는 히아신하고 이야기해요.”
묘하게 그가 히아신을 감싸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매사 투덜거리지만 진중한 그리사와 히아신은 물과 기름 같은 관계였다. 그런 그리사의 눈을 순한 양처럼 만들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만 환자를 이동시켜도 될까요.”
“아, 네.”
끼어든 신관으로 인해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했다. 신관들 손에 실려 떠나는 그리사를 쫓아갈 시간은 없었다.
“이봐요!”
사람들의 말소리를 뚫고서 다닥다닥 달려오는 발소리가 이 밤의 소란을 빚고 있었다.
“저기!”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던 여관 주인의 눈에 딱 걸리고 말았다.
“아가씨!”
“네.”
“해결해 준다는 게 정확히 언제인가요? 네?”
여관을 수리하는 비용을 신관 측에서 해결해 주기로 했지만 증서 없이 말만 놓고 가는 게 불안한 모양이었다. 나디사는 전부 공주의 성에 머물고 있으니 여차하면 그리로 와야 한다는 말을 전하던 차였다.
“그리고…….”
“그리고?”
그러고 보니 그 남자, 히아신은 어디 있지.
목격한 살인 사건이 어땠는지 진술하고, 정신 나간 여관 주인을 달래 주고, 다친 그리사를 배웅하고. 우왕좌왕 들이닥친 사건들이 물러갈 즈음에야 그녀는 한눈을 팔 수 있었다.
“이봐요!”
하필 골라도 식당 계단을 골라 앉아 있었다. 창문에서 흘러내리는 불빛이 남자의 얼굴을 밝혔다. 손가락으로 집은 땅콩사탕이 유리처럼 반짝였다. 그게 보물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고 있는 녹색의 눈은 조금 위험했다. 체면이나 안위 같은 것을 놓아 버린 채로 달려가 그를 안아 주고 싶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그리고 뭐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보상은 주어질 겁니다. 그럼 이만, 죄송해요.”
그녀가 골 아픈 일을 처리하는 동안 그는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멀거니 있었다.
“잠시만요.”
미리 사 둔 바구니를 들고 그의 앞으로 걸어가는데 심장이 타는 듯했다. 나디사는 매일같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그의 낡은 시계를 쥐었다. 근래 알게 된 사실인데 그걸 손에 땀이 찰 때까지 쥐고 있으면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렸다.
계단 앞까지 당도하는 내내 그걸 쥐고 있었던 나디사는 천천히 손의 힘을 덜었다. 쇠 냄새가 박일 것 같은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뭐 하고 있어.”
“응?”
선물한 땅콩사탕을 다 먹지도 않고서 있는 히아신이 안타까웠다. 그 정도로 아껴 먹을 줄 알았다면 가판대에 있는 걸 모조리 사다 주었을 텐데. 하지만 히아신은 이미 만족스러운 것처럼 기운차게 일어섰다.
“다 끝난 거야?”
“얼추.”
“그럼…….”
기대감 넘치는 히아신의 시선이 닫힌 가게들을 쭉 훑었다. 여관 덕에 손님들이 물밀듯이 빠져나가자 일찍 문을 닫는 가게가 한둘이 아니었다. 갈 만한 식당을 알아 놓았던 나디사도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대로 저녁을 망치기 싫은 나디사는 잠시 신관들의 눈을 피해 한 가게에 들렀다. 문을 닫으려던 가게에서 사 온 것이라 변변치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걸 사 왔는데.”
그의 시선이 손에 든 소풍 바구니로 옮겨 왔다.
“좋아할지 모르겠네.”
누가 봐도 그건 무난한 샌드위치였다. 빵 사이에 햄과 치즈를 끼운 것이 전부인 그것을 나디사는 쑥스럽게 공개했다.
“와!”
작은 감탄사를 듣자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실망할 줄 알았던 녹색 눈은 구두약을 바른 것처럼 맑고 반짝였다. 땅콩사탕이 묻은 손으로 바구니를 받은 그는 보는 사람이 의아할 만큼 행복해했다.
“날 위해 사다 준 거잖아. 그렇지?”
특별할 것 없는 샌드위치가 그의 기분을 저만큼 끌어 올리다니.
“……그렇지.”
“여기는 너무 시끄러워. 다른 데로 가서 저녁 먹자.”
나디사는 어정쩡한 자세로 그에게 손을 맡겼다. 놓치기 싫은 양 손을 꽉 맞잡은 히아신은 시끄럽고 다정한 마을과 반대되는 길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의 손을 잡은 순간 알 수 있었다. 그의 시계를 쥐는 것, 손을 잡는 것, 두 방법은 쌍둥이처럼 비슷하다는 걸 말이다.
시끄럽던 마음속 불안이 잦아들고 있었다.
* * *
햄은 짭짤하고 치즈는 고소했다. 빵은 오늘 아침에 만들었다는 말이 참이었는지 신선하고 쫄깃했다. 다만 히아신은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남자였다. 반도 채 먹지 않고서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아니다. 반이나 먹었으면 됐지. 바지를 걷은 나디사는 풀숲에 앉아 군화 끈을 풀었다. 걷고 뛰느라 눌려 있던 발을 강에 풀어 주고팠다.
“하…….”
산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있는 이 작은 강은 이곳 마을 사람들의 자랑이자 놀이터였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멱을 감고 수영을 하는 장소라고 들었다. 그러나 관심이 한 곳으로 쏠린 오늘은 그들만의 것이 되었다.
“히아신. 수영은 그쯤 해 둬.”
히아신은 웃옷을 나무에 걸어 말려 두고 물속에 들어갔다. 피 묻은 꼴을 보이기 싫다며 씻는 겸하여 들어간 참이었다.
그녀의 부름에 악어처럼 눈만 쏙 내민 히아신은 그녀가 있는 자리를 확인하듯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히아신.”
흔들리는 물결로 그의 위치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수면에 비친 그의 은색의 머리칼을 지켜보던 차에 발목을 잡혔다. 물밑으로 끌어가듯이 그녀의 발목을 꼭 잡고 있던 범인이 떠올랐다. 은발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이 아름다운 잔물결을 만들어 냈다.
“간지럽게.”
“부었어.”
“신발이 꽉 껴서.”
손바닥에 올려놓은 발을 빤히 보던 히아신이 손 움직임을 달리했다.
“읏.”
“아파?”
“조금…….”
손가락을 써서 누르는 히아신의 눈빛에 무게가 있었다. 차마 그만두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수면에 닿을 때마다 가슴이 동화된 듯이 출렁거렸다. 바람을 타고 퍼지는 수면에 박혀 있던 시선이 조금씩 조금씩 그에게 향했다.
“아.”
“참아 봐, 나디사.”
“살살해.”
어느덧 먹던 샌드위치도 내려놓고 그를 구경하느라 바빴다. 상체에 실오라기 한 올 안 걸친 히아신이 자신의 발을 주무르고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엄지로 발바닥의 움푹 파인 지점을 꾸욱 누르자 어깨와 팔이 동시에 떨렸다. 그는 이어져 있는 뼈를 한 번씩 누를 기세로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에 눌린 발가락이 부끄러운 양 굽었다. 그러자 그는 냉정한 눈으로 발 전체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발을 부스러뜨리려는 듯이 힘을 주는 그가 무서울 법도 하지만 이상한 신뢰감이 차올랐다. 판단력이 흐려져 탁한 그의 시선이 위로 들렸다.
“나디사.”
“응?”
“아니야.”
아리송한 말을 남긴 그의 얼굴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의 시선과 입술이 어디에 닿는지 지켜보던 나디사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히아신의 입술이 정한 목적지는 그녀의 발등이었다. 그의 입술이 물속에 담겼다. 입술이 잠긴 그가 죽은 듯이 입맞춤을 남기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
따듯한 빛도, 약속도, 그 무엇도 없는 저녁 식사였지만. 오래도록 갈망하던 눈빛이 섞인 순간 그녀는 못된 악어가 사는 강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