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어쩌자고 고개가 돌아갔는지 모르겠는 밤이었다. 눈알 빠지게 어서 오기만을 기다려 왔더니. 군복을 입은 나디사 마로닌이 마을의 일원인 양 자연스럽게 장을 보고 있었다. 이건 운명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얼마인가요?’
정확한 내용을 알고 싶어 그녀의 입 모양을 읽었다. 상인이 권하는 사과를 들어 향을 맡는 그녀, 작게 잘라 둔 과일 조각을 시식하는 그녀. 어느새 새 셔츠 사는 것은 뒷전이고 그녀의 관찰자가 되어 버렸다.
‘그럼 이것 말고 이걸 다섯 개 포장해 주세요.’
구매한 물건이 포장되는 동안 그녀는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여관으로 가 진실을 알게 된 나디사는 지금처럼 다정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뛰었다.
감히 바라봐서는 안 될 사람을 보는 것처럼 그의 눈길이 지나는 자리마다 열망이 드러났다.
모처럼 또래 여인들처럼 장을 보는 나디사의 자리는 여기인 듯싶었다. 그는 이런 사람이었고 그녀는 저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밝은 거리와 다정한 이웃들, 그리고 과일을 담은 누런 봉투가 몸에 맞는 여자였다. 그는 계절 없는 땅과 무서운 형제들, 그리고 셔츠를 치장한 피가 몸에 맞는 남자였다.
‘이 꽃은 얼마니.’
손이 꽉 찼음에도 나디사는 가난한 소녀의 수레에 담긴 꽃을 샀다. 그 소녀에게 건네는 동정심과 미소가 탐이 났다. 본인이 되게 무정한 사람인 줄 알고 있지만 그건 무정이 어떤 건지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히아신의 발은 그녀의 걸음을 따라갔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것처럼 발맞추어 걸었다. 하지만 달콤하고도 은밀한 동행은 길지 않았다.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여관에 도착한 그녀는 눈에 띄게 웃음을 잃어 갔다.
아,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가슴이 아파 왔다. 할 수만 있다면 어두워진 그녀를 밝은 거리로 끄집어내고 싶었다. 그녀는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그게 누구일까?
“히아신!”
나였구나. 섣불리 꺼내 놓을 수 없던 기대가 가슴을 간지럽혔다. 내가 너를 찾듯이 너도 나를 찾는구나.
“히아신!”
길 잃은 아이처럼 불러 대는 그녀의 눈빛에 가슴이 부풀었다. 왜 숨었는지도 잊고서 그녀에게로 끌려갔다. 그리 애타게 부른 만큼 자신을 꽉 안아 주었으면 좋겠다. 어떤 집에서는 퇴근하고 돌아온 가족을 안아 준다고 들었다.
“히아신!”
눈썰미 좋은 그녀가 먼 거리에 있는 그를 알아보았다. 히아신의 발걸음은 미끄러지는 것처럼 서두르고 있었다. 조금 더, 조금 더 빨리 그녀에게 다가가 안기고 싶었다.
떼로 모인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말소리는 이 만남을 막지 못했다. 한시름 놓은 듯이 눈이 풀어지는 나디사에게 당장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녀는 멈추지 않는 히아신을 보고 당황한 듯이 걸음을 멈췄다.
호기심에 기웃대는 시선을 받으며 히아신은 달려가 그녀에게 안겼다. 사실 그녀보다 훨씬 큰 그가 덮쳤다고 봐도 좋았다. 그러나 나디사는 얼마간 망설인 게 전부였다. 누런 봉투를 든 손으로 그의 등을 마주 안았다.
무어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쉽게. 눈물을 허락할 만큼 어리숙하지 못한 히아신은 웃는 것으로 이 감정을 표현했다.
“잠깐.”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깜빡인 나디사는 안은 손을 풀고서 그를 올려다봤다.
“이게, 얼굴이 왜 이래.”
“벽을 좀 보수하려다가. 그리사가 춥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디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시끄러운지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그 덕분에 그 귀한 미간 주름을 코앞에서 볼 수 있었다.
“네가 그렇게 찡그릴 때마다 이마에 입 맞추고 싶어.”
“응?”
담이 작은 나디사는 그의 말에 당황한 것처럼 허둥거렸다.
“사람이 많아서 잘 안 들려.”
여관이 망했다는 자극적인 소식에 몰리는 사람의 수가 늘어 가고 있었다. 구멍이 잘 보이는 명당자리는 어느새 한 줄로 줄을 섰다.
“이쪽으로 와.”
달밤의 만남을 들키고 싶지 않은 듯이 나디사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쪽으로 갈게.”
“머리를 다친 건 아니지?”
“다른 데야.”
살점이 썩은 것처럼 가슴이 욱신댔다. 이 욱신거림이 왜 생겨났는지 히아신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이 다 된 그녀를 봤을 때부터 저 자신이 작은 벌레가 된 것 같았다. 그녀가 밟으면 밟힐 것처럼 작고 변변치 못한 자신이 보였다.
그를 세워 두고 한 상인과 말을 주고받은 그녀는 마른 수건을 구해 왔다. 그제야 히아신은 상가 유리창에 비친 제 몰골을 보았다. 코르를 죽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금 드는 순간이었다.
“이거 써.”
제 몰골이 우습지도 않은가. 나디사는 손 쓰는 방법을 잃어버린 듯한 그의 머리에 수건을 얹어 줬다.
“머리부터 말려. 어디서 수영이라도 하고 온 거야?”
맑게 갠 하늘 같은 그녀의 상상력은 따라갈 수 없었다. 히아신은 직접 닦아 주려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챘다. 아, 그녀는 돌아와 줬다. 양피지 한 장을 채우는 것도 어려웠던 그는 비로소 하고 싶었던 것들이 떠올랐다. 기억에 저장하지 못하고, 글로 적지 못한 게 안타까울 만큼.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그를 떼어 놓고 싶어 해 둔 약속일까 봐. 그 부족한 믿음에 양피지를 채우지 못했다는 걸 새삼스레 깨우쳤다.
“나디사. 돌아왔네.”
수건을 뒤집어쓴 그는 거칠거칠한 그녀의 손을 놓지 못했다.
“그리사 잘 돌보고 있으라니까. 어떻게 된 거야.”
“여관이 너무 낡아서. 무료로 보수해 주고 싶어졌어.”
“……가 봤는데 인력이 없어서 따로 살인 사건을 조사할 시간이 없대. 그래도 일단 시신이랑 그리사를 옮길 사람들은 신전에 부탁해 얻어 놓았어.”
“잘 됐다.”
세상 무서운 것은 그녀뿐이니 둘이서 멀리멀리 도망치면 어떻게 될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은 그녀는 실망하고 미워하다가 종내는 버리고 싶어 하겠지.
“너도 가서 치료해야겠다.”
“그런 것 말고.”
“그러면.”
“나랑 시간 보내 줘야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나는 나로 태어나서 너한테 온전히 사랑받을 수 없을까.
“저녁도 먹고, 예쁜 옷도 사 주고, 또, 또……. 같이 걷고.”
말로만 늘어놓아도 아름답고 황홀한 계획이었다. 나디사는 당황한 눈빛을 숨기고 들고 있던 누런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나 좀 봐 달라는 듯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무얼 샀어.”
“그게…….”
사과 치고 작은 봉투를 든 나디사는 그의 눈치를 봤다. 손에 든 들꽃과 작은 봉투는 그의 상상력 발달에 도움을 줬다. 나디사는 그 누런 봉투를 그의 가슴에 거의 떠밀다시피 전했다.
“너 좀 먹어 보라고. 이거 엄청 맛있어.”
설사 이게 돌이라 해도 먹어 줄 생각인 히아신은 받은 봉투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땅콩사탕이 들어 있었다.
“맛이 없으면 안 먹어도 돼. 억지로 먹을 필요 없어.”
하지만 그 자리에서 봉투에 손을 넣었다. 끈적거리는 동그란 알알이 그의 손에 잡혔다. 꺼리는 기색 없이 집어낸 히아신은 빨간 입속에 사탕을 빠트렸다.
손에 남은 끈적이는 것들까지 싹싹 핥았다. 상상한 그대로의 맛이 입 안을 점령했다. 어금니가 시릴 정도로 달고 고소한 땅콩의 맛. 마지막으로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맛.
“어때?”
나디사는 모를 것이었다. 그도 이런 마을에서, 이런 사람들과 살아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짧고 너무 어렸을 때였지만. 그도 어미 대신 친절한 이웃의 가을걷이를 돕고 땅콩사탕을 받아먹었다.
“그리운 맛이 나네.”
연민으로 무장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의 특별할 것 없는 어린 시절을 이런 식으로라도 보상해 주고 싶은 그 마음을.
“좋다는 건가?”
“좋다는 거야.”
“그럼 다행이다.”
히아신은 그녀의 연민을 덜어 줄 수 있게 함빡 웃어 보였다. 그녀를 파먹고, 데려가려고 하는 벌레한텐 과분한 사탕이었다. 그리고 그 못된 벌레는 생각했다. 과연 그의 세상에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게 있던가.
떠나라는 말보다, 너는 수준이 떨어져 안 된다는 말보다, 다정한 사탕 몇 알이 그를 죽일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사탕의 맛에 그는 약 먹은 해충처럼 해롱거렸다.
이 여자가 없으면 죽은 듯이 살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여자가 웃지 않으면 그는 죽음을 바랄 것이었다. 글쎄다. 어떤 게 더 나은 삶일까.
“곧 신관들이 올 거야.”
“응…….”
“그리고.”
달콤한 사탕을 혀로 굴리느라 대답이 늦었다. 울고 싶은 그의 기분을 달래주는 데 특효약이었다.
“그리고 저녁을 먹을래?”
히아신은 걱정해야 하고, 대비해야 하는 게 많았다. 형제를 죽였고, 어쨌든 아버지를 배신한 거였다. 하지만 그는 바보 취급당해도 싼 놈처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 좋은 계획이야, 그거.”
배시시 웃는 그녀에게 모든 걸 맞춰 주고 싶었다. 그는 오늘도 누군가가 쓰다 버린 목각 인형처럼 살았다. 전과 다른 점을 하나 꼽자면 그가 진심으로 웃고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