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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24화 (124/210)

124화

익사한 시체는 못 생겨서 나디사가 보면 죽고 싶을 만큼 실망하고 말 거다. 그 때문에 물속에서 죽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도 속이 풀렸는지 못된 파도가 그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다정한 바람이 콜록거리는 그의 뺨을 쳤다.

감시하라고 보냈지 죽이라고 보낸 건 아니었나 보다.

“방금은 봐줬지만. 계속 네가 배신자처럼 굴면 봐주는 건 없어, 히아신.”

“응.”

“나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가서 여관에서 편히 잠들어 있을 그 새끼의 목을 가져와.”

“왜 걔야.”

힘 빠진 히아신의 물음에 코르는 황당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내 얼굴을 봤잖아. 그러면 죽여야지. 너도 돌아올 때 네 얼굴을 아는 것들은 다 죽이고 나올 것 아니야.”

그게 원칙이긴 했다. 독한 살충제를 뿌리듯 머무른 자리의 풀 한 포기조차 싹 죽이고 나오는 것이. 그런데 풀 한 포기는커녕 그 여자의 손끝 하나도 흠집 내지 못할 히아신은 웃음이 나왔다. 유머를 모르는 코르는 구멍 뚫린 여관만을 가리켰다.

“왕족 간 전쟁을 앞당기는 공을 세우려고. 내가, 너, 대신, 일을 좀 했는데. 그걸 저 멍청한 네 동료가 보고 말았지 뭐야.”

“대단하다.”

“뭐가.”

코르의 파도가 조금 풀어진 틈을 타서 흐물흐물한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을 꺼낼 수 있었다.

“코르 말고. 내 동료. 안 죽고 용케 너한테서 도망쳤네.”

“바보야? 내가 놓아준 거야. 왠지 동료가 더 있는 것 같아서 이참에 군인 몇 명 죽이고 가려고. 그편이 더 소란스럽잖아.”

그 말에는 웃을 수 없었다. 터진 입 안쪽을 혀로 눌러 지혈하면서 얼굴을 구겼다. 그럼 나디사가 코르의 손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자신이 당한 물고문과는 비교도 안 될 고통을 그녀가 당한다. 바닷물이 들어간 눈이 따가웠다. 난입한 소금기를 보내기 위해 눈물을 흘렸다.

“형제간 잡담은 이쯤 했으면 됐어. 그리고…….”

코르는 그의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물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선물해 준 사람이나 물건이나 기특해 죽겠다. 정교하고 아름다워 코르의 관심을 끌어낼 줄 알았다.

“그거는 뭐야.”

“코르가 관심 갖지 않아도 되는 거.”

“그게 뭔데.”

그는 두 번 묻지 않고 파도로 그의 주머니를 털었다. 물살에 이끌려 나온 히아신의 물건이 코르의 손에 들어갔다. 주인의 손만 타던 놈이 더럽혀지고 있었다. 바람 난 현장을 지켜보는 히아신의 눈빛이 어둑하니 꺼져 갔다.

“새 시계라도 샀어? 세상에.”

“코르.”

“그 헌 거는 어딨어. 아, 맞다. 보여 주지 마. 네 환영에 걸려들면 며칠은 골이 아프거든.”

그의 형제를 상대하는 게 까다로운 이유는 이것이었다. 히아신의 환영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환영 마법을 걸어 줄 시계를 상대가 봐야 한다는 것. 주문을 거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

코르가 들고 있는 건 금색 시계였다. 나디사가 선물해 준 그것. 평소 지니던 회중시계는 그녀에게 주었다.

“그래. 그건 좀 시계 볼 때 부끄럽긴 하겠다.”

히아신은 코르를 죽여서라도 얼른 아름다운 그의 것을 돌려받고 싶었다.

“코르.”

“왜. 놓아 달라고? 약속이나 해.”

“여기 봐.”

바다같이 넓고 막강한 코르의 세상을 깨부술 차례였다. 파도로 막아 두고 있었던 히아신의 몸이 자유롭게 풀려났다. 겁을 먹은 양 파도가 스르르 물러났다. 구겨진 셔츠를 털고 있는 히아신을 보며 코르는 주춤거렸다.

거미줄 같은 히아신의 환영에 걸렸음을 눈치챘다. 제아무리 현실과 비슷하게 꾸며 내도 가짜는 부는 바람부터가 달랐다. 히아신의 조건을 모두 알고 있다고 자신한 코르는 손으로 입가를 쓸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나 시계 바꿨어. 그걸로.”

그 말에 코르는 쥐고 있는 금색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파도에서 풀려 난 히아신은 일정한 보폭의 걸음으로 다가왔다. 뒤로 물러서 있던 코르는 발목이 아려 와 다급히 아래를 봤다.

파도는 그의 말에 복종했다. 말을 듣지 않는 파도를 보고 확신한 코르는 피식 웃었다. 여긴 환영 속, 빌어먹을 히아신의 세상이었다.

“풀어, 히아신. 이것도 혀 깨물면 되는 거 알지.”

“그렇다고 깨면 내가 너무 부끄러워지잖아.”

“히아신! 우린 형제야. 당장 풀어.”

“너도 나한테 물 먹였잖아.”

“하여간 제정신이 아닌 새끼. 아버지를 배신하는 거야? 응? 그래?”

썩 괜찮은 협박은 아니었는지 히아신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파도에 발이 묶인 이 상황이 코르는 끔찍하게도 창피했다. 히아신처럼 종잡을 수 없는 놈의 환영에 갇히는 건 정말로 사양이었다.

“풀어.”

“코르.”

“풀라고!”

“나를 더 믿어 주지 그랬어. 그리고 이왕 믿지 않을 거면 그 시계, 만지지 말지 그랬어.”

“윽!”

파도가 땅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손아귀 모양으로 변한 파도가 그의 목을 콱 졸랐다. 손으로 물줄기를 잡아 뜯어내도 소용없었다.

코르는 파도 줄기가 제 목을 조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환영 밖 세상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히아신은 허연 흰자만 보이는 형제를 땅에 눕혔다.

당한 것을 똑같이 돌려줄 수밖에 없는 제 비루한 상상력이 짜증 났다. 히아신은 무릎을 꿇고 앉아 형제의 목에 손을 올렸다.

“나디사를 죽이겠지.”

살고자 하는 본능이 히아신의 손을 잡는다. 결정을 내린 히아신은 형제의 목을 눌렀다. 아버지의 계획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나디사를 죽이는 것들은 죽는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버둥 치는 형제의 곁을 지켰다. 멋없이 죽는 형제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저가 부리던 파도와 함께였다. 좋아하는 파도에 목이 졸려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은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나의 선물이 마음에 들었길 바라, 코르.”

형제의 죽음을 손으로 느꼈다. 영혼이 떠나고 식어 버린 몸뚱어리는 재가 되어 바람에 실려 갔다. 몇 번을 보아도 적응이 되지 않는 죽음이었다.

마혼을 받아들인 자는 신의 세계에도, 사람의 세계에도 머물지 못하고 한 줌의 재로 떠난다. 잘게 부서지는 형제의 마지막 여행을 배웅한 히아신은 그만 몸을 일으켰다.

“닦아야겠다.”

잿더미 속에 파묻힌 그의 아름다운 시계를 찾아냈다. 달칵, 버튼을 눌러 시계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든 소녀의 초상화를 보자마자 입가에 미소가 차올랐다.

“너 나한테 빚졌어.”

마중 나가야 하는 히아신은 다리를 절뚝이며 걸었다. 코르의 파도는 사람의 뼈를 분리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었다. 빠져나온 지가 언제인데 아직껏 파도 소리를 귀가 삼키고 있었다.

불에 데친 것처럼 쓰린 뺨과 흉측하게 터진 입술. 이걸 반가워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정성과 사랑이 가득한 나디사의 간호는 다음으로 미루고 싶었다. 오늘은 평범한 남자와 여자처럼 식사도 하고 차도 마셔야 했다.

산길을 내려가 마을로 진입한 히아신은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여관을 둘러싼 횃불들이 그 관심만큼이나 뜨거웠다.

“여기 이렇게 큰 구멍이 났어.”

“누가 안에서 돌이라도 던진 거 아닐까?”

여관에 생긴 이례적인 사건은 단조로운 일상뿐이던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 중심에서 울고 있는 여관 주인을 발견한 히아신은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뜯기는 건 사양이야.”

나디사한테 꽃과 반지를 사 주기도 전에 가지고 온 돈을 다 쓰게 생겼다. 맡겨 둔 돈을 챙겨 오려면 파르난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형제를 죽여 버렸으니 그쪽도 당분간은 갈 일이 없었다.

독이 든 케이크를 먹게 생겼음에도 히아신의 걸음에는 여유와 웃음이 배어났다. 달밤의 자유가 그를 들뜨게 한 것일까. 히아신은 바다 냄새를 풍기며 마을 상가로 들어왔다. 아버지를 한 방 먹인 기분이었다. 이런 건 예상 못 했을 것이다. 아무도, 그 누구도.

저를 이상하게 훑어보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파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여관이 부서졌다는 소리를 듣고 구경 나간 사람들 덕에 시장길이 넓어져서 좋았다.

가장 먼저 새 옷을 장만해야겠다. 이런 초라한 몰골을 하고는 그녀 앞에 나설 수 없었다. 간 김에 물도 한 잔 얻어먹고 싶었고. 시장 끝자리에 있는 의상실 문을 잡아당기려는 차였다.

‘이건 얼마인가요.’

깍듯이 묻는 한 여자의 목소리에 그의 시야가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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