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그는 늘 운이 따라 주지 않는 편이었다. 살 만하다 싶으면 매번 그를 난도질하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히아신은 채우지도 못할 양피지에 시간을 허비하느라 경계심을 늦춘 자신을 탓했다. 그리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좀 도와줄래? 히아신.”
안타까운 일이지만 침입자는 그의 형제였다. 형제라고 이름 붙여진 놈들 중에서 그와 제일 상성이 맞지 않는 놈이었다. 아버지가 붙여 준 이름에 따르면 사해의 코르. 바닷물을 다루는 놈이라 해치우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신이 있다면 떼라도 쓰고 싶었다. 살인 사건을 발견했을 때부터 부디 파르난의 사람은 아니길 바랐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고 살았던 히아신은 한숨과 친해졌다. 이 모든 게 지겹고 따분했다.
“히아신!”
이번에 그를 부른 건 그의 형제가 아니었다. 비몽사몽 중인 그리사가 깨진 화병 조각을 들고 있었다. 자해 용도가 아니라 제 몸을 지킬 용도로.
벼랑 끝에 선 그리사의 부름을 무시한 채 어지럽혀진 방의 꼴을 찬찬히 뜯어봤다. 이불과 침대보에 검붉은 피가 튀어 있었다. 아, 여관이 저걸로 또 바가지를 씌우겠구나 싶었다. 깨진 화분은 세 배의 값을 부르려니 했다.
새 침대를 신발로 밟고 있는 형제나 피가 떨어지는데도 화분 조각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사 데이나. 그에게는 모두 골칫거리였다.
“히아신, 설마, 이놈이랑 한패는 아니죠.”
“어떡하나. 쟤랑 나랑 한패 맞는데.”
달려가 형제라는 놈의 멱을 따고 싶었다. 한패라는 소리에 그리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걔는 왜 죽이려고.”
히아신은 결국 이 구차한 다툼에 참견하고 말았다. 따스한 저녁 식사와 돌아온 그녀와의 포옹은 날아가 버렸다.
지친 그의 표정을 형제는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나 보다. 말리지 말라는 듯이 튀어나온 발이 날아갔다. 발등에 정확히 맞은 그리사의 뱃가죽이 쑥 들어갔다. 그에 의해 저만치 던져진 그리사를 벽이 받아 냈다. 콰직, 하고 벽에 금이 간 것을 보니 여관 수리를 다시 해야 할 듯싶었다.
“아, 윽…….”
머리도 파랗고 눈도 파란 코르는 다혈질에 성질이 나빴다. 뼈를 다쳤는지 그리사는 숨이 넘어가게 헐떡이고 있었다.
깔깔 웃는 코르의 목소리를 듣고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그리사 데이가 죽으면 나디사는 그에게 약속한 특별한 하루들을 주지 않을 터였다. 그건 이가 갈리게 싫었다. 써 보지도 못했고 어디에 쓸지 생각만 해 두었지 않은가.
그걸 다 쓰기 전까지 그리사 데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 있어야 한다. 끝장내려는 것처럼 화분 조각을 집어 든 코르를 더는 외면해선 안 된다.
“왜 그래, 히아신.”
동작을 멈춘 코르는 슬쩍 미소 지었다. 저를 도와주는 것으로 보였나 보지. 차분히 걸어온 히아신은 아껴 둔 힘을 발에 실어 그의 옆구리를 노렸다. 빈틈투성이인 옆구리를 까자마자 우지끈하고 뼈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 악!”
발로 날려 버린 코르가 여관 벽을 뚫고 밖으로 떨어졌다. 사람 모양의 커다란 구멍으로 돌가루가 흘러내렸다. 코르를 밖으로 보내는 데에 성공했지만 다시 기어 올라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히아신…….”
힘없는 손놀림으로 화분 조각을 던진 그리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예요, 진짜.”
히아신은 흉터가 남을 게 뻔한 그의 손을 보고 혀를 찼다. 미안하지만 어린 애송이의 손을 보듬어 가며 간호해 줄 시간이 없었다.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크게 펼친 손바닥을 흔들었다.
“나 오기 전까지 지혈하고 있어. 나디사한테는 괜히 보여 줄 생각 말고. 너만 동정받는 건 이제 그만해도 되잖아. 지금껏 누워서 그만큼 사랑받았으면 됐지.”
“허.”
헛웃음을 터뜨린 그리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정신이 드는데…….”
“그거야. 정신 꼭 붙들고 있어. 그리고 돌아와서 나는 네 편이었다는 거 나디사한테 꼭 말해 주고.”
아아아아아! 구멍 아래서 울리는 고성에 히아신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두려움과 감격의 전율이 머리를 관통했다. 말랑하고 따듯한 이들과 지내는 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다.
바람이 들어오는 구멍 앞에 선 히아신은 떨어질 준비를 하며 활짝 웃었다. 눈엣가시 같은 형제를 적으로 둔 오늘. 알 수 없는 기쁨에 올라탄 히아신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만을 기다렸다.
히아신!
형제의 발에 까여서 여관 밖으로 떨어진 코르는 거의 절규하고 있었다. 맞아 본 게 오랜만이라 적응이 안 되나 보다.
“그러니까 왜 왔어.”
조금만 더 있다가 나타나면 좋았을 것을. 그녀가 그에게 주는 것들을 몰래 숨어서 독차지하고 싶었다. 그도 자신의 처지를 잊은 건 아니었다. 그저 햇살 한 줌까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잃어버린 게 속상할 따름이었다.
독이 오른 코르의 눈을 보니 당장 올라와 그를 때려죽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히아신은 더 바짝 열이 오르게끔 혀를 내밀었다. 말 그대로 눈이 뒤집힌 코르를 보며 그는 개구리처럼 폴짝 뛰어내렸다.
“히아신!”
그를 지켜보던 그리사가 비명을 질렀다. 걱정하는 것을 보니 적어도 나디사에게 헛소리를 할 위험은 없겠다.
그래. 이 생고생을 하는데 보상은 있어야겠지. 2층 높이에서 뛰어내린 히아신은 무사히 착지하자마자 인적이 드문 길로 달려갔다.
“잘 가! 코르!”
“야!”
판단력이 흐려진 코르는 저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히아신을 보고 길길이 날뛰었다. 홱 뒤돌아보니 뒤따라오는 코르의 얼굴이 유령처럼 하얬다. 왜 가슴이 벅찬지 모르겠다. 잡히면 반죽음인 게 분명한데도 히아신은 기뻐서 몸이 근질거렸다.
“하하!”
자유의 바람을 맞이한 그는 저도 모르게 양팔을 벌리며 뛰었다. 아버지가 매어 둔 속박을 발로 차 버린 기분이었다. 신이 난 그의 얼굴을 본 코르는 더 열이 받은 듯했지만.
죽이든 말든 관심 없었다. 열 받은 코르의 눈이 흐려질수록 그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히아신! 멈춰!”
같이 훈련을 받고, 잠을 자고, 빵을 먹었으나 그 과정에서 웃음과 행복은 없었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그와 달리기를 하고 있으니 정말로 사이좋은 형제라도 된 듯했다.
“히아신! 진짜 죽고 싶어!”
“아니! 살고 싶어!”
“미친 새끼!”
쫓고 쫓는 두 형제는 어느덧 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접어들었다. 코르는 그만 놀리고 다음 작전을 생각하려고 할 때였다.
산에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위험을 감지한 히아신이 몸을 옆으로 날렸으나 그 또한 예상된 일이었나 보다. 물보라를 일으킨 파도가 옆으로 비튼 그의 몸을 잡았다. 사해라는 위명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짭짤한 바닷물 냄새가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드디어 잡았다.”
되갚아 주듯이 파도 손아귀로 붙잡은 히아신을 나무에 처박아 버렸다. 등이 아작날 것 같은 통증에 눈이 감겼다. 팔과 다리는 파도에 묶여 있고 등은 커다란 나무에 박혀 있었다. 파도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된 히아신의 앞으로 코르가 걸어왔다.
“땀을 이렇게 흘려 본 게 얼마 만인지.”
그의 손과 발을 묶은 이상 승기는 코르에게 있었다. 이것 때문에 코르와는 상성이 좋지 않다고 한 것이었다. 손에 힘을 줘 봐도 이 무식한 파도는 타격이 없었다. 무엇보다 파도는 눈깔이 없으니 환영이 먹히지 않고.
“자, 형제야. 이제 우리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형도 아니면서 형 노릇을 하려는 코르가 예전부터 싫었었다. 히아신은 탈출을 포기하고 몸에 힘을 뺐다.
“네가 맡은 일이 뭐였지, 히아신?”
“글쎄. 기억이 안 나.”
“그런 것 같더라. 하나도 안 했던걸. 이곳 공주든 왕자든. 너무 멀쩡한 맨정신이던데. 환영으로 그 왕족 것들을 노예로 만들고 정보를 빼 오는 게 네 임무였잖아.”
“응. 그랬었나.”
히아신은 그저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형제로 자라나 그를 속속들이 아는 코르는 주먹을 추켜들었다. 그러자 둥글 뭉쳐진 파도가 히아신의 얼굴을 매섭게 후려갈겼다. 퍽, 소리가 나고 찝찌름한 피 맛이 느껴졌다.
“웃지 마, 히아신.”
“웃긴 걸 어떡해.”
퍽, 자비 없이 반대편 뺨을 때렸다. 골이 울리는 느낌에 그치지 않고 어금니까지 흔들거리는 듯했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사지를 옥죈 파도 손아귀가 그의 턱을 움켰다. 바닷속에 끌려 들어간 기분이었다. 일어선 파도가 그의 숨통을 막고 있었다.
“히아신. 네 그 태평한 성격이 아니었다면 배신했나 생각이 들 정도라고. 아버지가 괜히 감시하라고 나를 보낸 게 아니지. 내가 더 의심하지 않게 아까 그놈은 네가 죽여.”
바닷물이 코와 입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내장을 뒤지는 물고문에 히아신은 참지 못하고 꼬르르 거품을 뱉었다.
“알겠지? 이 철없는 동생아.”
나디사가 보고 싶었다. 얼굴에 뻔히 보이는 상처가 생겼으니 걱정하며 울어 주겠지.
그 생각에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