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나이도 어린 게 당황한 흔적 하나 흘리지 않는다. 그간 마음 앓이가 심했는지 눈이 푹 꺼진 아트리스 메놈은 무표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마침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턱을 악다물고 있던 그의 말문이 트였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정도 연기력으로는 라넌의 눈을 가리지 못했다. 여러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신전에 붙어서 첩자 노릇을 한다만, 다른 것도 아닌 신관 자리를 보장받는다는 이유로 첩자가 된 그에겐 일말의 동정심도 주기 싫었다.
“왜 신전에서 너 같은 말단 군인을 이용하고 있는지 궁금한데.”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몰라?”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아트리스 메놈은 그녀가 주는 마지막 기회를 뻥 차 버렸다. 의리를 지킨답시고 하는 거겠지만 이 상황에선 도리어 역효과였다.
라넌은 이 시답지 않은 문답을 길게 끌고 나갈 생각이 없었다. 증거야 차고 넘쳤지만 그녀는 그를 라드군에서 내쫓을 계획도, 신관이 되도록 응원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 그럼 가 봐.”
본인이 가게 될 곳이 지옥이라는 걸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다. 라넌은 그에게 산지옥이 무언지 알려 주고, 그곳에서 나올 방법은 영영 모르게 할 생각이었다.
상관을 앞에 두고도 자세가 뻣뻣하던 아트리스는 시키지도 않은 인사를 했다. 경직된 표정이 그의 표정을 보니 저대로 두었다간 쪼르르 신전으로 달려가지 싶다.
과연 신전에서 그를 보호해 줄지 의문이었다. 그녀에게 들켰다는 걸 알고서 몰래 죽여 버린다면 또 모를까. 신의 뜻을 전하는 이들이라서 그러한가. 사람을 신의 곁으로 보내는 데에 죄책감도 없는 듯했다.
신전의 끄나풀에게 그런 안락한 죽음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왜 아트리스 메놈이 나디사에게 집착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정확히는 신전이 말이다. 신전에서 왜 나디사 마로닌을 감시하는가.
볼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바삐 걸어가는 아트리스 메놈이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나기 전에 물어봐야 했다.
“아트리스.”
부름에 응답하듯 돌아본 그의 얼굴에는 음울함이 깔려 있었다. 저 잘생기고 작은 머리로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고민이 크겠지. 한편으로는, 아주 작은 마음 한편으로는 그런 그가 안쓰러운 면도 있었다. 이래서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와 배신을 지켜보는 게 어떤 것보다 지치는 일이었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을 무서워해야 하는 시대였다. 그도 그럴싸한 겉모습 안으로 썩어 가고 있는 이 정세에 말려든 것이겠지.
“그거 알고 있나?”
“어떤 것 말씀입니까.”
모든 사람이 정의롭고, 남을 위하는 삶을 사는 건 아니었다. 각자의 신념과 삶이 언제나 시대와 일치할 수 없으니.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남을 공격하고 속이는 걸 자랑스러워할 시대는 오지 않는다. 그를 이해할 수 있으나 용서할 수 없는 이유였다.
“한번 라드군이 된 자는 신관이 될 수 없다는 걸 말이야.”
불로 지져도 입 한번 벙긋 안 할 것 같던 그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다. 숨길 수 없는 당혹스러움을 라넌은 확실히 읽어 냈다. 역시 그는 모르고 있었다. 아니, 이 사실을 아는 사람 자체가 드물긴 했다. 하기야 신관 수련을 하는 이들이 라드군에 관심을 가질 것도 아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니 말이다.
그러므로 어리숙한 청년인 아트리스 메놈이 당한 것이었다. 엊그제 살펴본 그의 기록에 아버지는 없고 낳아 준 어머니만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 쪽이 사툰 종족이었겠지. 그는 사툰과의 혼혈이니 말이다. 무서우리만큼 날카로워진 아트리스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사툰으로, 귀족 집안의 자제로 자라 온 라넌은 가진 것이 없는 자의 슬픔을 모르고 자랐다. 티사 레나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오만한 귀족가의 아가씨처럼 사고하고 판단했고 그것이 정답이라 생각했다.
“신의 뜻을 받들기 위해선 외부의 힘을 들인 적이 없는 깨끗한 몸이어야 해. 라드의 힘을 받았지 않나, 너는.”
라넌은 담백한 어조로 자신이 아는 것을 밝혔다. 다 들켰다는 것에 절망하는 것일까. 아니면 속았다는 것에 절망하는 것일까. 자신은 죽었다 깨어도 신관은 못 되겠다. 지옥으로 들어가는 그의 얼굴을 지켜보는 게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거짓말 아니니까 확인해 봐도 좋아. 그런데 그 확인을 너한테 지시 내린 사람한테 하면 아마 곤란해질걸.”
말을 받아 가 수프를 끓이듯 오래 곱씹던 아트리스가 힘없이 답했다.
“…… 왜 저한테 그런 걸 알려 주십니까.”
진실과 지옥의 기로에 선 그의 눈이 희미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서로 믿음이 없을 만도 했다. 라넌은 입가에 차가운 비소를 띄었다.
“신관은 물 건너갔어. 그러니 너한테 복수를 기회를 주는 거야. 내가 망쳐 줄게, 신전의 계획이 무엇이었든.”
“복수요.”
“왜 나디사 마로닌을 감시하고 있었는가.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거야.”
그것만큼은 말할 수 없다는 듯이 아트리스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라넌은 기다릴 수 있었다. 진실을 알게 된 그는 길들여진 비둘기처럼 그녀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난 언제나 기다리고 있겠어.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트리스는 왔을 때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천막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얻은 게 없다고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그녀는 그저 점잖게 진실을 물고 올 비둘기를 기다리면 됐다.
* * *
바깥이 훤히 내다보이는 2층 탁상에 자리한 히아신은 놀고 있던 펜을 쥐었다. 앉은자리에서 작곡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펜촉을 잉크병에 빠트렸다. 양피지는 준비됐으나 그의 마음은 준비되지 않았다. 그는 집중력이 떠날 때마다 고개를 내밀어 창문 밖을 보았다.
둥근 해가 저물수록 손에서 펜을 굴리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빠른 곡조로 시작한 노래도 기운 잃은 양 끝이 흐물흐물했다.
약속한 여인은 오지 않는데 하늘은 울적한 보랏빛으로 변해 간다. 히아신은 눈을 내려 오늘 하루를 투자한 글이 몇 글자나 되는지 확인해 봤다. 할 일이 없는 그는 여관 근처 잡화점에서 양피지와 펜을 구입했다.
처음엔 그녀를 그려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백 번을 그려도 눈, 코, 입이 삐뚤어졌다. 이따위 못생긴 그림을 도저히 나디사라고 칭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빈 여백을 무엇으로라도 채우고 싶었다. 나디사가 돌아오면, 나디사가 자신의 옆에 있으면, 이것을 읽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첫 번째로 그녀와 하고 싶은 일을 적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첫 시작부터 글은 막히고 있었다. 히아신은 웃을 기분조차 나지 않았다. 저 같은 놈이 그녀를 데리고 하고픈 일이 무얼까 싶다.
펜촉에 눌린 양피지는 글을 대신하여 검은 잉크가 점령하고 있었다. 천천히 펜촉을 뗀 히아신은 의욕 잃은 사람처럼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며 누웠다. 순식간에 퀭해진 그의 눈이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내가 나디사와 하고 싶은 게 뭐지.
모르긴 몰라도 많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아니, 많았을 것이다. 나디사와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들은. 그러나 그것을 글로 쓰려니 손과 머리가 방해했다. 히아신은 빈 여백이 아까워 몸이 달았다.
첫 번째로 나디사와 손을 잡고, 그리고, 걷기, 뛰기, 웃기.
온 힘을 짜내 거기까지 쓴 히아신은 말갛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제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그녀와 그릴 수 있는 앞으로의 나날이 없었다. 그녀에게 무한한 애정을 받기. 정 안되면 그녀의 곁에서 살아 보기. 스스로가 실망스러운 히아신은 들고 있던 펜을 벽에 던져 버렸다.
사 올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건만. 깨끗하게 말려 있던 양피지가 까만 잉크로 얼룩덜룩해졌다. 팔다리가 아래로 축축 늘어진 히아신의 눈은 그 더러워진 양피지만을 보고 있었다.
글을 늦게 배운 탓에 그의 글씨체는 어린아이처럼 삐뚤빼뚤했다. 아마 모르지만 철자도 몇 개 틀렸을 것이다. 그가 바라 마지않는 여자는 저 양피지처럼 깨끗한 인생이었을 텐데. 그가 선물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문장 없이 얼룩덜룩한 잉크뿐이었다. 기껏해야 그녀와 걷고, 뛰고, 웃고 싶어서.
이 더러운 잉크가 곧 자신이 아닐까. 상상력이 없는 그는 자신의 세계로 데려온 그녀에게 무엇을 해 줘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녀를 억지로 껴 두고 그다음에는. 그렇다. 자신에게는 다음이, 그리고 그려 둔 앞날이 없었다.
“다음…….”
거짓말쟁이 나디사 마로닌은 이번 저녁도 거를 생각인가 보다. 이제는 익숙해진 무력함과 분노를 삼키는 찰나 복도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귀가 밝은 히아신은 옆방에서 자고 있던 그리사가 깬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귀찮아.”
당겨 오는 목을 주무르고 있던 히아신의 귀에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즈음이었다.
“응?”
그리사가 미치지 않고서야 다친 몸으로 유리창을 깼을 리 없었다. 불길한 기척을 감지한 히아신은 한쪽으로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는 그의 동작은 유연하면서도 신속했다.
인위적으로 소리를 없앤 듯이 복도는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히아신은 칼 위를 걷는 것처럼 신중히 걸어가 방문 앞에서 멈추었다.
문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신음이 그를 유혹했다. 기꺼이 함정을 택한 히아신은 손가락으로 문을 톡 건드렸다.
“이런.”
열린 문틈으로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한 히아신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오랜만이야, 히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