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함정인 것을 모르냐며 핀잔하던 히아신은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손을 들어 주었다. 말 한마디에 껌뻑 넘어온 걸 아는 나디사의 눈엔 우스운 과정일 뿐이었다. 물론 히아신은 까다로운 감시관처럼 조건 몇 가지를 더 덧붙였다.
마을에서는 무조건 자신과 손을 잡고 다닐 것, 두 번째로 길 안내는 자신이 할 것. 두 가지 다 어렵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조건에 그의 사심이 들어가 있으리란 걸 계산하지 못했다.
그리사의 생사가 달린 중요한 일이었다. 작금의 아슬아슬한 정세가 실감이 된 나디사는 그 시체 위에 그리사의 얼굴을 덧그려 보았다. 누구나 사람이 죽을 거라는 걸 각오하며 살지는 않는다. 한눈파는 동안 전쟁이나 죽음과 같은 말들이 이처럼 가까이에 와 있을 줄은 몰랐다. 천진한 아이인 양 평화를 믿고 있던 자신이 안일했다. 이러한 생각들로 가득해서 그의 사심을 떨쳐 낼 기운이 없기도 했다.
“우리 집 스튜가 이 마을에서 제일 끝내 줘요. 더 안으로 들어가도 아무것도 없다고.”
마을 중심부로 접어들 무렵 가게란 가게는 모두 장사를 끝내고 문을 닫는 중이었다. 시간이 늦어 가판대에 올린 생선을 치워 담는 상인과 여관 문간에 서서 들어오라고 홍보하는 여인. 어른들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은 길가로 쭉 선 나무의 열매를 따려고 깡충깡충 뛰고 있었다.
장대하고 푸른 산에 둘러싸인 성내 마을의 풍경은 전쟁과 가난을 모르는 농촌다웠다. 명화 속 여름의 전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마을이 함정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히아신은 저가 한 말을 싹 잊은 사람처럼 유유히 마을을 거닐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조몰락거리며 손을 잡은 느낌이 덩굴처럼 팔을 타고 올라왔다. 저가 빗자루도 아니면서 닳을 기세로 손바닥을 쓸어 만지기 바빴다. 이대로 두었다간 그리사를 찾기 전에 손이 남아나지 않겠다 싶었다.
“그만 만져대.”
“아까 그 시체 만졌잖아. 독에 당한 건지 아닌지 확인하는 거야.”
“집중해. 그리사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야지.”
아는 얼굴 하나 없는 곳에서 그리사의 행방을 어떻게 아나 싶은 차였다. 사람이 웅성거리며 무리 짓는 소리에 히아신의 고개가 돌아갔다.
두 사람의 라드는 하늘을 날게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꽃집을 이웃으로 둔 여관 마구간에 라드 한 마리가 묶여 있었다. 저 날개 달린 짐승 좀 보라며 사람이 모여든 것이었다.
“잠깐. 저거 그리사의 라드 같은데.”
괜히 함정이란 소리를 해서 사람 애를 닳게 했다.
“그리사가 일부러 저기에 묶어 둔 걸 거야.”
자기는 여관에 묵고 있다고 이런 방식으로 일러두는 것일 터였다. 화색이 돈 나디사는 히아신의 손을 끌고서 그 여관으로 달려갔다. 1층에서 식당을, 2층에서 숙박업을 하는 전형적인 방식의 여관이었다. 들어서자마자 국자를 들고 있는 여관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심드렁하던 그녀의 눈은 두 사람이 입고 있는 군복을 보자 새침하게 바뀌었다.
“드디어 왔구만.”
여관 주인은 다짜고짜 반죽 묻은 본인의 손바닥을 보였다.
“돈. 위에 사람 것까지.”
무례한 태도였으나 그리사가 여기 있다는 확신을 얻은 나디사는 안도의 웃음이 나왔다.
“위층에 저희와 같은 옷을 입은 이가 있습니까?”
“그래요. 피가 철철 나서 의사도 불렀다고. 20은 줘야겠어. 이불값까지 해서.”
“그게 무슨…….”
금액보다 피가 난다는 소식에 질린 그녀를 보고 히아신이 뒷일을 수습했다.
“이 여인하고는 내가 대화할 테니 넌 올라가 봐.”
라드 두 마리와 여관 주인을 그에게 맡겨 두고 다리가 저리도록 뛰어 위층으로 올라갔다. 사람이 얼마 없는 여관이라서 열린 문이 하나뿐이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와 숨이 찬 그녀는 그리사가 놀랄까 싶어 옷매무새를 간단히 정리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피 냄새를 맡고 속이 울렁거렸으나 보이는 광경이 워낙 충격적이라 그딴 건 금세 잊었다. 침대 옆에 놓인 딱딱한 나무 의자는 의사가 사용한 듯했다. 잠든 것처럼 누운 그리사는 가슴과 뺨에 천을 덧대 지혈하고 있었다. 갈아 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천의 한가운데가 벌써 빨간색이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그녀는 의식 없이 누워 있는 그리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계산을 마친 히아신이 느린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서야 그는 망토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히아신은 제집처럼 가벼운 셔츠만을 남겨 두고 번거롭고 무거운 겉옷은 차례차례 벗었다. 그는 망연자실해 있는 그녀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려는 듯이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편히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누가 이랬을까.”
눈이 흐려진 나디사는 안정을 찾지 못해 손톱을 뜯었다.
“누가 이랬건 살아서 다행이네. 얼굴 보니 죽기라도 했으면 엉엉 울었겠다, 우리 공주님.”
비꼬는 투였다면 화라도 났을 터인데 그의 말은 어딘가 씁쓰름했다. 삼십 분이 지나도록 눈을 떼지 못하던 나디사는 그제야 관심을 옆자리에 나눌 수 있었다. 고개를 틀어 벽을 보고 있는 그는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사는 누워 있지, 히아신은 반대편을 보지. 의사도 아닌 그녀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혹시 여관 주인과 이야기하다가 주워들은 게 없나 싶어서 히아신을 보던 차였다.
“히아신.”
“응.”
“나 좀 봐.”
무력하게 앉아 있는 그의 서늘한 눈빛이 식도를 타고 들어왔다. 담이 걸린 것도 아닌데 히아신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벽에 무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집스레 한 점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감정은 아니었다.
“나한테 화났어?”
“응.”
히아신이 이처럼 간 보지 않고 대답한 적은 처음이었다. 맞혀 보라거나 아니면 놀리면서 상대의 화를 부추기거나 하더니만. 저도 모르게 당황하여 그의 손등을 집듯이 만지고 말았다. 반응이 빠른 히아신은 제 손이 잡히자마자 고개를 휙 돌려 주었다. 얼굴을 보여 주는 대가를 받듯이 말이다.
“왜 화가 났는데.”
“나한테 떠나라고 그랬지. 같이 가기 싫다고.”
나디사는 그리사가 듣고 있을까 싶어 잠시 침대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리사는 여태 잠들어 있었다. 신경을 딴 곳에 쓰는 그녀의 행동이 거슬리는 것처럼 히아신의 목소리는 조금 더 낮아졌다.
“자기한테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해서 사람 마음 설레게 하고. 남은 여섯 밤 동안 좋은 기억 준다는 대가로 내 시계도 받아 가고. 그런데 나는 왜 여기서 이 어린애의 간호나 하고 있어야 해. 사기당했어, 나.”
“그럼 아픈 애 두고 우리 둘이 입이라도 맞춰?”
“왜 못 그래.”
눈을 질끈 감은 나디사의 옆으로 차가운 침묵이 깔렸다. 무서운 눈을 하고서 입맞춤을 조르는 히아신 때문에 정신이 아찔했다. 그는 미쳤지만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저녁도 먹기로 했으면서. 나는 네가 데리고 다니는 개만도 못한 것 같지 뭐야.”
오붓한 저녁 식사를 기대했을 히아신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여기서 더 식기 전에 나디사는 입으로나마 위로의 촛불을 켰다.
“그리사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기억에 남을 만한 식사를 하고 어쩌면 너한테 사탕도 사 주고…….”
“사탕?”
약삭빠른 그는 실수로 흘린 말을 놓치지 않았다. 눈을 반짝이며 기대하는 그는 두 얼굴의 사나이 같았다. 실수 한 번으로 불쌍한 그녀는 가진 마음을 홀딱 털리게 생겼지 무언가.
이 고달픈 밤을 보내기 위해 기댈 곳이 필요해졌나 보다.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진심이 걸어 나왔다. 여섯 밤을 기억한 히아신이 내심 기특했는지도.
“어떤 사탕? 무슨 사탕? 왜 나한테 사탕을 줘?”
그의 그물망에 걸려 버린 이상 시시한 말로는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그 시시한 말을 꾸며 낼 만한 능청스러움도 없었고. 결국 파닥파닥 뛰는 싱싱한 진실이 그의 바늘에 걸려서 나왔다.
“어디에서나 파는 거니까. 그리고 너한테 말은 못 했지만 가일이 끝나는 날엔 땅콩이나 호두가 든 사탕을 먹거든. 나중에 언젠가 너도 그 시기에, 그 근처에 사탕 가게가 있으면 한번 들러서 먹게 되지 않겠어.”
그렇게 너도 평범한 삶을 흉내라도 내면서 살아 보기를 바라. 그 말은 끝내 감췄는데도 히아신은 무언가를 짐작한 사람처럼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알맹이 없이 빈 껍데기인 줄 알았던 눈동자에 스산한 감정이 차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차에 태운 것처럼 스쳐 지나간 감정이었지만 그는 그 감정에서 쉬이 빠져나가지 못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 사탕을 먹길 바라?”
“그 사탕을 먹는다고 네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나디사는 본인이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님을 잘 알았다. 그런데도 그의 삶에 무언가를 남겨 줄 수 있다면 아주 따듯하고 사랑스러운 것만을 남겨 주고 싶었다. 그녀가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해 그를 채워 주고 싶었다. 퍼내도 퍼내도 차오르는 이 감정을 지금은 연민이라 믿어야만 했다. 나디사는 줄곧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와 눈길을 섞었다. 그리고는 그만이 들을 수 있게 가만가만 속삭였다.
“언젠가 그 사탕이 다시 먹고 싶어지면, 그리고 그런 삶이 궁금하면.”
아직껏 욕심을 버리지 못한 자신의 꼴이 우스웠다만 후회는 더 이상 갖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을 버리고 나한테 찾아오길 바랄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