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턱 끝까지 차오른 더위가 무색하게 달빛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남자가 설명한 그대로였다. 성내 아랫마을로 들어가기 직전 좁은 통로가 있었다. 라드를 타고 마을에 대뜸 내려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디사는 그 근방에 착지할 참이었다.
먼저 가던 히아신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뒤돌아 눈짓을 보냈다. 평범하게 내려가자고 하면 될 일인데 그의 눈길을 받자마자 나디사는 말문이 닫혔다.
“나디사, 아파?”
“아니야.”
독한 열병에 걸린 것처럼 히아신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암만 생각해도 이건 평범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라드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가슴이 이랬다. 우거진 잡초 같은 마음을 잘라 보려다가 애먼 마음을 베었나 보다. 단호함이나 경멸, 정의로움 같은 것들을. 이런 말랑한 마음으로는 비행에 집중할 수 없었다. 비를 맞아서 근심스럽고 우울한 것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흩어진 정신을 잘 모아 본 나디사는 그에게 내려간다는 신호를 보내고 목줄을 당겼다. 역시나 빠릿하게 알아들은 히아신은 그녀처럼 하강할 준비를 했다. 두 마리의 라드가 내는 바람 소리가 귀로 들어와 도란거렸다. 등에 단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그가 바람을 불어 주는 기분이었다.
잊어야 할 건 자꾸 느는데 마음은 바람으로 키운 불처럼 거세지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 제아무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주인을 망하게 하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달갑지 않은 법이었다.
무사히 착지한 나디사는 땅으로 내려와 사람의 기척을 찾아다녔다. 아래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협소하고 음습하여 라드와 둘이 걷기도 힘들었다. 뒤이어 착지한 히아신은 거침없는 걸음으로 걸어왔다. 비좁은 건 문제가 안 된다는 듯이 히아신은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뒤로 가라고 하지 못한 나디사는 말랑해진 제 마음을 탓했다.
“일 마치면 같이 저녁 먹을까? 저기서.”
노래 부르듯 톡톡 튀는 그의 목소리는 기대와 흥분을 끌고 다녔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불이 꺼지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공주의 성에서 멀지 않은 그곳은 나직한 산으로 에둘러 있어 한적하고 포근해 보였다. 저만한 규모라면 늦은 시간까지 하는 식당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더군다나 너는 이만하면 몸을 사려야 할 시기 아니니. 조만간 네가 도망친 걸 모두가 알게 될 텐데.
머릿속에 촤르르 정답 같은 말이 떠올랐는데 정작 입에서 나오는 건 딴 나라 말이었다.
“시간 봐서, 괜찮으면.”
그리고 스스로 변호하듯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히아신의 마음에 따듯한 기억 한 조각이라도 심어 주겠다고 다짐했다. 이건 그 다짐에 의한 사소하고 별것 아닌 친절에 불과하다. 그러나 같이 저녁을 먹어도 좋겠다는 그 허락이 무어라고. 붙어서 걷던 히아신은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고여 버렸다.
오지 않나 싶어 고개를 돌린 나디사는 한순간 실수로 로마의 목줄을 놓칠 뻔했다. 로마는 자지러진 가슴 때문에 떨리는 그녀의 손을 느꼈을 것이었다. 반응을 알아차린 로마가 코끝을 그녀의 어깨에 문질렀으니 말이다.
“히아신…….”
땅만 바라보는 히아신의 입꼬리가 주책맞게 위를 향했다. 귀 끝은 빨갛고 뺨과 목은 그보다 더한 색깔이었다. 거절에 익숙한 히아신은 그녀의 긍정적인 허락이 기습이라도 되는 듯했다.
“나디사가 나한테 기억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을 때 말이야. 하나도 안 믿었는데.”
나를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싶게 만드는 기억들, 사람들.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히아신이 고작 여섯 밤 만에 그걸 얻을 수 있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그렇게 해 줄 만한 능력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으니. 그런데 저녁을 함께하자는 말이 그의 기억씩이나 될 줄은 몰랐다.
“이러다가 나디사한테 해 달라고 하면 다 해 주는 거 아니야? 저 달도 따 달라고 하고, 달 보면서 입도 맞추어 달라고 하면 다 해 줄 거야?”
히아신이 들떠서 하는 아무 말이겠지.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발끝으로 땅을 톡 치고 있고, 얼굴에 띤 홍조하고, 미소는 질리지도 않는지 자주 그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고. 만일 여기서 그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면 어떻게 될까.
“저녁은 내가 사 줄게.”
“하하. 그건 싫어.”
“우선 가자. 그래야 일을 빨리 끝내고 먹을 수 있지.”
“응!”
그녀가 조금만 더 영악했다면 그를 다룰 수 있었을까. 어쨌든 히아신은 비정상적인 상태이니 말이다. 좋아한다는 말로 꼬여 내면 그 이상한 아버지를 버리고 그녀에게 올지도 모른다. 아닐지도 모르고.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했으니 그 마음이 결코 새털처럼 가볍지는 않을 터였다.
아쉬워서, 더 보고 싶어서, 그의 처지를 이용해 붙잡으려고 하는 건 그녀 쪽이었다. 히아신은 떠나라는 그녀의 말을 잊은 것처럼 살고 있었다. 저런 얼굴로 사람 방심하게 해 두고 어느 날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 버리는 게 아닐까 싶다. 편지 한 장 남기지 않고 떠나갈 히아신을 상상하자 목구멍이 조여 왔다.
“나디사.”
“응.”
팔을 틀어쥐는 손길에 정신이 뜨였다. 옆을 보니 히아신이 꽤 심각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수상한 그림자를 찾아낸 그의 눈이 멀지 않은 앞을 가리켰다.
사람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드러누워 좁은 통로를 막고 있었다. 할 일이 생각난 나디사는 로마의 목줄을 놓고 바쁘게 달려갔다.
“이봐요.”
쓰러진 사람은 총 둘이었다. 이미 숨이 끊어진 것처럼 눈을 뜬 채로 하늘만 보고 있었다. 옆으로 다가온 히아신이 무릎을 굽히고 한 사람의 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맥박이 뛰지 않는지 히아신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핏자국.”
죽은 사람의 눈을 손으로 쓸어 주는 찰나 히아신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점 같은 핏자국이 마을로 이어져 있는 데다가 시체 옆에 익숙한 물건이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 두고 간 듯한 발톱 모양의 배지. 이건 그리사의 것이었다.
“그리사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몰라.”
“아니면 함정일지도.”
배지를 바라보는 히아신의 시선은 한껏 싸늘해져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대놓고 마을로 유인하고 있는 핏자국이 부자연스럽긴 했다.
“사람 둘은 죽여서 마을 입구에 버리고 가고. 라드와 남자 하나를 살려서 데려간 이유가 뭘까. 당연히 함정이지.”
“그러면, 우리를 유인하기 위해서? 누가 그러겠어.”
“그게 누구든 불이 다 켜져 있는 마을로 들어간다는 건 보통 미친놈이 아니라는 거지, 내 말은.”
나디사는 일어서서 함정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마을을 내려다봤다. 그리사를 데려간 사람이 있든, 그리사가 저기에 있든. 그와 한 부대의 동료라면 들어가 봐야 맞는 것이었다. 공주의 영토에서 사람을 죽일 정도의 정신 나간 이들이 그리사라고 가만두었을 리 없었다. 최악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쓴 나디사는 독촉하듯이 말했다.
“그럼 빨리 가 보자. 응?”
“방금 말했는데. 함정이라고.”
“그러면 안 들어가겠다고?”
“응.”
씨알도 안 먹힐 만큼 단호히 말하는 히아신 때문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사가 죽을지 모른다고 하는데도 그는 자기와 상관없는 일인 양 태평했다.
“들어가야 돼, 히아신. 돌아가서 구조 요청하면 너무 늦어. 이 피가 그리사의 피면 어떡하려고.”
“어떡하긴. 다치거나 죽는 거지.”
“왜 그렇게…….”
이것 봐라. 아무리 그녀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그보다 더 위하는 게 있었다. 본색을 드러냈으니 그녀의 앞에서 더는 동료인 척할 필요도 없다. 상처받아 구겨진 얼굴이 그의 눈에 어떻게 보였는지 히아신은 어르고 달래는 어조로 말했다.
“돌아가. 가서 다른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해. 나디사는 착하니까 내 말 들어줄 거지?”
“나는…….”
그에게 상처를 받을 때마다 숨을 곳을 찾듯 움츠러드는 제 모습이 싫었다. 잘근 깨물어 얼타고 있는 혀를 움직였다. 담담함을 흉내 낸 목소리가 바람에 실렸다.
“네가 이렇게 피를 흘렸어도 찾으러 들어갔을 거야. 너도…….”
설득이 통하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던 히아신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디사는 그에게 가진 원색의 감정을 한 단어로 정리했다.
“소중한 사람이니까, 나한테.”
머리털 나고 너처럼 나쁜 사람은 처음 보았다만. 너처럼 나를 아프게 하고 울고 싶게 만든 사람도 처음이니까.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은 그의 입술을 무력하게 했다. 대꾸하지 못하고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가도 되지?”
이미 답은 나왔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