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외골수 같은 면이 있지만 히아신은 단순하고 야단스럽지 않은 남자였다. 기분 좋은 만큼 발이 빨라지는 그를 보며 든 생각이었다. 속이 미로처럼 복잡한 나머지 그 안에 든 진심을 모르겠다고 했건만. 오늘의 히아신은 벌거벗은 양 속마음이 훤히 보였다.
“그래서 내가 머리를 반쯤 깎아 두었더니 아침에 일어나서 기절하는 것 있지?”
“그랬어.”
“그리고 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삼 일 밤낮을 얻어맞았어. 걔한테 시킬 일이 있었는데 기절시켜 버렸다고.”
“…… 응.”
나디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뺨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티 없이 맑기만 한 히아신은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몇 발자국만 더 가면 숲길이 끝나는 지점임에도 히아신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이야기 대부분이 그녀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그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즈음 빗줄기가 굵어지는 통에 두 사람 모두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늘에 싸인 그의 얼굴은 어둑했지만 눈빛과 목소리만큼은 햇살 못지않았다.
나디사가 참아 주기 힘든 건 그의 수다스러움이 아니었다. 바로 밝은 그의 목소리가 숨기려 들고 있는 이야기의 어두운 면이었다. 그녀가 자란 샤포드에도 못된 어른이 있고, 손가락질받을 만한 부모는 많았으나 그것과 히아신의 경우는 커다란 차이가 났다.
그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물정 모르는 고아들을 모아서 키웠는지 알 만했다. 그의 형제라는 사람들과도 유대 관계는 없다시피 한 것 같고. 그 어린 소년이 하루 종일 한 것이라고는 신체 단련과 훈련이라는 이름의 고문들. 생일에는 무얼 했냐고 물었더니 그나마도 하루 쉬게 해 주는 것이 전부란다. 그런 사람 밑에서 자라난 탓에 히아신은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구분할 줄 앎에도 포기하게 된 걸까.
히아신은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 모든 게 꽤나 재밌었고 좋았다고 말했다. 형제자매들과 죽도록 싸우고 복수에 불타는 일이 슬플 게 무어냐고.
그가 가지지 못한 슬픔과 연민은 그녀의 몫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따듯한 어른이, 환영받는 집이, 달콤한 케이크가 없었다.
“나디사는 어땠어?”
“응?”
“나도 궁금해, 말해 줘.”
휴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수비타 왕국에서는 가을걷이를 끝내면 다 같이 휴식기에 접어들곤 한다. 그날이 오면 집에서는 살 오른 닭이나 오리를 잡아서 장작에 구워 먹고, 아이들은 마을 어른들이 며칠 전에 미리 만들어 둔 달콤한 땅콩사탕을 얻어먹었다. 나디사의 집도 전 국민이 맞이하는 그 평범한 휴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너 나 할 것 없이 끈적한 땅콩사탕을 나누어 먹다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고생고생한 기억이 있었다. 사실 말이 사탕이지 간식 가게에서 파는 둥그런 알사탕 같은 건 엄두도 못 냈다. 가난한 농민의 사탕은 여러 값싼 견과류와 꿀을 그릇에 넣고 마구 비벼 낸 것이었다.
그래도 그걸 난롯가에 앉아 나누어 먹으면 겨울이 오는 게 무섭지 않았다. 마로닌 부인이 만들어 준 사탕의 맛이 그리워진 나디사는 그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려고 했다. 기대하고 있는 듯이 동실 뜬 그의 눈을 보기 전까진.
“어땠는데, 나디사.”
평범한 삶을 모르는 그의 두 눈에 대고 땅콩사탕이니, 통닭구이니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기만이 아니던가. 그를 알수록, 그를 이해할수록 하고픈 말들이 많아지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말들이 많아졌다.
“별것 없었어.”
“그래? 엄청 기대했는데. 나디사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지. 어린 시절 얼굴을 그림으로 봐 뒀어도 상상이 안 돼. 나는 상상력이 거의 없거든.”
“남들하고 다 똑같지.”
“어떻게 똑같은데?”
“거의 다 왔다.”
말머리를 돌린 나디사의 눈길이 땅에 닿았다. 빗물에 떨어진 나뭇잎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는 바닥 모양이 그녀의 마음 같았다. 한시라도 좋으니 아무 걱정 없이 지내고팠다. 해가 저물 차에 두 사람은 빗물을 털며 숲 바깥으로 나왔다. 합류하기로 한 장소에는 수레를 끌고 있는 남자 한 명이 있었다. 그리사가 보이지 않아 의아하다 싶었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울음소리가 들렸다.
-끄아으으
-아아아악
“이놈들이! 가만히 좀 있어!”
남자가 드러누운 자세로 끌어당기고 있는 건 로마와 디디였다. 마구간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 웬 낯선 남자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로마!”
다가오는 그녀를 알아본 로마가 목을 치켜들고 꼬리를 휘둘렀다. 낑낑 우는 아이들을 무식하게 끌고 오는 걸 보니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뭐 하는 짓입니까.”
“아, 그게…….”
“로마.”
울고 있는 로마나 디디의 등이 다른 때보다 번들거렸다. 로마는 투정 부리듯 쿵, 쿵, 소리를 내며 나디사 옆으로 달려왔다. 그새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가타부타 설명 없이 뒤로 물러나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뭡니까.”
“저, 그, 데려오라는 명이 있어서.”
“이러다가 큰일 났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당신이 다치기라도 하면 이 애들은 처분 감일지도 모른다고요.”
“저도, 저도 명령을……. 악!”
얌전히 따라온 줄 알았던 히아신이 어느새 남자의 뒤쪽에 가 있었다. 한 손으로 소란 떠는 남자의 뒷목을 콱 잡아 올렸다.
“컥…….”
“묻잖아. 어떤 명령이냐고.”
히아신의 돌발 행동을 본 나디사는 침착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이 커지기 전에 나디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히아신. 그만해.”
히아신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손을 놓았다. 풀려나자마자 한참을 기침해대던 남자는 새빨간 얼굴로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저희 중에, 그, 순찰을 나갔던 사람들이 있는데, 돌아오지를 않아서…….”
“그래서요.”
“라드군에게, 부탁하려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찾으면 더 빨리 찾을 테니까요. 그래서 한 분은 먼저, 찾으러 떠나셨구요. 다른 분들도 라드가, 필요하다고 해서, 저희가 꺼내 온 것이구요.”
어지간히도 아팠는지 남자는 말을 뱉는 순간마다 히아신을 힐끔댔다. 여름의 절정에서 끝물로 가는 날에는 비가 심술부리듯이 왔다. 요즘이 그 기간의 시작인지 비가 멋대로 내리고 개는 날이 늘고 있었다.
“히아신, 이리 와.”
“응.”
오라는 말에 함박웃음을 짓고 달려온 히아신이 후드를 휙 벗었다. 몇 초도 안 돼 머리가 젖어 버린 히아신은 본인이 이러는 이유를 말해 주었다.
“비 맞으니까 머리가 시원해져서 좋아.”
“……감기 걸릴 텐데. 몸도 안 좋잖아.”
“열 내리려고 이러는 거야. 그런데 왜? 우리도 출발해?”
히아신의 수레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노루 두 마리와 토끼 한 마리를 실은 수레. 필시 그리사의 수레일 것이다. 순찰병들의 부탁을 듣고 그리사는 기다림 없이 먼저 출발한 거겠지.
“우리도 가야지. 저기, 방향 좀 알려 주세요.”
주인의 손길을 받고 안정을 찾은 로마였지만 자기를 강제로 끌고 온 남자가 다가오자 이를 드러냈다. 빗소리로 숨길 수 없는 낮은 울부짖음에 남자는 더 다가오지 못했다.
“서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마을과 이어지는 땅길 쪽에서 사람들이 다쳤다는 소식이 있어서요. 그쪽으로 갔습니다.”
“알겠습니다.”
사정을 들어 보면 남자에게 큰 잘못은 없는 듯했다. 되레 막무가내인 히아신에게 목을 잡혀 죽을 뻔하질 않았던가.
로마의 등에 올라탄 나디사는 때를 늦추지 않게끔 바로 올라갔다. 후드가 뒤로 넘어가고 비가 후드득 귓불을 때렸다. 세찬 바람 소리가 들려 옆을 보니 히아신이 빠르게 따라오고 있었다.
“나 왔어, 나디사.”
앞으로 그와 이렇게 비행할 날이 또 있을까. 로마는 디디를 동료라고 인식하는 것인지 적당한 높이에 올라오자마자 그를 기다렸다.
“기다렸어?”
“로마가.”
같은 위치에 도달한 디디를 만나고 로마가 즐거운 콧소리를 냈다.
“나디사, 봐 봐.”
“뭐를.”
“얘네 연애하나 봐.”
“하.”
라드끼리 친해져서 목을 비비적대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호작용이 신기한지 히아신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나디사는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서쪽 방향으로 목을 돌렸다. 그러나 옆으로 붙은 히아신은 이 장난을 끝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디사.”
“집중해. 지금은 그리사부터 찾아야 하잖아.”
“나 다음에 태어나고 싶은 게 생겼어.”
후드득 빗발치는 빗물이 벌어진 입 속으로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푹 젖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의 콧잔등을 지나는 빗방울이 꼭 눈물처럼 보였다. 눈이 이상한 게 분명했다. 그는 보기 좋게 활짝 웃고 있는데 말이다.
“나 다음에는 나디사의 라드로 태어날래.”
“…… 왜?”
자유로움을 만끽하듯 양팔을 벌려 바람을 느낀다. 히아신은 라드들이 내는 바람 소리를 따라가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자유롭게 날 수도 있고. 어디든 갈 수도 있고.”
눈을 감아 버린 그였지만 비행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나디사의 눈길은 한 시도 쉬질 못했다.
“누가 데려가면 나디사가 엄청 화내 주고, 걔만 보면 예쁘게 웃어 주잖아. 아무래도 라드가 좋은 것 같아. 드디어 결정했어.”
그러고는 저를 보면서 걱정 없는 사람처럼 씨익 웃었다.
“내 재미없는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들어 줘서 고마워.”
히아신은 그녀보다 앞서서 날았다. 누가 빨리 가는지 내기하자며 달려가는 그가 멀리멀리 도망치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의 병이 옮았는지 마음을 파먹는 벌레가 사는가 보다.
그럴 일 없지만 섬뜩한 착각도 들었다. 히아신이 이별 인사를 한 것 같다는 착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