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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14화 (114/210)

114화

그녀도 잠이 들었는지 살이 오른 것처럼 눈두덩이가 부었다. 자고 일어나면 항상 그런 모양이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게 몹시 귀엽다고 생각했다. 잠을 자면 어김없이 눈이 붓는 여자라니. 야릇한 생각이 안 들 수 없었다. 밤새 괴롭혀서 눈두덩이를 더 붓게 만들고 싶다든가.

“나는 괜찮아, 나디사.”

“땀을 많이 흘렸어. 그래도 문장들은 많이 숨겨졌다.”

그 애송이 신관이 위장술을 풀어 버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체력을 회복하자 위장술이 재발했지만 예전 같은 위력은 나오지 않았다. 갑갑한 목 단추를 잠가야 할 판이었다. 그 신관, 짜증 나게도 촉이 좋지 무언가. 나디사는 목이 간당간당한 상황임에도 웃고 있는 그가 신기한 듯했다. 그럼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는데 얼굴을 찡그릴까. 하여간 낭만을 모르는 여자였다.

“이제 곧 아침이네.”

긴긴 여름 햇볕이 천막 안으로 새어들었다. 아침이 오면 그녀는 더 이상 다정하지 않을 테니 저기 떠오르는 해를 붙잡고 싶었다. 무의식중에 그녀에게 달라붙었나 보다. 다정한 손길로 일어선 그의 머리를 누르듯 쓰다듬었다.

“그래도 열은 내려서 다행이다.”

“안 다행이야.”

“왜.”

“다 나은 나는 너의 다정함을 요구할 수 없어졌어.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이지.”

그녀가 누구를 닮았는지 생각해 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그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내어 준 그 노인이었다. 만약 자신이 그 노인 밑에서 자라났다면 어땠을까. 하얀 눈가루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봄이 있고 겨울이 있는 땅에서 자라난 이곳 사람들처럼. 추워서 얼어 죽겠다 싶다가도 봄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고 떠드는 사람들처럼.

히아신은 겨우내 단장하고 봄이 되어 피어난 이곳의 사람들을 질투했다. 한결같이 버려진 겨울에 머물러 있는 자신과 비교됐다.

“히아신.”

잠에서 덜 깬 척하려고 대답을 피했다. 나디사는 굳은살 박인 손바닥을 그에게 내보였다. 뜻을 알 수 없는 히아신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줄 수 있어.”

“어떤 것을? 그래. 그게 뭔지 몰라도 줄게.”

“네 시계.”

선물해 준 금색 시계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낡아 빠진 은색 시계를 달라는 것일 터였다. 미소를 머금었던 히아신의 눈이 대번 어두워졌다.

“그건 왜?”

“너를 기억할 물건이 하나도 없어서.”

“왜 살아서는 다시 못 볼 것처럼 얘기해?”

시계를 주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죽지 않는 이상 만나겠냐는 그 말의 의도가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매 순간 숙련된 정원사처럼 마음을 다듬어봤자 봄을 모르는 그는 한순간에 얼어 버리고 만다. 분위기 깨는 말이 나가려는 찰나 나디사가 영문 없이 웃었다. 나오던 말도 막는 대단한 여자였다.

“히아신. 나는 샤포드에서 자라나 아는 게 별로 없어. 네가 무슨 마음을 먹고 그런 말들을 하는지도, 네 가족이 왜 그런 일을 계획하는 건지도 몰라. 나는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이곳에 온 사람이야.”

“그래서.”

“내 생각엔 너는 나를 사랑하기보다 살고 싶어 해. 네 종족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아니까. 하필 그게 나라서 너도 노력을 해 보는 거겠지. 원래라면 나도 배신했을 거였는데.”

그도 그녀와 똑같이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나디사가 그의 운명만 아니었더라도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지 않았을 텐데. 보다 확실하게 배신하고 떠났을 텐데.

“위선이라고 해도 좋아. 나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나도 그렇다. 히아신은 속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천막 안으로 해가 드는 것도 아닌데 그녀의 홀쭉한 뺨 부근에서 빛이 났다. 저게 말로만 듣던 여름 볕인가 싶어 그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니 너는 너희 사람들이 길었던 길과 정반대의 길을 가.”

“정반대의 길.”

“나를 강물처럼 흘려보내. 운명이라는 건 전부 누군가가 지어낸 거라고 믿어.”

최후의 해벗 종족도 신을 놓칠 위기에 처했다. 그럼 그렇지, 그의 신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저 다정한 눈동자에 속고픈 히아신은 그녀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변덕스러운 여름에 그를 버리기로 결심한 나디사는 아름답고 눈부실 뿐이었다.

“너희 종족의 해답은 신의 사랑에 달려 있지 않아. 나는 신이 아니거든.”

“기대를 무너뜨려 미안하지만 신이 아닐 리 없어.”

“그렇다고 배워서 그렇지. 나는 평범한 여자야. 그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이 세상 누구도 신이라는 이름을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여자란다. 신이 아닌 여자. 히아신은 글을 배우는 아이처럼 그녀의 말을 속에서 따라 외웠다. 한 자라도 놓치면 자신의 손해 같았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보고 자랐지만. 그렇게 되고 싶진 않잖아.”

꺼슬꺼슬한 그녀의 손이 그의 눈을 감쌌다. 어둠 속에 빠졌지만 히아신은 반대로 구원받은 양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이 말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 말에 감춰진 다정함이 좋았다.

“누구도 하지 않은 선택을 해. 그러면 너는 신 없이도 살 수 있을 거야.”

“음……. 그래도 자유롭지 않다면 어떡하려고. 내가 찾아와서 엄청 화낼 수도 있어, 나디사.”

그녀가 덮어 주던 손을 치웠다. 눈을 가린 이유가 저를 똑바로 보지 않기 위함이었구나. 속눈썹 끝에 달린 눈물과 다르게 그녀의 눈은 매우 냉철했다.

“히아신. 너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운명 같은 걸 우습게 여겼잖아. 남의 손을 빌려서라도 죽이고 싶어 했잖아. 그게 진짜 너야. 돌아갈 수 있어.”

“글쎄, 나디사. 넌 내가 아니어서 이 감정이 무언지 몰라.”

“너도 내가 아니니까. 내가 이 말을 무슨 감정으로 뱉는지 모르잖아.”

이상했다. 이 운명에 의하자면 보잘것없는 저에 비해 그녀는 고귀하고 잘난 신이 아니던가. 그래서 오기로라도 짓밟고 가져보고 싶었다. 이런 생각들이 버거운 히아신은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볼을 폭 찔렀다. 속을 알 수 없는 이 여자가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경외심이 지고 사랑스러움이 피어올랐다. 신의 껍데기를 벗고 나타난 그녀는 지독하리만큼 사랑스러웠다.

“여자라는 게 이리도 예쁜 거였나.”

그의 진심을 늘 장난으로 분류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데도 이 둔한 여자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점마저 사랑스러웠다.

“맞아. 나보고 떠나라고 그랬지, 나디사.”

“이제 여섯 밤 남았어.”

“세고 있었어? 너무하네.”

“너는 네가 꿈꾸는 세상으로 가야지. 나도 그런 너로부터 내 세상을 지키고.”

히아신은 심장 근처에 손을 올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 소용없겠지. 울어봤자 그녀는 믿어 주지 않을 터였다.

“예전에는 싫어하는 걸 빨리 잊는 방법을 알았거든, 나디사?”

“그래.”

“그런데 지금은 좋아하는 걸 잊지 못하겠어. 그런 방법은 몰라. 나디사 말이 맞아. 나는 살아남은 최후의 해벗 종족이 되고 싶지만, 그 사람들이 그랬듯이 너를 흘려보내고 나아가는 걸 모르겠다고.”

설령 이 모든 게 그녀가 자신을 떼어내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히아신은 그녀에게 답을 구했다. 남들이 좋아서 목숨 거는 걸 떠올려도 나디사만 못했다. 그러니 나디사가 말하는 누구도 하지 않은 방법, 그녀를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 같은 건 남한테서 구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목각 인형에 환영 같은 겨울뿐인 자신한테서도.

“알려 줘. 그것도 알려 주고 나아가라고 해.”

“애석하지만 나도 몰라.”

“그러면…….”

“그래도 하나 아는 건. 나를 일어서게 하고 더 나아지게 만들고 싶은 사람들과 기억이 있어. 나는 그걸 떠올려.”

“거기에 나도 있어?”

아닌 걸 알지만 기대를 갖고 물었다. 야속한 나디사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해 주지 않는다. 히아신은 문득 여섯 밤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짚어 봤다. 그는 항시 아버지의 계획에 맞추어서 움직였지, 저 스스로 무언가를 계획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여섯 밤이었다. 그녀가 그걸 정해 준 순간 히아신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나날들이 그려졌다.

“나는 한 번도 따듯한 건 못 얻어 봤어. 나를 나아지게 만들고 싶은 사람하고 기억 같은 건 몰라.”

“……그럼 싫다는 거야?”

히아신은 고개를 젓는 척하며 그녀의 허벅지에 머리를 눌렀다. 언젠가는 이런 것도 그를 나아가게 만드는 기억이 될까. 그녀의 말은 기든 아니든 그에게 영향력이 컸다. 이게 자신의 전부가 되면 어쩌나 싶다. 그도 그녀와 같이 무르고 어려운 선택만 하고 살 것 같았다.

“여섯 밤 남았다고 했잖아. 그동안 만들어 줘. 그게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면 나디사가 말한 대로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히아신은 고개를 돌려 매일 같은 자리에 있는 낡은 시계를 찾았다. 이걸 누군가에게 줄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어머니의 유품이자 그의 족쇄. 히아신은 미련 없이 그녀에게 그걸 넘겨주었다.

“이것도 줄 테니까. 응?”

그는 희망같이 의심스럽고 희미한 걸 키우지 않았다. 열에 아홉, 아니, 열에 열, 나디사가 말한 대로 되지 않을 터다. 이놈의 핏줄이 그리 편안한 여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가 말하니까, 밀치고 움키는 대신 나아가라고 하니까. 건네는 히아신의 손 위로 환영 같은 햇살이 내려앉았다. 새벽이 물러가 아침이 되는 그 찰나에 나디사는 시계를 받아 갔다.

선물이 아님에도 퍽 대단한 걸 주는 기분이 들었다. 또 그녀가 무언가를 원했으면 좋겠다. 언젠가 그녀가 바라는 걸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마음은 그가 가진 가장 순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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