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신관이 본인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소리를 하고 있으면서도 저리 근심 없을 수 있다니. 나디사는 들키는 문제에 관해선 마음을 놓고 있던 차였다. 란이 그 정도로 뛰어난 신관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날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한 란을 보며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그 자리에 히아신이 있었다는 것까지 알려진다면 상황이 꽤나 복잡해지니 말이다.
“원래 그것들이 감이 좋아.”
“아무리 감이 좋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그러면 더 위험한 거잖아.”
“괜찮아. 내가 더 위험해.”
“농담 말고. 너는 이런 상황에도 농담이 나오니.”
걱정을 단칼에 자른 히아신은 몸의 방향을 바꿨다. 걱정 중이라 무엇이 다가오는지도 몰랐던 나디사는 무거운 것에 눌리고 나서야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새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히아신이 동면하는 뱀처럼 몸을 말고 있었다. 손을 대자 우들우들 떨고 있는 그의 몸이 느껴졌다.
“……아직도 아파?”
“응…….”
“어떤 식으로.”
“따듯하고 기분 좋고 말랑한 게 나를 막 찌르고 있어. 수비교와 파르난은 상극이라서 서로의 힘을 실어 넣으면 이렇게 부작용이 일거든. 머리도 좋아…….”
상대를 칭찬할 여유가 남아 다행이라고 할지. 속도 좋은 히아신은 그녀의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적대다가 잠이 들었다. 나디사 또한 미소가 그려진 그의 얼굴이 갈수록 흐릿하게 보였다. 고른 숨소리가 자장가 같았다. 그녀의 고개도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천막 안에 사는 두 사람의 숨소리가 작고 조화로운 합주를 만들어 낸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디사는 히아신에게, 히아신은 나디사에게 의지한 채로 누웠다. 그러다가 중간에 깨어난 히아신이 그녀를 안아 들어 제 품으로 데려갔다. 왼팔을 베게 삼아 내어 주고 대가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히아신은 마침내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 * *
수비타 왕국의 국민들은 대부분이 모태 신앙으로 특정한 날마다 가까운 신전을 방문하는 게 관례였다. 수비교의 신전은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고아를 돌보고 가뭄이 들 때마다 왕실보다 먼저 창고를 개방했다. 황금빛의 아름다운 신관들이 말하는 죽은 후의 세계란 그리하여 완벽하고 믿을 만한 것이었다.
히아신도 수비타의 국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신전에 다닌 그는 책에서 배운 대로 신들이 사는 세계를 상상했다. 봄이 계속되는 땅은 하찮은 고아일지라도 사랑받으며 굶지 않는다. 그게 히아신이 언젠가 가게 될 곳이었다.
‘히아신. 오늘은 너한테만 특별한 선물을 줄게.’
‘특별한 선물이요?’
어머니가 죽고 나서 신전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보내졌지만 소수 종족이라는 이유로 그는 매번 입양자에서 제외되었다.
‘이걸 들고 저기까지 갔다 와 볼래?’
1년간 밝고 예의 바르게 지냈다. 입양이 목적이 아니었다. 어른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그리해야 한다는 걸 어머니로부터 배웠었다.
그런 그를 어떤 이는 동정했고, 어떤 이는 아이답지 않다며 싫어했지만. 보고 자란 게 그뿐인 히아신은 굴하지 않았다. 배를 곯지 않고 잠을 잘 수만 있다면 고아 취급이든 뭐든 괜찮았으니까. 정 힘들면 수비교에서 말한 아름다운 세상을 상상하며 살았다.
깨끗하고 선량하고 똑똑한 어른이 되어야지. 그러면 어머니와 달리 그는 운명의 짝이 나타나도 사랑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죽어서도 신의 품에 안길 수 있을 거였다.
‘자, 받아.’
친절하고 다정한 선생은 그에게 하얀 바람개비를 주었다. 고아원 내에서도 풍차를 닮은 바람개비를 받은 아이는 몇 명 없었다.
‘정말 나한테요?’
‘히아신은 착하고 예쁘니까. 저기 멀리까지 뛰어 갔다 와도 괜찮아.’
‘정말요?’
‘그럼.’
너를 기르는 자의 말을 신의 말처럼 따라라.
히아신은 신전에서 배운 내용을 떠올리며 씩씩하게 뛰어갔다. 높이 든 바람개비가 팽그르르 돌아갔다. 언덕을 오르는 게 숨찼지만, 하얀 눈밭을 달리는 게 추웠지만. 달리기를 멈추는 게 선생의 마음을 배신하는 것 같아 히아신은 그러지 않았다. 겨울바람을 만난 바람개비는 잘도 돌았다. 하얀 눈밭 위에 발자국을 꼭꼭 남기며 달렸다. 나중에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면 그 발자국을 보고 따라가야지 싶었다.
‘선생님!’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낡은 코트를 여몄다. 하얀 바람개비를 든 손은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높은 언덕 위에 올라온 히아신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의 눈동자만 빼고 세상이 온통 하얀색이었다. 그가 믿고 있었던 발자국도 눈이 내리는 바람에 모조리 사라졌다.
신은 언제 어디서나 너를 지켜보고 있다.
히아신은 고아원에 와서 배운 말들을 중얼거리며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미끄러운 언덕에서 넘어져도 보고, 조금 굴러도 보고. 손과 발이 얼도록 뛰어서 도착한 언덕 아래에는 다정한 선생도 친구들도 없었다.
‘선생님! 선생님!’
버려진 히아신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수비타 왕국의 겨울은 길고 매서워 사람의 인심을 돌아서게 했다. 들르는 곳마다 웬 거지가 왔냐는 비난을 듣고 다녔다.
배가 고프고 다리가 쑤실 때마다 신에게 올린 그의 기도는 매일매일 똑같았다.
나를 언제나 지켜보고 계시니까, 곧 내가 머물 고아원을 주시겠죠. 나를 돌봐 줄 선생님도 곧 생기겠죠.
히아신은 수비타의 국경까지 걷고 걸었다. 그가 원해서가 아니었다. 이 마을에서 며칠, 저 마을에서 며칠. 잘 지내다가도 눈총을 받기 시작하면 다음 마을로 떠났다. 몇 달이 지나자 갖고 있던 겨울옷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훌쩍 다가온 봄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는 국경선 근처까지 왔다. 타국과 국경이 맞닿은 마을은 다른 지역보다 인심이 야박했다. 봄이 시작되는 이 경사스러운 날에 떠돌이 고아가 온 것이 불길한 모양이었다.
‘일도 잘해요. 사실 뭐든 잘해요.’
‘필요 없어.’
‘진짜예요. 청소도 잘해요.’
지난번 마을에서 어떤 노인에게 이리 말했더니 집으로 데려가 식사와 잠자리를 주었다. 그 노인은 히아신에게 웃는 얼굴이 예쁘니 힘든 일이 있어도 웃고 다니라며 조언해 줬다. 가족들의 반대만 아니었더라면 히아신을 입양하고 싶다면서.
그 경험이 히아신을 살게 했다. 이곳의 인심이 팍팍해서 굶는 날이 허다했지만 아침이 되면 근처 개울가로 가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었다. 어른들에게 잘 보여야 식사도 하는 거였다. 봄이 되어 날이 풀리니 개울물이 차갑지 않아서 좋았다.
‘저리 꺼지라 했지.’
그때와 비슷한 인상의 노인에게 접근했던 게 잘못된 일이었나 보다. 발길질해대며 그의 배를 찼다. 어린 히아신은 배를 부여잡고 웅크렸다.
아프다. 속이 뒤집힐 만큼 아팠다.
마을 아이들이 몰려와 그를 때리거나 성질 나쁜 어른들이 머리를 쥐어박은 적은 있어도 명치에 발을 꽂은 적은 없었다. 그 후로도 몇 대 더 맞았으나 서슬 퍼런 노인을 말리는 자는 없었다.
뺨을 맞은 곳이 부풀어 올라 웃지 못했다. 웃는 게 예쁘다는 걸 알아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그 노인 하나였다. 가지고 다니던 바람개비가 부서졌을 때도 웃어 보였다. 어머니가 죽는 날에도 울지 않았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가슴 속에서 숨어 살았나 보다. 그날 맨땅에 누운 어린 소년은 숨죽여 울었다.
‘잠들면 죽어.’
잠이 드는 히아신의 몸을 안은 이가 있었다. 죽음으로 떨어지기 전에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감히 신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
히아신을 도운 사람은 얼굴도, 손도, 발도 까매서 그가 알던 신과 달랐지만 저를 데려간 순간부터 그에게는 신이 됐다.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라.’
‘아버지요?’
‘그래. 여기 있는 모두가 그렇게 부르지.’
파르난의 땅은 계절이 없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파르난의 문양이 없는 자들의 것이었다. 하지만 신의 축복이 없어진 그 외롭고 척박한 땅이 히아신에게는 고향이었다. 먹을 것은 풍족하진 않지만 굶는 법이 없고 교육을 빙자한 훈련도 마냥 좋았다.
‘아버지!’
아버지는 파르난의 사람이 다 된 히아신을 아껴 특별한 지위를 주었다. 수족처럼 부리는 다섯 명의 아이 중에 그를 넣어 둔 것이다. 그게 기뻐해야 하는 일인지 슬퍼해야 하는 일인지 당시에는 몰랐다. 그저 아들이라고 부르고, 인정해 주고, 그것에만 심취할 뿐이었다.
‘히아신.’
‘네!’
환영에 재능을 보이는 그가 불려간 건 막 어린애의 티를 벗었을 때였다. 그의 아버지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검은 연기, 혹은 검은 안개. 어디에서나 나타나고 어디에서든 그를 지켜본다. 수비교에서 가르쳤던 신과 같았다.
‘이자에게 네가 생각하는 지옥을 보여 봐.’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아버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몸은 상처투성이에 싸울 의지도 없어 보였다. 아버지의 부름이라서 부리나케 달려온 히아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왜요?’
‘싫어?’
‘저는 저 사람을 모르는데.’
‘히아신.’
마혼과의 계약. 그 의미를 먹이고 재워 주는 것으로 안 그가 달라진 날이었다. 단순한 문신으로 취급했던 글자들이 빨갛게 타올랐다. 어디서 장작 타는 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저의 살이 익고 있었다. 산 채로 허물이 벗겨지는 고통도 모자라 말을 하려고 하면 불길이 목구멍을 지졌다.
‘해.’
살기 위해 저절로 남자에게 손이 뻗어졌다.
‘생각이라는 걸 하지 마라.’
남자의 흰자가 뻘겋게 충혈되며 환영 속으로 들어갔다.
‘스스로 판단이라는 걸 내리지 마라.’
‘아…….’
‘너는 내 것이야.’
다 자라지 못한 뼈를 으스러트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히아신은 그 말들을 잊을 수 없었다.
“히아신.”
그는 여러 번 종교를 옮겼다. 어머니에서, 수비교에서, 마혼이라는 아버지에게서. 그리고 이 여자에게로.
“괜찮아?”
이 여자는 그가 아는 어떤 신보다도 상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