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간단히 통성명하는 것치고 공기가 탁하고 무거웠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놓은 것이 불만이던 히아신은 성의 없이 고개를 까닥였다.
“히아신 아스라고 합니다.”
“히아신 아스.”
인사를 주고받는 두 남자의 시선이 자못 날카로웠다. 란의 수행을 맡은 어린 신관은 끼어들 틈을 잡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나디사 또한 새삼 히아신을 관찰하는 란의 시선에 불안함을 느꼈다. 불편한 침묵이 계속되자 지켜보던 록이 말문을 열었다.
“무슨 문제 있니, 란?”
“아니요, 아버지.”
록의 걱정을 읽은 란은 요사스러운 미소 뒤에 본심을 감추었다.
“제가 안내해 주고 오겠어요. 어디인지도 알고 있고.”
“아, 네가?”
그는 천막을 손수 들치며 제 뜻에 따라 나올 것을 강요했다. 란의 심술 맞은 심성을 아는 나디사는 이번엔 또 어떤 장난을 준비했을까 싶었다.
록도 그러한 란의 친절이 믿기지 않는지 떠나는 그들의 등에 대고 한마디를 했다.
“그런 건 이 아이들이 하게 내버려 두지.”
“제가 하고 싶어서요. 저번에 제가 한 말도 기억하시죠?”
란이 무슨 말을 한지 모르겠으나 그 말에 록이 수긍하는 것을 보면 사전에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란은 아까의 날카로움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상냥하게 배웅하려고 들었다.
록도 막아 줄 리는 없는 것 같고. 나디사는 하는 수 없이 록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천막을 나섰다.
기다리던 란은 히아신까지 천막을 빠져나오자 사람들을 피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 느린 걸음은 누구 하나 자신의 옆으로 오기를 기다리는 걸음이었다.
나디사는 티 나지 않게 란의 근처에서 걸었다. 란은 천막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나서야 나디사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심술 같은 건 각오했다. 두 얼굴의 사나이인 란은 틀림없이 독한 말을 준비했을 터였다. 록을 따르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으니 언젠간 마주치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이토록 빠를 줄 몰랐을 뿐이었다.
“저번 일은.”
그런데 란의 눈빛이 예전처럼 독하지 않았다. 잘생긴 입술만 물어뜯던 란은 짐을 실은 수레를 피하는 척 그녀의 옆에 섰다.
짐꾼들의 외침과 천막 앞을 지나는 말발굽 소리 때문에 시끄러웠지만 그렇다고 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내 성격이 더러운 건 인정해.”
“네?”
“네가 질투 나는 것을 어쩌라고.”
히아신은 때를 놓치고 수레 무리에 걸려 그들의 옆으로 건너오지 못했다. 뒤떨어져 있는 그를 째려본 란은 이해가 늦은 나디사의 표정을 보고 혀를 찼다. 눈가가 빨개진 것으로 보아 그도 이런 말을 하는 게 무척 쑥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내 감정이 과했어. 지난 몇 년간 독차지해 오던 애정이 분산되니까 어린애처럼 치졸하게 굴었어.”
죽어도 미안하다는 소리는 하지 않지만 이게 그의 최선이라는 걸 나디사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란에게 엎드려 절 받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가 더는 귀찮게 굴 생각이 없으면 그걸로 됐다. 나디사는 그를 더 수치스럽게 하지 않고 이쯤에서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록 님과 깊은 사이였던 것은 압니다. 저에게 심하게 구셨던 것은 맞지만 이리 사과하시니 받겠습니다.”
마지막에 소심한 복수를 섞긴 했다. 그 의도를 모르지 않는 란은 작게 씨근거렸지만 본인이 한 말을 취소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간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 오만하던 신관이 토끼처럼 온순해졌는지 궁금했다. 자신을 괴롭히는 데에 사력을 다하던 란이 아니었던가. 그나마 사과 비슷한 걸 하자 조금은 이 자리가 편해졌다.
할 말이 떨어진 란은 빠르게 앞서서 걸었다. 나디사가 따라오지 못할 정도가 되면 알아서 걸음을 늦추기도 하면서.
어느새 나란히 걷는 게 자연스러워질 즈음 란은 뒤에 있는 히아신을 흘긋 바라봤다. 수레 행렬이 끝나고 이쪽으로 건너온 히아신이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시만.”
히아신을 바라보는 싸늘한 눈빛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 시선에도 기죽지 않은 히아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디사 경과 둘이 할 얘기가 있어서. 잠시 뒤에 있어 주겠어?”
그런 란을 빤히 바라본 히아신은 고민 없이 즉각 대답했다.
“싫은데요.”
“싫어?”
어처구니없어하는 란의 목소리를 듣고 나디사는 다급히 히아신에게 말을 걸었다.
“히아신.”
“응?”
“잠시만 따로 있어.”
“응.”
윗사람의 의견을 듣듯 구는 히아신 때문에 란은 코웃음이 나왔다. 일이 커지기 전에 수습했으나 저 속 좁은 신관은 이 무례를 잊지 않을 터였다. 조만간 히아신은 이곳을 떠나서 다행이려나.
그가 간다는 사실이 가슴을 쿡 쑤셔도 나디사는 의연하게 서 있었다. 히아신은 그녀의 말을 존중해 주는 것처럼 두 사람이 앞서서 갈 때까지 얌전히 대기했다.
히아신에게서 눈빛을 거둔 란은 새빨간 천막이 있는 부근으로 걸어가며 말을 다시 시작했다.
“데려다주겠다고 한 건 그것 말고도 할 말이 더 있어서야.”
어둑한 밤이 표정을 가려 줘서 다행이었다. 하나둘 횃불을 켜기 시작하는 사람들 옆을 서둘러 지나친 나디사는 수시로 히아신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자 고개를 돌렸다.
“저자와 연인이라도 돼?”
눈을 뗀 사이 사고를 칠까 봐 걱정했던 것이었다. 란은 저 남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니 하는 소리였다. 나디사는 이제 익숙해진 오해를 들으며 표정을 굳혔다.
“아닙니다.”
“저자의 눈빛은 그게 아니던데.”
나디사는 새로운 시비인가 싶어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란은 그 눈빛을 보고 찔리는 게 있는지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한 아담한 천막 앞에서 란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는 이걸 쓰라며 무심히 턱짓했다.
“여기를 써. 아마 한 명 더 쓰게 될 거야. 지금 인원에 비해 천막 수가 모자라서. 남자들은 저쪽 천막을 쓰면 되고. 아, 감사해. 이것도 신전에서 가져온 거니까.”
“감사합니다.”
히아신은 그녀의 말을 아주 잘 듣는 것처럼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고 있었다. 횃불 옆에 서 있는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진 것을 보고 나디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란은 아직 할 말이 더 남은 것처럼 떠나지 않았다. 여러모로 지친 상태인 나디사는 무례인 줄 알면서도 그에게 물었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란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든 그와 각별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란도 그럴 것이었다. 굳이 그녀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은 란은 별이 총총히 뜨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봤다.
“내가 저번에 했던 말 있잖아.”
“어떤 말을 말하시는 건지.”
“너희를 괴롭힌 게 꼭 너 때문은 아니라고.”
그 뙤약볕 쏟아지던 날에 진주를 찾아 달라던 일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왜 또 그날의 기억을 꺼내나 싶더니 란이 비밀을 나누듯 목소리를 낮췄다. 무더운 여름밤은 그의 목소리를 더욱 끈적하게 들리게끔 했다.
“그 남자. 네 수장 말이야.”
저번에 아트리스를 걸고넘어진 걸로는 부족했는지 오늘도 그 이야기였다. 나디사는 란이 또 심술을 부리는 것인가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었다.
“첫 번째 신관이 부리는 사람 같아.”
“네?”
나디사는 조금 웃고 말았다. 그다운 심술을 부리는 게 나았다. 이번엔 이간질을 하려고 드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는 믿지 않고 있는 나디사의 심정을 알듯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실이야. 너에게 주는 내 선물이라고.”
“아트리스가 그럴 이유가 뭐가 있죠.”
“이봐. 첫 번째 신관인 랍은 지금 이 사태를 만든 주범이야. 권력도 있고 신전 살림을 쥐고 있어서 돈도 많지. 그런 이가 이유 하나 못 만들겠어?”
란은 그럼에도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나디사의 눈을 마주 보았다. 시선이 오가는 동안 나디사는 슬금슬금 치미는 불길함에 주먹을 쥐었다. 이게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으나 란의 눈빛은 정직했다.
“내가 신뢰가 없는 건 알겠지만 이건 정말 나디사 경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니 받아 둬. 너무 믿지 말라는 거야. 그 이유까지 알아다가 너에게 바쳐 줄 테니, 우리 사이의 빚은 그걸로 퉁치자고.”
란은 오늘은 쉬라는 듯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멀리서 기다리고 있었던 히아신이 움직였다.
란은 저에게로 걸어오고 있는 히아신 때문에 잠시 서서 그를 지켜봤다. 마침내 나디사의 앞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못다 한 신경전을 이어 갔다.
“히아신이라고 했나?”
그렇게 끝날 것만 같았던 대화가 란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랬죠.”
“악수나 하지.”
란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 히아신은 피식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맑은 하늘 덕에 별이 잘 보이는 검푸른 밤. 꽤 오래 나눈 악수에서 노란빛이 번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디사는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는 사이 악수는 끝이 났다.
란은 끝까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천막 앞을 떠나갔다. 그의 가벼운 발걸음과 찰랑거리며 흔들리는 금발이 사라질 무렵에 나디사는 불끈 쥔 주먹을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