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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09화 (109/210)

109화

록의 처소는 성의 내부에 있을 줄 알았으나 자청하여 천막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우연히 길바닥에서 마주친 록은 본인이 쓰는 천막을 보여 준다며 나디사 일행을 이끌고 데려갔다.

다른 것보다 월등히 크고 하얀 천막은 공주의 성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자리해 있었다.

“들어와.”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어린 신관들이 분주하게 물건과 옷가지 같은 것을 날라 상자 안에 넣는 게 보였다. 가져온 살림살이를 정리 중인 신관들은 새로 온 손님들에게 눈인사했다.

“앉아. 그 의자는 닦은 것이니.”

물을 따르며 록은 한 의자를 가리켰다. 그의 말에 그녀를 쳐다보던 어린 신관들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장식처럼 서서 대화를 듣고 있는 아랫것들이 불편하리라 생각한 록은 그제야 명을 내렸다.

“너희는 나가 보아도 좋아.”

“네.”

“네.”

순종적으로 대답한 어린 신관들은 나이가 열두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처럼 어린 신관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떠나가자 천막 안은 순식간에 적막이 감돌았다.

록이 권유하는 대로 의자에 앉은 나디사는 여기까지 따라온 히아신을 보며 속이 떨렸다. 누구보다 불경한 자를 여기에 앉혀도 되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인도 아니니 함부로 내쫓을 순 없었다.

“차를 마시겠어?”

“괜찮습니다.”

“크리신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고되고 지치겠어. 지금 이런 상황에.”

록은 괜찮다는 말에도 찻잎을 띄우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찻잎이 우러나는 향에 짧은 순간 평화를 얻었지만 그녀의 훼방꾼은 참으로 부지런했다.

“안녕하세요.”

찻잔을 내어 주던 록은 인사를 건넨 히아신 쪽에 눈길을 줬다. 오로지 나디사의 앞에만 있는 찻잔을 자각한 록의 얼굴이 시시각각 빨개지고 있었다.

“미, 안하네. 아, 그, 너무 반가운 마음에 내가 실수를 저질렀어.”

“아닙니다.”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었음을 한참 설명한 록은 뒤돌아 새 찻잔을 가지러 갔다. 록에게 빙긋 웃어 주고 있던 히아신은 그가 뒤를 돌자마자 표정을 바꾸었다.

신관들이 정리해 놓은 곳을 뒤엎느라 록의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 틈에 히아신은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런데 말이야.”

찻물을 마시고 있던 나디사는 다가와 말을 거는 히아신을 무시하고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나디사의 표정이 어떻든 히아신은 제 할 말을 꿋꿋하게 속삭였다.

“저 사람, 나디사를 좋아하는 것 같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있어.”

“왜? 내가 잡혀갈까 봐 무서워?”

키득거리며 웃는 히아신을 아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볼우물이 필 정도로 웃고 있는 히아신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시늉을 했다.

“나를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나디사. 정작 걱정해야 하는 건 너인데.”

“히아신.”

“응?”

“나를 모욕하고 놀리는 게 네 기쁨인 건 알겠지만 그쯤 해 둬. 여기는 우리만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

그 말이 퍽이나 우스운지 히아신은 록이 보지 않는 사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손이 잡힌 나디사는 그를 노려보는 눈빛에 살기를 더했다.

그러나 그는 그 눈빛을 기쁘게 받으며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차갑고 보드라운 입술이 손등에 눌렸다가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이런 게 모욕이고 놀리는 거지.”

“……재밌어?”

“재미는 없지만 설레기는 하네.”

나디사는 잡힌 제 손을 앙칼지게 빼냈다. 때마침 찻잔 하나를 찾은 록이 탄식을 내질렀다.

“이게 여기 있었지 뭐야. 손님이 이리 많을 줄 모르고 다들 숨겨 놓았나 봐.”

농담을 건네는 록의 말은 귀에 거의 담기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엶과 동시에 테이블 아래서 히아신이 손을 잡아 왔기 때문이었다. 다정하게 눈웃음까지 치며 찻잔을 받아 든 히아신은 은근슬쩍 손깍지를 꼈다.

도망치려고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손을 마사지하듯 누르며 달래 준다. 그가 놓아줄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나디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 불편한가?”

“아뇨, 아닙니다.”

“곧 의사들도 도착할 거야.”

걱정스러운 록의 눈빛을 보며 나디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나디사는 한쪽 손을 없는 셈 치기로 했다.

“록 님은 신전의 사람이신데 어떻게 공주 쪽으로 오셨습니까.”

말린 과일로 만든 과자까지 꺼내 오려던 록은 대답하기 위해 천천히 의자에 주저앉았다.

부디 록이 식탁 밑에서 일어나는 불경한 일을 모르게 하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작은 원을 그리고 있는 이 불경한 짓들을 말이다.

“모든 사람이 그와 뜻을 같이하는 건 아니야. 왕의 유언을 따르자는 사람도 적지 않아. 내가 이리로 붙으면서 다른 이들을 데려오기로 했어.”

“그렇습니까.”

“왕이 왕세자 뒤를 이을 자로 공주를 명명한 것을 나뿐만 아니라 첫 번째 신관님도 들으셨지. 그런데도 그는 왕자를 밀고 있는 것이고. 쉽지는 않겠지만 나는 나의 뜻을 따르려고 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던 나디사는 어쩐지 한시름 놓이는 기분이 됐다. 선량한 그가 여기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잘한 선택을 한 듯싶었다. 나디사의 풀려 가는 얼굴을 지켜보던 록은 불쑥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같은 부대의 이들은?”

“지금은 셋씩 갈라져 상황을 파악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쪽으로 오게 하는 게 맞을 듯싶어요. 저희를 축복해 주신 것도 신관님이시니 아마 다들 납득할 겁니다.”

그러나 록은 나디사의 말을 듣고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조용히 찻물을 마신 그는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글쎄. 이미 그쪽으로 떠났다는 건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니. 이쪽으로 오는 게 쉽지 않을 거야. 그쪽도 그쪽 나름의 정의가 있지 않겠어.”

“……그렇다면 계속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내 생각엔 그렇단 말이지. 지금 라드군은 거의 왕자 쪽으로 갔어. 이곳으로 온 이는 소수라고 들었고. 그들을 뿌리치고 이쪽으로 오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이지.”

저쪽을 설득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던 나디사의 입꼬리는 아래로 추락했다. 록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파삭하게 마르는 듯했다. 그녀는 식지 않은 찻잔을 빠르게 내려놓았다.

“그래도 몇 달이 지나면 결론이 나지 않을까요.”

“글쎄. 나는 전쟁이 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전쟁이라는 소리에 그녀의 안색이 못 봐 줄 만큼 창백해졌다. 록의 말에 따르면 이건 단순한 왕권 다툼이 아닌 듯싶었다. 두 진영으로 나뉘었을 때부터 보통 일은 아니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몇 달을 예상했던 나디사를 비웃듯 록은 전쟁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동료에게 칼을 겨눌 것을 꿈에도 생각 못 한 나디사의 표정이 좋지 않자 록은 급히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라드군은 중요한 이들이라서 공주님도 환영해 주실 거야. 얼마 뒤에 왕자 측과 회담이 열리는데 그 전에 나와 같이 만나 보는 게 어떨까. 인사도 하고.”

“네.”

억지로 대답한 나디사는 제 손을 주무르고 있는 느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웃으라는 듯이 웃고 있는 그를 보며 눈길을 아래로 떨궜다.

그가 말한 것처럼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되고 있었다. 이리 공주의 성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일이 잘못된다면 전쟁까지도 감수할 터였다.

고민하는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이 록은 다정한 말로 그녀를 위로하려고 들었다.

“그래도 회담이 잘 마무리되면 금방 동료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네.”

록의 위로가 와닿지는 않지만 나디사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떠난 그리사 걱정도 되고. 차 마시는 속도가 느려지며 이만 일어날 낌새를 보이자 록은 어른스럽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시간이 늦었다. 내가 어린 신관들에게 말해 두었어. 라드군이 머물 천막도 내어 달라고. 잠시만 기다리면 곧 올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겠어?”

“이리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무얼.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록과 훈훈한 인사를 나눌 때마다 잡은 손에 악력이 더해졌지만 나디사는 이제 그쯤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운한 것처럼 입매가 처지는 그를 무시하는 건 더 쉬운 일이었고.

록과 대화를 나누며 그 부담을 잊어 가는 차였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을 안내해 준다던 어린 신관이 천막을 거두며 등장하였다.

“아, 란.”

그러나 들어온 건 란이었다. 활기 넘치던 그의 눈은 나디사와 마주치자마자 차갑게 식어 버렸다. 마지막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디사 경이 왔군요.”

표정을 수습한 란은 먼저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녀는 어색한 그와 악수하는 대신 목 인사를 했다. 웬일로 그에 개의치 않은 란의 눈이 그녀의 옆으로 떠났다.

“귀관은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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