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전부 모였나?”
“아직 복귀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관이 보고 있는 것을 당사자인 라넌이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라넌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더 빠르게 복귀하라고 해.”
“……네.”
라넌은 부관이 사라지자마자 빠르게 피가 묻은 손수건을 접었다.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 몸 상태를 남한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필 수비교 신전에 모두가 모이는 바람에 들킬 위험이 커졌지만.
라넌은 벤치에 앉아 신전 근방을 날아다니는 라드들을 바라봤다. 대다수의 라드군은 이쪽으로 왔지만, 공주를 지지하는 몇몇이 빠져나가는 걸 알고 있었다.
라넌은 왕의 장례식인 줄 알고 부대를 이끌어 참석했다가 이도 저도 못 하고 발이 묶여 버렸다.
그로 인해 우선은 이쪽으로 모이도록 했다만 사정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를 일이었다.
왕세자의 성은 전염병일지도 모른다며 방문이 금지됐고, 왕의 장례식은 곧 이곳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그 어디에도 공주에 관한 소리는 없었다.
아까 새로운 수장이자 왕이 될 사람이라며 어린 왕자를 만나고 온 참이었다. 머리와 함께 대표로 방문한 라넌은 그다지 큰 감흥을 받지 못했다.
어른인 척하는 열네 살의 소년과 그 옆에 선 늙은 너구리만 보았을 뿐이었다.
오래된 계획인 듯했다. 왕이 죽자마자 일들이 일사천리로 처리되며 첫 번째 신관인 랍의 지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늙은 너구리. 첫 번째 신관인 랍은 당연히 라드군도 왕자에게 붙는 것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신전은 공주를 버리는 패로 썼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귀족의 대부분 왕자를 지지하는 듯했다. 이 상황이 우연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신이라는 이름 하에 가려져 있던 욕망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이 격렬한 시기에. 누구보다 신전을 싫어하며,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불평하고 있어야 할 그녀는 오늘따라 과묵했다.
요 며칠 그녀는 낡고 바랜 과거에 살고 있었다.
티사 레나이는 처음부터 그리 잘 맞는 친구가 아니었다. 보통 사툰은 사툰끼리 어울렸고, 그녀는 플란이라는 희귀 종족이라서 눈이 몇 번 갔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훈련이 시작되고 알았다.
‘티사 레나이.’
언제나 1등. 무슨 훈련에서건 그 여자의 이름이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라넌 샤스라는 이름은 언제나 그 이름 뒤로 밀려났을 때부터. 얼굴을 외우고, 관심이 가고, 그러다가 원치 않게 라이벌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비교하는 시선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그 여자의 비행을 지켜보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번은 개인적으로 밤을 새우며 훈련을 했던 적도 있는데.
‘라넌.’
그해 우리 부대에는 여자가 거의 뽑히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신입 중에 1등, 2등을 모두 여자가 차지하니 우스갯소리로 한 사람만 양보하라는 소리도 들었고. 그게 어쩐지 2등인 자신을 겨냥한 것만 같아 라넌은 더욱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몸 상해.’
그러는 저도 밤에 몰래 나와 마구간에 있던 주제에. 그 기만적인 말에 쌓였던 불만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네가 신경 쓸 바는 아니잖아? 내가 훈련을 하다가 죽든 말든.’
그렇게까지 세게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뱉은 본인도 놀랐지만 자존심 강한 라넌은 말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욕을 먹고도 눈만 끔뻑거리는 그녀는 더없이 순수한 피해자 같아 비위에 거슬렸다.
‘내가 싫어? 라넌?’
감히 그걸 얼굴을 맞대고 물어 왔다.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기엔 저지른 말들이 있었다.
더욱이 그간 그녀를 향해 품어 왔던 감정들. 아무리 봐도 좋은 빛깔의 감정은 아니었다.
‘나는 네가 좋아, 라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처럼 열심히 하면서도 남한테 싫은 소리 안 하는 아이는 처음 봤어.’
사툰 종족이니까. 비교도 안 되는 집안에서 비싼 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니까. 저런 고아쯤은 눌러 줘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던 그녀를 우습게 만드는 말이었다.
‘다들 나한테 고아에, 종족 덕을 본다고 하던데. 너는 그런 소리를 하는 걸 한 번도 못 봤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떠나며 흘린 잘 자라는 말. 살다 살다 저런 애가 다 있냐며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날의 대화가 결국 라넌의 마음을 움직였다.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부대에서 누구보다 가까워졌으니까.
티사에게 무어라고 욕을 하는 이가 있으면 라넌이 찾아가 대신 싸워 줬다. 바보같이 착한 그녀는 그러지 말라며 라넌을 말리기 일쑤였다.
처음 그녀를 미워했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라넌은 시답지 않은 연애 놀음을 하는 것보다 티사와 붙어 다니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 때문에 이상한 오해도 받기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남들의 평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었다.
이상해진 건 심장 부대까지 올라와 승승장구를 달리고 있을 때쯤이었다.
말도 없이 장기 휴가를 신청하지를 않나. 임무 날짜를 코앞에 두고 빠지지를 않나. 콧대가 높아져 저런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어도 라넌은 믿지 않았다. 연락 없이 며칠씩 종적을 감춰도 그녀를 믿고 기다렸었다.
‘티사는!’
‘모르겠어! 분명 여기서, 내가 기억해! 만나기로 했다고!’
그날 같이 임무에 나섰던 세 사람은 오랜 시간 동안 같은 부대에서 알고 지낸 동료들이었다. 물론 티사와도 마찬가지였고. 밉고 좋고를 떠나 긴 세월을 지지고 볶은 터라 친구보단 형제 같았다.
‘날씨가 심해! 그리고, 경계가 어디인지 모르겠어.’
‘티사가 내려갔을 수도 있잖아.’
‘아니, 됐어. 우리가 더 날아가 보자. 티사가 안 올 리가 없잖아.’
나무뿌리가 들썩일 만큼 거센 폭풍과 함께였다. 그만 착륙을 해야 하는데도 마땅한 땅은 없었고, 아래는 그저 강이었다.
물이 불어난 강의 줄기를 보며 불안에 젖어 있었다. 이쯤에서 합류하기로 한 티사가 나타나지 않아 하릴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라넌! 그만 돌아가자!’
‘기다려. 티사가 오지 않았잖아.’
‘임무가 늦어지나 보지!’
‘그러면 우리한테 보고를 했겠지!’
늦는다는 말도, 오지 않는다는 말도 없었다. 제시간에 오겠다는 말을 전했으니 티사라면 이곳에 올 터였다.
그러나 라넌의 대쪽 같은 믿음은 동료 두 명이 휩쓸려 날아가 강물에 빠졌을 때 끝이 났다.
능숙한 라드군이라 할지라도 불어난 강물에 묻혀 버린 이상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을 구해 보려다가 라넌과 동료 하나는 중태에 빠지고 말았고.
그리고 깨어난 의무실에서 멀쩡히 복귀한 티사를 보았을 적의 그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단순히 까먹은 것이었다. 못 간다고 말을 할 수 없던 상황도 아니었다. 그리 긴박한 임무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라넌을 찾아온 그녀는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았다.
‘너는 울지도 않는구나. 너 때문에 에드와 타이스가 죽었는데도.”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눈물 한 방울 없이, 그 어디 하나 다친 곳도 없이 서 있던 티사는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너는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라넌.’
‘뭐? 너 그게 지금 사람이 할 소리야?’
‘잘 지내.’
그게 티사와의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라넌은 살아남은 동료의 다리를 잃게 만든 것과 나머지 둘은 죽게 만든 책임을 떠안았다.
그 과정 속에 티사 레나이는 없었다. 모든 비난과 절규는 그녀의 것이었다. 위로도 사과도 없이 견디던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온 폭풍은 티사의 자살 소식이었다.
“티사.”
신전에 오니 죽은 사람의 생각이 더 잘 나는 기분이었다. 피식 웃은 라넌은 그때의 고통이 전처럼 절절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있었다. 계속해서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이 또한 무뎌지는 것인가.
생각의 길이와 걸음의 길이는 비례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는 신전과 멀리 떨어진 곳을 거닐고 있었다.
이름 모를 장소에는 여름을 맞이한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정해진 간격 없이 무더기로 자라난 꽃들은 작고 볼품없었지만 라넌은 그런 꽃들이 좋았다.
티사가 이맘때면 저만한 꽃들을 엮어 반지와 팔찌를 만들어 주었기에.
“그래서 나디사 마로닌은?”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그래?”
기둥에 기대다시피 서서 꽃을 감상하고 있던 라넌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숨소리를 낮췄다.
목소리 두 개가 너무도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차갑게 빛나는 금색의 시선이 기둥 너머를 향했다. 거기에는 아주 잘 알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나디사 마로닌을 데려오지 못하면 너에게 무슨 쓸모가 있지? 응?”
“죄송합니다.”
“잘 감시하라고 했잖아. 어디로 튀지 못하게.”
라넌의 눈은 그 잘난 청년의 얼굴을 훑었다. 눈엣가시 같던 발톱의 수장이었다. 이름은.
“어떻게든 록과 떼어 놔야 해. 그래야 네 신관 자리도 보장이 될 거다, 아트리스.”
그래. 아트리스 메놈.
“네.”
정신이 빠져도 한참 빠졌었나 보다. 관심을 끈 사이 라드군에는 어느새 저런 끄나풀이 무수히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