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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07화 (107/210)

107화

히아신이 본 오늘의 날씨는 유례없이 화창했다. 푸른 물감을 푼 듯 맑은 하늘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리사의 말 뒤로 이어지는 일들은 맑게 갠 날씨와 어울리지 않았다.

여관 앞에는 어느새 아트리스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나와 있었다. 저들끼리 심각한 상태여서 그가 어떤지 모르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만약 걱정이라도 해 주었다면 우울한 기분을 핑계 삼아 그를 화풀이 상대로 삼았을 거다.

히아신은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나디사만 따라다니는 자신의 시선에 신경질이 났다. 덩달아 그녀의 기분을 살피는 것도.

그전과는 달랐다. 그의 피를 본 순간부터 나디사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눈빛의 강도를 달리했다.

아무리 뻔뻔한 그라고 할지라도 위험을 감지하는 직감 같은 건 있었다.

방금 그리사가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무언가를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어쩌면 이 꼬인 관계의 끝이겠지.

히아신은 그녀에게 뻔뻔하게, 어느 정도 협박하는 톤으로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녀에게 저를 강매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밤이 되기 전에 모이라는 전갈이 한 번 더 왔어.”

아트리스 메놈의 지시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와중에도 나디사를 바라보는 눈에는 미처 퍼내지 못한 미련이 넘친다. 그러하니 그 눈을 뽑고 싶은 게 당연했다.

“결정을 달리했으면 좋겠어. 갔다가, 아닌 것 같으면 당장 이쪽으로 올 수 있도록 해 둘게.”

다들 알지 않을까. 저 위선적인 수장이 데려오고 싶은 건 한 사람이라는 걸. 참아 주려고 해도 주먹이 쥐어지고, 눈가가 찌푸려지고, 웃음이 사라지는 건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런 건가.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이런 감정을 귀여운 질투라는 말로 포장하고 싶지 않았다.

“너희야말로. 그쪽이 아닌 것 같으면 당장 이쪽으로 와.”

“동감이에요. 서로 상황을 파악하는 게 낫죠.”

예전에는 빠져나올 수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것들을 상상했다. 그리고 정 그래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으면 아예 그것들을 떠올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혹은 원인을 제거하거나. 그게 사람이면 죽이고, 물건이라면 없애고, 기억이라면 지우고, 말이라면 하지 못하게 하면 됐다. 춤을 추지 않고 편지를 멀리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이번 것은 없앨 수도, 지울 수도 없는 평생의 숙제였다. 지금은 빠져나갈 방법을 모르겠다. 바닥이 어딘지도 모르고 떨어지는 기분을 바라보는 것밖에는.

떠나면 될 일인데 떠나지 않는 아트리스 메놈에게 한마디를 해 주고 싶었다. 조금만 더 착하지 않았으면 눈알을 뽑았을 테니 어서 꺼지라고.

안다. 이건 그의 심술이었다. 그러나 입을 열기도 전에 나디사의 손이 그의 앞으로 왔다. 자신을 막는 그 손에 의해 히아신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먼저 가 볼게.”

“꼭 편지 보내, 나디사.”

나디사는 그 주절거리는 놈들과 하나하나 포옹과 악수를 나눴다. 그 기가 막힌 광경을 보는데도 히아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여전히 자신을 막고 있는 듯 뻗어 있는 손 하나를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입술로 바람을 불면서 차라리 그걸 보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는 자신이 태풍이 되기를 원했다. 그녀를 무너뜨리고 혼란스럽게 만들 태풍이.

그런데 그녀는 역으로 지금까지 받은 것보다 더한 태풍을 돌려주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기대한 무엇도 돌려주지 않고서, 그에게서는 대단한 것을 바랐다.

“우리도 슬슬 출발하죠.”

떠나는 이들의 라드가 일으킨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래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은 덕분에 히아신은 귀한 것을 보았다.

아주 잠시지만,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의 눈이 다친 그의 가슴 쪽을 살피고 있었다. 그가 말한 태풍이라는 건 이런 것이었다.

“그래, 가자.”

비록 그 시선은 말로 나오지 않고 떠나갔지만. 히아신은 그 때문에 태풍이 무섭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말려 주지 않는다면, 그가 그녀에게 말려들면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누구에게 웃건 울건 화를 내건. 그건 그녀의 자유였다. 그걸 빼앗고 싶어 서성거리고 있는 자신이 이상한 건 변함없는 사실일 테니.

오늘도 자신이 망할 징조를 하나 건진 히아신은 떠나는 나디사의 뒤를 따라서 천천히 걸어갔다.

* * *

히아신과 말을 섞은 것은 여관을 떠나기 전에 치료부터 하라고 한 게 전부였다. 일부러 보라는 듯이 엉터리로 치료한 그였지만 나디사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사 또한 눈치를 챈 것인지 히아신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녀와 목적지에 대해 말을 주고받기만 했다.

그렇게 하니 장점은 있었다. 공주의 성으로 가는 내내 그를 제외시켜 두니 도리어 시간이 빨리 갔다.

“저기 같은데요.”

“감시가 있을 테니 내려가자.”

날이 저물기 전에 왕실 깃발이 흩날리고 있는 성문 위로 날아올 수 있었다. 삼엄한 경비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며 성문 앞으로 내려왔다.

땅에 앉은 세 마리의 라드는 다른 이들이 놀라지 않도록 자세를 낮추었다. 그러나 성문에는 라드군인 세 사람을 경계하거나 맞이하는 이들이 없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열려 있는 데다가 안쪽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막 해가 저무는 풍경으로 날아가는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왠지 슬프게 들렸다.

상황 파악에 나선 그리사와 시선이 맞물리는 차였다. 느긋한 히아신의 목소리가 들어와 분위기를 헝클어 놓았다.

“꼭 장례식 같다.”

허튼소리 하는 히아신을 한 번 째려보자 그는 혀를 살짝 내밀며 미안함을 표시했다. 그와 3초 이상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나디사는 고개를 돌려 버렸지만 말이다.

“지키고 있는 경비가 따로 없는 듯한데요.”

“잘못 찾아온 건 아닐까. 공주가 머무는 성에 경비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의외로 말이 되는 일인지도 모르죠. 저걸 보니까.”

눈썰미가 뛰어난 그리사의 손가락이 앞을 가리켰다. 뒤늦게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발견한 나디사의 눈길이 차차 아래로 떨어졌다.

공주의 성 앞에는 부랴부랴 전쟁용 천막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공성전을 떠올리게 하는 모양새는 가까이 가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었다. 천막 자재를 나르느라 정신이 없는 이들을 지나쳐 성 쪽으로 가려 했다.

아는 얼굴이 한 사람도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 누구도 세 사람을 알은체하지 않았다. 한참을 목적 없이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었다.

멈춘 그녀는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이들 위로 시선을 던졌다. 성에 있는 창문들은 내부를 볼 수 없게 전부 꼼꼼히 커튼이 쳐져 있었다. 공주는 성 내부에 있는 듯했다.

공주의 성치고는 작고 소박한 성이었다.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어 밖에 진을 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바쁘게 눈으로 아는 얼굴을 찾아다니던 그리사는 인내심이 사라진 듯했다.

“나디사.”

“응.”

“알아보고 올게요. 여기 있어요.”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뛰어간 그리사의 뒷모습은 곧 인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제각기 할 일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 미아처럼 남겨진 나디사는 답답해 머리를 쓸어 쥐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뒤를 돌다가 뒤에 선 사람과 어깨가 부딪혔다. 미안함을 표현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는데 보이는 구두 끝이 익숙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엉성하게 싸맨 상처가 그대로 보였다. 그녀를 따라 고개를 살짝 숙여 준 히아신은 장난을 걸듯 웃고 있었다. 나디사는 냉정한 얼굴로 그 웃음을 받아 주지 않았다.

여기에 그와 둘만 있다간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아 눈을 돌리려는 무렵이었다. 그는 그리 쉽게 이탈을 허락하지 않았다.

“네가 틀렸나 봐, 나디사.”

자꾸 무시당하면 더 나쁜 말을 꺼내는 것은 그의 버릇이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그의 말을 대충 넘긴 적은 없었다.

“무슨 뜻이야.”

“그렇잖아. 여긴 정신없고, 사람도 거의 없고, 라드군도 없어. 왕자 쪽으로 갔어야 하는 거 아닐까, 싶네.”

화가 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심기를 건드는 그의 말보다 엉성하게 상처를 싸맨 게 화가 났고. 그 사실이 화가 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잘 들리는 것 또한.

“잘된 일 아니야. 이러면 네가 떠나도 아무도 모르겠지.”

그녀는 확실하게 그에게 떠날 것을 재차 각인시켰다. 히아신은 변함없이 웃을 뿐이었다.

“내가 떠나면 뭐가 달라져, 나디사?”

“내가 말한 기한 안에 떠나지 않으면 달라지겠지.”

“왜 갑자기 나한테 매정해졌어.”

매정해야 할 이유가 왜 없을까. 하지만 그걸 그런 식으로 물어보는 건, 그것도 저런 표정으로 물어보는 건 반칙이었다.

마치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게 그가 아니라 자신인 것만 같았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찰나 나디사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어둠에 떨어진 빛 한 줄기처럼.

“나디사.”

당황한 표정으로 물그릇을 들고 있는 그의 황금색 머리카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얼굴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신관, 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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