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여관에서 옷을 갈아입는 기회가 왔을 때 노디를 챙겨 왔다. 혹시나, 만약에. 그가 망한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니까 챙기게 된 것이었다. 그와 단둘이 있는 순간에 쓸 일이 없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히아신이 몰래 숨겨 온 노디를 지적하자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가 오해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해를 끼칠까 싶어 갖고 있었던 것은 맞으니까. 그걸 설명할 말이 없으니 나디사의 입술은 굳게 다물렸다. 당연히 그에 관한 오해는 커지기 마련이었다.
공격할 의사가 있다는 걸 들킨 후에도 히아신은 웃고 말 뿐이었다. 저를 의심한 걸 생각하면 상처받아야 정상이지 않은가.
달라진 점은 조금 싸늘해졌다는 것밖에 없었다. 그녀를 질타하거나 원망하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못 본 양 그녀의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어 주었을 뿐이었다.
나디사는 속을 알 수 없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히아신은 웃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앞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땐 말이야. 그렇게 긴장된 표정으로 주머니를 더듬는 게 아니야, 나디사.”
결단코 그를 죽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구차한가 싶어 그게 아니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히아신은 그저 한숨 같은 말을 내쉬었다.
“이렇게 다정하게 안거나 쓰다듬은 후에 하면 더 좋잖아. 예상할 수도 없고, 빈틈도 만들고.”
있던 적의도 사라지게 할 만큼 다정하고 쓸쓸한 말이었다. 나디사는 주머니에 넣어 둔 손을 빼냈다.
히아신을 해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죄책감, 불안함, 경계심이 하나로 뭉쳐져 그녀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
“여하튼 히아신, 너는 안 된다는 거지. 이쪽으로 올 수도, 그럴 마음도 없다는 것처럼 들려.”
염소들이 언덕 너머로 이동할 때까지 기다렸음에도 히아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세상은 저쪽이었다. 듣는 이 없는 곳에서 목청 터지게 불러 대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디사는 대답이 없는 그를 두고 여관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를 설득하는 것은 이만하면 됐다.
그러나 그녀보다 감이 좋은 히아신이 가지 못하게 손을 붙들었다. 히아신은 히아신의 길을, 자신은 자신의 길을 택한 것임에도 아직 미련이 남았나 보다. 피차 설득될 일도, 그만둘 마음도 없다는 걸 이 자리에서 확인한 셈이었다.
그제야 힘을 주고 있는 그의 손이 눈에 보였다. 협박해서라도 데려오겠다는 강한 의지를 엿보았다.
“나디사. 이야기는 나도 해야 되지 않겠어?”
“놓고 말해.”
나디사는 손을 흔들어 그를 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아신은 피식 웃으며 여관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무얼.”
“내가 나쁜 마음 먹고 라드군에 들어온 거. 충분히 말할 기회가 있었잖아.”
지금이라도 말할 수 있다며 큰소리치고 싶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히아신에게 동조하듯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 입을 다물게 만들고 있는 건 그녀조차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히아신을 고발할 것인지, 말 것인지. 이 남자는 영리하게도 그 지점을 노리고 있었다. 그가 이처럼 긴장하지 않고 깐족댈 수 있는 건 그녀의 마음을 손바닥 보듯 훤히 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옭아맨 그의 눈길은 대담해졌다. 뺨으로 올라온 손은 시선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도록 턱을 잡고 조정했다.
강제로 그를 보게 된 나디사는 입술을 꽉 물었다. 양심 없이 제 뺨과 귀 옆을 쓰다듬고 있는 히아신의 손길은 지난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애정이 넘치고, 따듯하고.
그러나 저건 언젠가 보았던 그 싸늘한 시선이었다. 잠시 옛정에 팔려 있었던 정신을 도로 잡아 왔다.
나디사는 숨기지 않고 노디를 꺼내 들었다. 휙, 소리와 함께 꺼내진 노디가 그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걸 힐끗 내려다본 히아신의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갔다.
“두 번 다시 허락 없이 날 만지지 마.”
“기쁜데.”
“기뻐?”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네 마음이 흔들릴 것 같지. 나하고 있으면, 조금만 더 있으면.”
저만의 착각을 키운 그는 강한 반발을 사랑으로 해석하는 모양이었다. 가슴에 닿을락 말락 하는 노디와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의 착각을 깨 주었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변하며 속삭이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라드와 궁합이 좋을수록 수명이 빨리 줄어드는 건 알고 있어?”
“……딴소리하지 말고.”
“너무 그 힘을 믿지 마. 이 세상에 대가 없이 좋기만 한 게 있겠어, 나디사.”
아니다. 이건 자신을 망치기 위한 그의 개소리일 거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다독여도 마음은 밑도 끝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라드군에는 젊은 사람이 주를 이루지. 부작용 때문에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은 없어. 특히 너처럼 한 번에 큰 힘을 내는 사람은 힘을 낼 때마다 수명이 깎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
“여기서 나의 의문은 시작돼.”
염려 가득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로 감겨들었다. 그는 노디가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왔다.
“왜 너는 네 목숨을 깎으면서까지 그런 것에 열을 낼까.”
“……다가오지 말라고 그랬어.”
“그럼 죽여.”
노디의 끝이 그의 가슴을 찌르다 못해 눌렸다. 살을 파고드는데도 히아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 걸음에 미뤄짐이 없었다.
그의 가슴에 상처를 내는 느낌이 들 즈음 나디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물리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가 만류했다. 자기한테는 이래도 된다는 것처럼. 가슴을 찔러 죽여도 상관없는 것처럼. 물러서는 그녀의 손을 잡아채 노디가 더욱 가슴을 파고들도록 안쪽으로 당겼다.
“무슨.”
그의 가슴에 피가 맺히는 것을 본 나디사는 기겁하여 그를 보았다.
그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이 상황을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듯했다.
“너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어? 나를 다치게 하고 싶어 했잖아, 나디사.”
“놔, 이거, 놓으라고.”
빼내기 위해 힘을 주고, 주고, 주다가 그의 가슴에 상처만 더 내는 꼴을 보고야 말았다. 파고든 노디의 끝이 그의 살을 가르고 피를 내고 있었다.
그의 셔츠 군데군데에 빨간 웅덩이가 생겨났다. 그게 통쾌하기는커녕 그의 비정상적인 감정이 사람을 어떻게 망가트리는지 똑바로 알게 됐다.
히아신은 사랑을 말하고 있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었고, 그의 눈에 그녀가 있지만 그건 그녀가 아니었다.
그의 빨간 피가 노디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게 손가락에 닿을 정도가 되었을 즈음에는 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짝,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그의 뺨을 한 대 쳤다. 그동안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노디를 빼내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돌아온 그의 뺨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 멍이 들 것 같다. 그런 걱정은 핏빛으로 물든 그의 가슴팍을 보며 지울 수 있었다.
히아신은 제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한 번 쓸어내린 뒤 씨익 웃었다. 만신창이가 돼도 상관없다는 그의 견고한 표정이 때론 상처로 남는다.
그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고, 그러는 마음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듯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주지 말아야 하는 게 맞지 않는가.
비참했다. 그러지 못하고 있는 나는 어쩌면 이렇게 유약한 것인가.
그동안의 무시하고자 했던 것들은 이런 유약한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닐지 싶었다. 친모에 대한 감정을 숨기려고 무심한 척, 다른 사람이 가진 좋은 것을 갖고 싶지 않은 척, 지금은 그를 향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무심한 척 피하려고 했다만.
이건 그러는 척만 해선 끝낼 수 없는 문제였다. 그가 그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고.
한쪽 뺨이 빨개진 남자. 사랑이 중요한 주제인 것 같지만 듣다 보면 그도 자신도 사랑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우고 있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서로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물고 뜯는 것이었다. 길고 긴 생각 끝에 나오는 결론은 언제나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나디사는 그의 피가 번져 가는 가슴팍을 보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너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
의외의 말에 제 뺨을 만지던 히아신의 손이 멈추었다.
“하지만 이대로 네가 나와 반대 길로 걸어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일주일 안에 네 발로 조용히 나가. 그 이후까지 있겠다면 더는 나도 숨기지 않겠어.”
“일주일?”
“그리고 또 하나. 설령 네 말이 맞아서 내가 라드를 몰다가 죽어도. 너는 상관하지 마. 나의 시체를 주는 거지 나의 삶을 준다고는 하지 않았어. 너는 그냥 나의 삶이 끝나면 그 몸뚱이만 받아 가면 돼. 그게 애초에 우리의 거래였잖아.”
“그게 무슨…….”
“들어. 내 말은 무슨 말이든 다 들어준다고 그랬잖아.”
잠자코 있던 히아신은 마지막 말을 채 듣기도 전에 웃어 보이고 말았다. 그 웃음은 가는 실바람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그런 말을 들어준다는 게 아니었는데…….”
무엇에도 지지 않고 웃고 다니던 그가 이따금 산산이 흩어질 것 같이 굴 때가 있었다.
나디사의 눈, 그리고 기억은 그 순간을 잊지 않았다. 그런 기억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히아신을 가리킨 감정은 방향을 잃었다. 화를 내야 할 때 웃었고, 웃어야 할 때 울고 싶어졌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알 것 같았다.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그를 잘라 내는 것이다.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그와 헤어지게 될 상황이 왔으니 그를 회유하고 싶었지만. 그와는 도달할 수 없는 합의점이 존재했다. 그러니 헤어지는 순리를 받아들이는 게 그녀가 할 일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끝을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생각한 것처럼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히아신은 무언가를 짐작한 듯이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가 준비한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네가 그렇게 가고 나면 영영 보지 않는 게 좋겠어.
모래를 삼킨 것도 아닌데 목 안이 까끌거렸다.
“나디사, 히아신.”
참고 있던 숨이 터졌다. 때마침 등장한 발소리가 그녀의 입을 막아 주었다.
두 사람 모두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듯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가 온 것을 미리 알아차린 시선들을 보며 그리사는 당황스러워했다.
“뭔가 부담스럽네요, 조금. 그나저나…….”
이곳까지 그들을 데리러 온 그리사는 찾아온 목적을 전했다.
“가 봐야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