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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05화 (105/210)
  • 105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조리 그의 탓으로 돌릴 순 없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으로 비교되고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를 가지기 이전과 이후가 너무도 달라서 자꾸만 이전을 그리워하게 된다. 사이가 좋았던 동료들. 그를 보면서 느끼던 설렘들. 단순하고 명료하던 앞날들. 그 모든 게 반대가 되어 버린 지금 나디사의 기분은 피다 만 꽃처럼 처량했다.

    공주님을 찾는 그를 내버려 두고 나디사 또한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리사를 찾는다는 이유보단 그를 떠나는 게 맞을 거다.

    그녀는 식사를 하겠냐는 여관 주인의 말에 고개를 젓고 문으로 갔다. 뜨거워야 할 한낮의 여름이 미적지근하게 느껴졌다.

    계절을 맞이하는 마음이 차가워 그러한가 보다. 그래도 여관에 그와 단둘이 있느니 후덥지근한 바깥이 더 나았다.

    여름이 긴 수비타 왕국은 짧디짧은 봄과 가을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여자아이의 이름 중에 봄, 가을이 많은 것에도 그런 이유가 있었다.

    나디사도 괜스레 지나간 봄을 그리워했다. 해변을 뛰놀며 마음 놓고 웃던 나날들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그리사?”

    몇 개 없는 추억을 돌아보는 동안 어렵지 않게 그리사를 찾아냈다. 작은 펌프로 물을 퍼 올려 목을 축이는 그의 뒷모습을 본 것이었다.

    그를 설득할 말을 생각해 내지 못했음에도 나디사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와 뜻을 같이하지만 그렇다고 인사도 없이 떠나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게 마지막이 된다면 그리사는 후회하고 말 거였다. 한번은 아트리스와 싸웠다는 이유로 무작정 라드를 타고 떠나려 했지 않았던가. 그를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디사는 뛰다시피 펌프 옆으로 갔다.

    다가오는 발걸음을 느낀 그리사는 그 사람이 나디사라는 걸 알고 나서 표정을 풀었다. 떠날 생각을 바꾼 건 아닌 듯하지만 말이다.

    “그리사.”

    숨이 찬 나디사는 도망치지 못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사는 당황해했지만 나디사가 숨을 고르는 순간을 같이 기다려 주었다.

    “그래도, 이렇게 감정이 상한 채로 가는 건 아니지 싶은데.”

    “글쎄요. 나는 아트리스를 더는 못 믿겠어요.”

    그리사는 그녀에게 숨부터 가라앉히라며 물통을 건넸다. 떠나기 전에 물을 얻으러 온 모양이었다. 나디사는 사양하지 않고 그 물을 입에 부었다.

    “나디사. 내 말 잘 들어요.”

    그녀의 숨이 어느 정도 진정된 걸 눈치챈 그리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숨기는 게 있어요. 본인이 떳떳하다면 왜 내가 하는 말마다 반박하지 못하고 화만 내는 건지.”

    그리사가 보고 의심한 것이 무엇인지 말을 해 주지 않으니 그녀로선 알 길이 없었다. 나디사에겐 그리사의 말이 다른 식으로 들려왔다.

    그가 허심탄회하게 심정을 털어놓는 것에 반해 그녀는 한 톨의 진실도 흘릴 수 없었다. 의심받고 있는 아트리스보다 더 나쁜 사람을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사에게 말을 하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줄 것이었다. 하지만 나디사는 수십 번의 노력 끝에 깨달았다. 자신은 히아신이 첩자라는 말을 생각처럼 쉽게 밝힐 수 없다는걸.

    그리사는 그녀의 어두운 표정을 죄책감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제가 더 어른인 양 나디사를 위로하려고 들었다.

    “데이트는 괜찮았어요?”

    “응?”

    “데이트요. 아팠다고 그러던데, 히아신 말로는.”

    얼마쯤 진실이 섞여 있긴 했다. 아픔의 이유가 시시콜콜한 병 같은 게 아니어서 그렇지. 나디사는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없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도대체 히아신을 누구에게 고발하면 좋단 말인가. 아트리스, 그리사, 마벤. 나디사가 셋 중 누구에게 털어놓아야 좋을지 고민하던 때에 여관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정확한 타이밍을 아는 사람처럼 문을 열고 나온 은발은 그리사가 먼저 보고 말았다. 곧바로 미간을 찌푸린 그리사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던졌다.

    “그런데 두 사람 전혀 데이트를 하고 온 사람들 같지 않네요.”

    땅굴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낯빛이 어두워진 나디사는 어색하게 몸을 틀었다.

    “일단 같이 떠나. 그리고 아트리스에게도 말을 하고 떠나는 게 맞고.”

    “……지금 어디 가는데요.”

    “산책.”

    하지만 평범한 산책이 아니라는 건 말하는 순간부터 알아차렸다. 랭보로 돌아온 두 사람이 시종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도.

    문에 등을 댄 채로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히아신 아스가 곧 그녀와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눈치가 있는 그리사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서 펌프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배려 덕에 나디사는 무사히 랭보의 여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랭보에서 제일 크고 비싼 여관답게 주변 경치가 찬탄을 자아냈다. 염소와 양이 장악한 들판은 졸졸 흐르는 시냇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시냇물 길을 따라서 작은 발들이 달리고 있었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이 나디사의 옆으로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새들이 노니는 들판으로 들어가지 않고 멈추어 섰다. 아이들이 떠난 적막한 들에는 양을 모는 개가 낮잠 자듯 누워 있었다.

    왕의 죽음 같은 건 모르는 듯이 평화롭기만 한 전경을 질리도록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방해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녀의 근처에서 서성이는 발소리도 잊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언제까지나 뒤에 있을 것처럼 얌전한 그를 바라보았다. 웃고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조금 슬픈 얼굴이었다. 아름다운 랭보의 전경과 어울리지 않는 그 얼굴 때문에 나디사는 입을 열 기회를 놓쳤다.

    “병이 깊어졌어.”

    사랑이 아닌 병. 나디사는 그의 단어가 주는 울림에 가슴이 아려 왔지만 그걸 드러내지 않았다.

    “언제는 네 뒷모습만 봐도 좋더니. 이제는 뒷모습만 보는 내가 싫어진다?”

    “물어볼 게 있어.”

    “맨날 나는 물리는 것 같아. 가끔 안아도 주지.”

    “……나한테 양아버지가 있다고 했잖아. 형제들도 있다고 했고. 그것도 거짓이야?”

    “진실이라고 하면 울 것 같다, 나디사. 그런데 그건 진짜야. 나를 거둔 이는 본인을 아버지라고 하고, 나머지를 내 형제라고 하거든.”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친모에 관한 진실을 찾아 떠나는 길이라고 했지만 알고 보니 그건 모두 자신을 위한 것 아니었냐고. 특별한 것 없는 자신의 일상이 지겨워, 저를 특별하게 만들어 줄 기억을 찾아 떠난 것 아니었냐고.

    볕 들 일 없이 초라하던 그녀의 삶에 걸어 들어온 모든 것은 귀하고 아름다웠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긋나고 떨어지려는 동료들을 찾아가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도. 싸울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양보하는 것도. 그리고 본인의 길을 정한 지 오래인 남자를 되돌리고 싶은 것도.

    그녀는 욕심이 많았다. 피가 어디로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그녀도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었다.

    “너를 고발하고 싶지 않아.”

    지금껏 그가 말한 것으로 보았을 때 설령 붙잡힌다고 하더라도 그녀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갈 것 같지는 않았다. 순순히 죄를 받아들이든, 그들을 제 손으로 죽이든, 도망칠 방법까지 손을 써 두었을 것이다.

    “네가 걱정돼.”

    무방비한 상태로 있던 히아신의 눈이 커졌다. 으레 짓는 미소도 사라진 그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왜?”

    고발하리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걸까. 그는 진실로 궁금하다는 듯이 이유를 묻고 있었다. 짧은 침묵이 찾아와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만이 초원을 지나고 있었다.

    “내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 줘, 히아신.”

    “……응.”

    “네가 가려는 길에는 내 자리가 있다고 했지.”

    “응.”

    “다른 사람 자리도 있어? 그곳에.”

    “다른 사람.”

    “동료들, 우리 부모님. 하다못해 저런 어린아이들까지.”

    히아신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인 그는 솔직하라는 그녀의 말을 지키듯 고개를 저었다. 조금의 여운도 남기지 않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없겠지.”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입으로 들으니 더욱 확실해졌다. 나디사는 덜컥 그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손이 잡힌 히아신은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 손을 절대 빼지는 않았다. 어디 마음껏 해 보라는 것처럼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아 올 뿐이었다.

    “그러니 나는 그 길에 갈 수 없어. 그러니까 네가 이리로 와, 히아신.”

    나디사의 말을 들은 히아신은 슬쩍 웃었다. 그녀의 말을 들어 주기 위해 짓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런 말은, 나디사.”

    히아신은 그녀가 놀라지 않게 잡은 손을 천천히 놓았다. 그에게서 떨어진 손은 민망한 듯 바람을 쥐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그의 행동이 이어져 나디사의 평정심은 깨져 갔다. 히아신은 그녀가 숨기고 있는 반대편 손을 잡아 끄집어냈다.

    “이런 걸 들고 하는 게 아니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던 손과 함께 노디가 끌려 나왔다. 허공에서 부딪힌 두 사람의 시선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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