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아트리스는 자신했을 것이다. 히아신은 모르더라도 마벤, 시네라는 제 편이 되리라고. 그러나 뜻과 다르게 시네라는 판을 깔아 주자 공주 측으로 표를 던졌다.
“나는, 아무래도, 이쪽이 맞는 것 같아.”
“시네라.”
벌써 공주로 간다는 사람만 셋이었다. 자신 있게 다수결을 제안한 아트리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수세에 몰리자 뒷주머니에 넣어 둔 담배를 찾으러 손이 갔다.
그런데 물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빈 주머니만이 만져졌다. 아까 히아신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이래저래 풀릴 일 없는 그였다. 그가 입술을 씹으며 짜증을 참는 사이 뜻을 밝히지 않았던 마벤도 움직였다.
“난 아트리스의 말을 따르겠어.”
마벤의 선택은 놀라울 것이 없었다. 그 결정에 실망한 건 그리사만이 유일했다. 그리사는 치미는 한숨을 삼킨 후 마벤을 싸늘하게 응시했다.
“그거 정말 생각해서 내린 결정 맞아요?”
“말이 좀 그렇다? 당연히 생각해서 내린 거지.”
하지만 마벤은 찔리는 게 있는지 크게 반발하지는 않고 그리사의 시선을 피했다. 그 행동의 의미를 모르지 않는다. 마벤은 한결같이 머리보다 마음을 따랐다.
“그래요. 그럼 수장이 대답해 봐요. 다수결이라고 했는데 지금 넷이 이쪽으로 왔어요. 이제 우리 결정에 따라 주는 건가요?”
아트리스는 상황이 심각해질수록 차분해지는 면이 있었다. 그의 의도적인 침묵에 서로가 가진 인내는 녹이 슬고 있었다.
아트리스의 눈빛은 어떻게든 여섯 사람을 왕자 측에 데려가겠다는 쪽이었다. 그 꺾이지 않는 고집에 의아해진 나디사는 한쪽 편만 들지 않겠다던 원칙을 깼다.
“아트리스.”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굳세던 그의 시선은 중간에 낀 나디사를 보고 휘청이듯 꺾였다. 그는 숨을 한차례 삼키고는 어렵게 말을 뱉었다.
“나를 믿어 줘.”
아트리스는 자존심이 강한 이였다. 그런 남자가 다수결의 원칙도 어기고서 믿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때 저걸 믿냐는 듯이 히아신은 엮인 손가락을 세게 쥔 다음 놓아주었다. 마치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왕자에게로 가야 해.”
그러나 그 호소가 모두에게 먹히는 건 아니었다.
“그럴 거면 왜 다수결을 꺼냈죠? 자기가 불리해지니 지금 감정에 매달리는 건가요?”
“그리사 데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굴지 마. 나는 모두의 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니까.”
“조금 웃기네요. 당신이 말한 그 노력이 뭔지 모르겠어서요. 윽박지르다가 회유하는 게 당신이 말한 노력인가요?”
아트리스는 더 할 말이 없다는 표를 내며 왕자의 편지만을 챙겨 들었다. 속이 타는 듯 손톱을 물고서 지켜보던 마벤이 그를 대변하여 그리사의 말을 받아쳤다.
“아트리스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겠지.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람처럼 그래.”
“마벤. 상황 판단을 똑바로 해요. 아트리스는 지금 현명하게 굴지 않고 있어요. 마치, 신전의 끄나풀처럼 굴고 있다고.”
“뭐?”
신전의 끄나풀, 이라는 말에 아트리스는 손발이 굼떠졌다. 힘들여 잠재운 그의 마음이 부서지고 있었다. 아트리스는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식탁 뒤에서 걸어 나왔다.
“다시 말해 봐.”
물러설 생각이 없는 건 그리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트리스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신전의 끄나풀, 이요.”
급기야는 아트리스의 주먹이 올라왔다. 멱살을 잡고 대치하던 그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홍색으로 달아오른 그의 눈자위가 심각성을 알리고 있었다.
“잠깐.”
아트리스의 주먹이 일을 치르기 전 싸움은 마무리됐다. 그리사의 어깨를 안은 하얀 손이 두 사람의 가운데로 들어왔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싸움을 말리는 말이었다면 두 번 볼 것 없이 외면했을 터였다. 하지만 뜬금없이 아트리스를 칭찬하는 말이 물을 끼얹었다. 한순간에 식어 버린 시선들이 나디사에게로 꽂혔다.
“아트리스의 말대로 왕자가 되면 다행이지만 안 될 경우를 생각해 둬야지. 각자 나뉘어서 공주, 왕자에게로 가 보자. 그리고 나중에는 편지 두 개가 도착하는 바람에 나누어 가서 정황을 살핀 거라고 하면 되잖아.”
합리적으로 결론을 제시하는 듯했지만 결국 그 말의 뜻은 그것이었다. 이렇게 의견이 갈리니 각자가 선택한 곳으로 가자고.
둘 중 하나가 잘되면 그 사람의 덕을 보자는 식으로 잘 포장한 듯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서로 굽힐 생각은 없어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납득할 만한 절충안을 내놓아도 아트리스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름 그 말의 힘을 실어 주듯 싸움에서 물러나 있던 그리사도 다시 눈에 불이 붙었다.
“이러니 내가 의심 안 할 수 있어요? 결국 우리를 다 그쪽에 데려가야 끝난다는 거 아니에요.”
아트리스는 그 말을 못 들은 사람처럼 편지 하나만을 들고 여관 식당을 지나 계단으로 나아갔다. 그의 어깨는 처지지 않으려고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출발은 내일로 해. 하루 더 지나면 이보다 명확한 편지가 도착할 테니. 그때 다시 결정해도 늦지 않아.”
“왕의 장례식에는 라드군도 참여할 거예요. 빨리 가도 모자랄 판에…….”
“그래, 아트리스. 지금 결정해. 하루 더 기다리는 게 무슨 소용이 있어?”
모두가 입을 모아 안 된다고 하는 상황에서도 아트리스는 귀를 먹은 듯이 빌려 둔 방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의 대답은 끝내 들려오지 않고서 방문을 닫는 소리로 마무리됐다. 따라붙은 다섯 개의 시선은 문이 닫히는 소리에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 갑자기 정말…….”
“난 봤어요.”
아트리스가 떠나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그리사가 말을 꺼냈다.
“아트리스가 신전하고 연관된 건 분명해요.”
그 말에 지쳐서 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마벤이 발끈했다.
“아까부터 왜 그래. 그러니까 아트리스가 더 고집스럽게 나오는 거 아니야.”
“그게 마벤의 결정이면 난 방해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마벤, 아트리스가 지금 이상하다는 건 인정하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너희까지 다 등을 돌린 마당에 나마저 저버리라는 거야?”
계속 몰아붙이는 그리사가 원망스러운 마벤은 동의할 수 없는 관계로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괸 그녀의 눈을 보고 그리사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이런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나디사는 제 손을 놓지 않고 꾸물거리고 있는 히아신을 처리하고 싶었다. 그를 한 번에 떨쳐 내려고 젖 먹던 힘을 다해서 손을 빼냈다.
겨우 쏙 하고 빠져나온 손을 느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히아신의 입이 열렸다. 이것에 대한 복수라도 되는 양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긴 하다.”
천장을 보며 눈물을 말리던 마벤의 눈이 표독스럽게 뜨였다.
“뭐가 말이야.”
“가서 위로해 줘, 마벤. 아트리스가, 세상에, 거의 울더라고.”
“허.”
“아까 나한테 발로 차여서 가슴도 아플 거야. 이참에 위로로 마음을 얻는 거지.”
“이런, 저질…….”
얼굴이 빨개진 마벤은 히아신과의 대화를 피하는 것처럼 자리에서 벗어나 위층으로 갔다.
이렇게 두 개의 편지는 사람 두 명을 빼내고 말았다. 하나의 편지만이 남은 식탁을 사람 넷이서 지키고 있을 차였다.
한참 뒤에야 고민을 끝낸 시네라의 입술이 열렸다.
“나도, 왕자 측으로 갈까 해.”
“뭐, 시네라. 진심이에요?”
“그게 나도, 여기가, 맞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나디사 말대로 다시 합쳐질 것을 생각하면, 셋씩 나뉘는 모양이, 나을 것 같아.”
착한 시네라는 두 사람만 따로 빠지는 걸 두고 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 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만 감정적으로 뒤틀린 그리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예 빈정이 상한 그는 위층이 아닌 밖으로 나갔다. 여관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처럼 식탁 위에 놓여 있던 공주의 편지를 챙겨서 나갔다.
“그, 그리사.”
시네라의 안타까운 외침에도 그리사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쾅, 닫히는 여관 문소리에 움찔 어깨를 떤 시네라는 얼마 안 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파하고자 했다.
“나도, 올라가 볼게.”
그와 제대로 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는 걸 떠올린 나디사는 애써 웃어 보였다.
“응. 나는 그리사를 찾아볼게.”
안심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린 시네라는 이 사태를 빨리 수습하고 싶은지 잰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아마 아트리스의 방으로 향할 것이었다.
나디사는 뱅뱅 도는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눈이 감겼다. 일단은 그녀도 집 나간 그리사를 찾고, 그리고…….
“다 가 버렸네? 나의 공주님만 남고.”
그리고 아직 끝내지 못한 고민이 말을 걸고 있었다. 나디사의 눈이 차갑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