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03화 (103/210)

103화

왕이 서거했다. 그가 존경받는 이였든 아니었든 간에 수비타의 국민으로서 상심할 일인 것은 분명했다.

수도와 20마일 정도 떨어진 랭보의 한 여관. 한창때인 점심이 지나서 한가한 여관 식당은 침묵의 배를 타고 있었다. 조용히 물살을 헤치고 있는 배는 누구 하나 입을 열면 침몰할 것처럼 위험한 상태였다.

이 중 가장 책임이 막중한 이는 다름 아닌 아트리스였다. 모두가 답을 내리지 못하는 때에 그는 수장으로서 길잡이 역할을 해 주어야만 했다.

아트리스는 두 개의 편지를 식탁 위에 올려 두고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니, 생각에 잠긴 척을 했다.

히아신과의 일로 머릿속이 복잡해져 눈앞이 흐렸던 나디사는 식당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점차 의식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줄곧 아트리스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의 행보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앉은 자리에서 두 개의 편지를 읽은 후 빠른 판단을 내렸을 터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답을 정한 눈을 하고도 말하기를 미적미적 미루었다.

이 침묵의 배는 아트리스가 태운 것이었다. 나디사는 그의 생각이 무엇이건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느꼈다. 그 배에서 가장 먼저 뛰어내린 나디사는 단숨에 하나의 편지를 골랐다.

“이리로 가야 되는 게 맞지 않을까.”

정식으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모두 각자 생각해 둔 목적지가 있을 것이었다. 두 편지의 내용을 전부 읽어 보았으니 말이다.

한 사람씩 그 배에서 뛰어내려 결론을 마친 눈을 했다. 퍽 곤란한 것처럼 아트리스는 눈썹뼈를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왜 그쪽이지?”

“왕의 유언대로라면 이쪽이 장녀이니까.”

왕이 죽고 나서 그다음 자리는 왕세자로 정해져 있지만 그는 죽은 왕과 똑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 하물며 이 상황을 진두지휘하지도 못할 만큼 병상에 누워 오늘내일하는 몸이었다.

하필, 이런 때에. 누군가의 농간이라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다만. 그가 몸을 회복하기 전까지라도 대타를 세워 두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왕은 이러한 불상사를 대비해 혹여 왕세자가 본인의 뒤를 잇지 못할 경우 가장 나이 많은 아이를 앉히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내용은 한 편지에만 적혀 있었다. 왕가의 장녀가 된 공주의 인장이 찍힌 편지였다. 공주 측은 왕의 유언에 말미암아 자신이 후계의 정당성을 지녔다고 공포한 셈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아트리스의 생각은 다른 쪽으로 기운 듯했다. 쌍둥이 왕자 측은 첫 번째 신관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러한 눈치였다.

왕자가 보낸 편지에는 그 자신의 인장과 더불어 신관 쪽의 인장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즉위식을 치러 주어야 할 신관 측이 왕자에게 붙어 없는 정통성까지 만들어 내겠다는 기세였다.

그들은 긴말할 것 없이 왕자를 새 라드군의 주인으로 맞이하라는 식의 내용을 편지에 적어 두었다.

참으로 상반된 내용이었다. 공주의 편지는 사무적이며 짧았고 왕자의 편지는 세 장을 넘어갈 만큼 강압적이고 길었다. 양측 모두 자신이 적합한 왕의 재목이니 알아서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나디사는 공주 측을 택했다. 복귀 명령 대신 이러한 편지를 받은 것으로 보건대 라드군 내부도 뒤숭숭할 것이었다.

군에서 따로 연락이 오진 않았으니 발톱 부대는 편지의 적힌 장소 중 한 곳으로 가야만 했다.

왕자는 당당히 신전으로 그들을 부르고 있었고 공주는 담담히 자신의 궁으로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들이 충성해야 하는 것은 왕가이지 신전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디사의 답은 왕의 유언을 가진 공주라 여겼다.

“신전이 왕자를 택했다는 건 이미 여러 권력이 그에게 넘어갔다는 거나 다름없어. 왕세자는 사경을 헤매는 중이고.”

“그건 윗사람들의 몫이죠. 우리는 우리가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에게 가는 거고요.”

아트리스의 말에 잠자코 있던 그리사가 반대하듯 말했다. 그리사는 아트리스와 다른 길을 택한 듯했다. 그 편지를 읽은 라드군이라면 공주 측으로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정당성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는 건 공주뿐이었고 왕자는 왜 자신을 선택해야 하는지 길게 적어 두었을 뿐이었다.

쌍둥이 남매의 나이는 기껏해야 열넷이었다. 훗날을 생각해 두라는 말이 어린 왕자의 머리에서 나올 리 없었다.

신전과 사이가 좋지 않은 발톱의 선택은 당연 공주일 터였다. 그런데도 아트리스의 눈은 왕자의 편지에 가 있었다.

이미 결정을 해 두었으면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게 나디사는 답답할 뿐이었다. 그리사 역시 그러했을 거고.

하나둘 자신의 의견을 내기 시작하자 아트리스는 뒤늦게 본심을 드러냈다. 이제까지 가만히 있었던 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단호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왕자 측으로 가는 게 좋겠어.”

“왜죠?”

“대부분의 라드군도 왕자 측으로 갔을 거야. 왕의 장례가 끝나고 나면 자연히 그에게로 왕관이 넘어갈 테고. 공주 측으로 가면 안 그래도 밉보인 우리는 그 뒤에 어떻게 될지 뻔하지 않아?”

“왜 당연히 왕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죠?”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이해 못 하는 거면 그냥 따라, 그리사.”

“내 말은.”

모욕적인 말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그리사는 편지 위에 손을 올렸다.

“어떻게 그렇게 왕자가 왕이 될 거라고 확신하냔 말이죠. 앞날을 보고 오기라도 한 사람처럼.”

“정황상 그가 확실하니까.”

“정황? 그게 아니던데요.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는 사람 같던데.”

“그리사 데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그리사는 천천히 식탁에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났다. 두 사람의 말싸움에 여관 분위기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냉각이 되었다.

“나는 공주 측으로 가겠어요. 만에 하나 공주가 된다면 우리를 잊지 않겠죠. 그 가능성도 생각해 둬야 하잖아요?”

“그건 쓸데없는 짓이라고 세 번을 더 말해 주면 알까?”

의자에 앉아 있던 아트리스도 일어나 맹렬하게 맞섰다. 복잡한 사안을 더 복잡하게 만든 듯하지만.

한번은 부딪쳐야 하는 문제기도 했다. 여태껏 결정하지 못한 이는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어디로 갈지 정하고 있을 터였다.

의자에서 일어난 나디사는 그리사의 옆으로 섰다. 그와 뜻을 같이한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트리스의 말은 어폐가 있었다. 명예와 전통을 중시하는 듯하던 아트리스가 실리를 찾고 권력을 찾는 것도 이상했다. 그 이질감은 왕자라는 선택지에서 멀어지는 데에 한몫했다.

“아.”

갑작스레 손이 잡힌 나디사는 작게 신음했다. 어떻게든 잊으려고, 신경 쓰지 않으려고 등 돌리고 있는 걸 알았나 보다.

히아신이 그녀의 옆으로 왔다. 훔쳐 간 손가락을 엇갈려 맞추었다. 뿌리치기 위해 손을 위로 들어 봤자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저를 잊지 말라는 듯이 장난스레 손에 힘을 넣었다 뺐다. 소란 떨지 않고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랭보로 오면서 그의 말을 몇 번 무시한 적이 있었다. 그는 세상을 안겨 주겠다고 하는데도 서늘하기 그지없는 그녀에게 서운한 듯했다.

의견이 갈려 둘 중 하나가 멱살을 잡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히아신은 또 남 일이었다. 그녀의 노려보는 시선을 받던 히아신은 실수인 양 고개를 떨구었다.

모두의 관심이 과열된 아트리스와 그리사에게 집중되어 있을 차였다. 한 사람만을 위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로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그랬어, 나디사.”

저 말에 속으면 안 된다. 여지를 주거나 갈등하는 마음을 보여서도 안 된다. 그게 나디사가 택한 방식이었다.

그에 대한 처분을 어쩌면 좋을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히아신은 비웃기라도 하듯 자꾸 그런 그녀를 이성의 끝으로 내몰았다. 나디사는 유혹적으로 올라가 있는 그의 입꼬리를 쳐다보았다. 남들 모르게 나지막이 한마디를 했다.

“입 다물고 있어.”

오는 순간 많은 생각을 했다. 제 입으로 반역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는 그를 이대로 두는 게 맞나 싶었다.

머릿속으론 발고를 생각하지만 마음으로는 그를 회유하고 싶었다. 그런 무서운 생각은 하지 말고 함께 가는 길을 생각해 보자 말이다.

그러나 그의 민낯 같은 말을 듣고 있자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 허탈해지고 말았다.

“좋아.”

나디사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사와 입씨름을 계속하던 아트리스는 편지 두 장을 그가 있는 쪽으로 밀어 두었다.

“다수결로 한다.”

그 뜻이 분명한 세 사람에 비해 마벤, 시네라, 히아신은 알 듯 모를 듯했다. 격양된 분위기 속에서 여섯 명의 시선이 편지에서 맞닥뜨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