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어둠에 둘러싸여 쥐처럼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치 제삼자처럼 지켜보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란은 그 꿈을 꿀 때마다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살의를 담아 창을 날린 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낀 그 짧은 순간. 단죄 같은 어둠이 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매일같이 꾸는 꿈이었다. 신관으로서의 의젓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눈을 떠 보니 얇디얇은 시폰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더위 타는 그를 위해 사용인들이 창문을 활짝 열어 두고 간 모양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란은 비틀거리며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창틀에 몸을 기대고 어슴푸레 밝아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막 뜨려는 하늘은 지난 악몽과 연결되었다.
그 여자의 눈이 얼핏 저 하늘과 같았다. 떠날 날이 머지않은 여름 바람을 느끼며 란은 눈을 감았다.
약골도 아니고 별안간 현기증이 나서 쓰러졌을 리 없었다. 이 의문 모를 현상은 그 여자와 연관되어 있었다.
주먹을 쥔 란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창문을 닫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이 커튼이 슬슬 정신이 없어지려는 차였다.
쓸쓸하고 넓은 처소에 그의 한숨 소리가 길게 퍼져 갔다. 쉬엄쉬엄 걸음을 떼어 침대로 향하던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커튼과 연한 쪽빛의 새벽녘 하늘. 그 오묘한 조화를 바라보던 그의 머릿속에 한 남자가 스쳐 갔다.
언뜻 하얀색으로 착각할 만큼 화려한 은발의 남자. 그의 비상한 기억력은 발톱 부대의 성탑으로 갔던 날을 상세히 기억해 냈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이들 중에 분명 그런 남자도 있었다.
그 어두운 장막에 잠식되어 가는 사이 뛰어들던 누군가. 반복되는 악몽 속에는 그 누군가에 대한 의문점이 언제나 존재했다. 그리고 이게 잘못된 기억이 아니라면, 그 여자의 짓이 아니라면.
란은 서둘러 처소 밖에 있는 작은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겨우 잠옷 위에 카디건 하나를 걸치고 뛰어가는 그와 마주친 사람은 다행히도 없었다.
아침이 밝기 전 도서관에 도착한 그는 엎드린 자세로 곯아떨어진 사서를 깨우지 않았다. 깊숙한 곳에 자리한 책장으로 가 책등을 손으로 훑었다. 얇은 쇠사슬로 감겨 있는 책 한 권을 발견한 란은 그걸 꺼내어 펼쳐 들었다.
[파르난의 다섯 왕자들]
어린아이들이 읽을 만한 제목이었지만 그것은 한 저명한 탐험가가 집필한 책이었다. 누구도 가 본 적 없는 파르난의 땅에서 3년을 보낸 뒤 이 책을 썼다고 들었다.
책의 제목은 다섯 명의 위협적인 인물들을 비꼬아서 그렇게 적어 둔 것이라 했다. 처음 의도와 다르게 파르난의 악명을 드높이는 데에 쓰여 문제였지만.
란의 손가락은 마지막 장인 환영 술사 파트에서 멈추었다. 란은 주르륵 미끄러져 앉아 책장에 등을 기댔다.
그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정성을 담아 넘기며 그 마지막 장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란은 그날 이후로 제 기억을 들여다보는 일을 금지당했다. 하지만 란이 기억하지 못하는 무의식 너머의 단서가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건 신의 뜻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는 소리는 사서의 코골이가 끝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 * *
점심때가 다 돼서야 아트리스는 가져온 담배가 동이 났음을 깨달았다.
그의 발밑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담배 개수를 보면 그가 언제부터 여기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있을 듯했다.
활동비가 남아돌아 랭보의 큰 여관을 통째로 대여하다시피 해도 됐지만 수장인 아트리스는 그러지 않았다. 고작 한 층을 여유 있게 구매하는 것에 그쳤다.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아껴 두자는 뜻이었지만, 어차피 이 이후에 장기 임무는 없을 텐데 괜히 구두쇠처럼 구는 게 아니냐는 마벤의 반항이 있었다.
하지만 아트리스는 마벤과 그런 것으로 말다툼할 시간이 없었다. 신경이 온통 딴 곳에 가 있던 탓이었다. 오늘까지 나디사와 그 여우 같은 놈이 돌아오지 않으면 직접 찾으러 가려 했다.
처음부터 그 두 사람이 데이트를 명목으로 나간다고 할 때부터 걱정이 머리를 들쑤셨다.
그건 제 안에 있는 감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히아신 아스라는 놈을 당최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 것 하나 군인이라는 단어에 적합하지 않은 남자였다. 마지막 담배를 피우며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던 아트리스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긴. 남의 이야기를 그렇게 할 때가 아니긴 했었다. 이 중에서 속이 시꺼먼 놈은 히아신만이 아니니 말이다.
자조하듯 웃으며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볼 때였다. 비가 그치고 맑게 갠 하늘에 두 마리의 라드가 떠올라 있었다.
손에 든 담배를 거칠게 버린 뒤 군화로 불씨를 껐다. 랭보의 여관을 발견하고 착륙하기 시작하는 두 마리의 라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걸음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힘이 실리고 빨라졌다. 라드의 다리가 땅에 닿기도 전에 그는 전력으로 뛰고 있었다.
“히아신!”
그의 외침을 듣고 누군가 여관 창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무어라 소리치며 자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걸음을 막을 순 없었다.
히아신의 뻔질거리는 얼굴을 보고 나서 이성은 막을 내렸다. 라드에서 내리지도 못한 놈의 얼굴에 주먹을 먹였다.
일부러 맞아 주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돌아온 히아신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다. 그 증거로 두 번째 주먹은 히아신의 손에 잡혔다.
나디사를 독차지하고 꿈 같은 나날을 보내고 왔을 히아신의 얼굴은 어째 독 오른 뱀 같았다. 그 생각에 잠시 느려진 차였다.
가슴에 큰 충격이 일었다. 눈을 내리깔 새도 없이 아트리스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그가 방심한 차에 발로 가슴을 찬 것이었다.
“으.”
진흙 위로 떨어진 아트리스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한 대 맞고 나니 머릿속이 한결 진정이 됐다. 입술이 터진 히아신은 그런 그의 앞으로 왔다.
“오자마자 인사가 거칠어서. 나도 반가운 마음에 그만.”
그러며 히아신은 감히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날 마음이 없는 아트리스는 진흙탕에서 스스로 일어났다.
“네 마음대로. 외박에 보고도 없고. 나디사가 아파서 정신이 없었으면 당장에라도 돌아와 의사를 요청했어야지!”
재수 없는 연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울분을 토했다. 상대는 비웃을 뿐이었다.
“출발 시간에 맞춰 왔잖아. 뭐가 문제야. 아, 혹시. 나랑 같이 있었던 여자가 문제인가? 그게 마벤 로사였다면 너도 더 같이 있으라고 응원했을 텐데.”
“뭐라고?”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트리스의 눈에서 한기가 피어올랐다. 히아신의 목을 당장 이 자리에서 분지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수장 자리도 내놓겠다.
그런데 기분이 저조하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히아신이 가지고 있던 그 능청스러움과 웃음이 오늘은 어딘가 부족해 보였다.
그 원인일 게 틀림없을 나디사에게로 그의 시선이 옮겨 갔다. 끔찍하게도 조용한 그녀는 라드에서 내려와 기운 없이 여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전까지 펄떡거리던 마음속의 분노가 그녀의 멍한 시선 앞에 사그라들었다.
“나디사.”
히아신을 제쳐 두고 아트리스는 그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정신이 나가 있는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서 조심스레 아트리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제 몸에 손이 닿자 나디사는 그제야 눈을 깜빡거리며 아트리스를 바라봤다.
“왜 그래, 나디사.”
“응?”
어딘가 멍해 보이는 그녀는 그의 걱정을 눈치챈 것처럼 맑은 눈동자를 되찾아 갔다.
하지만 그러려고 노력하는 그 눈빛은 인위적이고 갑작스러웠다. 아트리스는 숨을 내쉬며 그녀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무슨 일 있었지. 괜찮으니 얘기해.”
“일은 무슨…….”
그러나 히아신 쪽은 아예 쳐다도 보지 않고 있었다. 반면 히아신은 시선 한 자락이라도 얻고자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고.
곧 터지기 직전처럼 아슬아슬한 기류가 흐르는 두 사람이었다. 자세히 설명해 보라고 다그치려던 아트리스는 이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아트리스.”
여관 문을 열고서 그리사가 나와 있었다. 그의 표정이 꽤 심각했기에 나디사의 어깨를 잡던 손을 놓았다.
어서 들어와 보라는 그리사의 눈짓에 마음을 바로잡았다. 저쪽부터 해결하고 나서 추궁해도 늦지 않는다.
아트리스는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안고서 앞으로 걸었다. 나디사는 큰 반항 없이 그의 결정을 따라 주었다.
나디사가 그렇게 가니 히아신은 자연스레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아트리스는 그와 아예 상대도 하기 싫은 마음을 표현하듯 빠르게 걸었다.
상태가 이상한 히아신은 잘못한 개처럼 조용히 그 뒤를 따를 뿐이지만.
히아신 아스는 오늘부로 완전히 그의 눈 밖에 났다.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는 나중에 나디사한테만 듣기로 마음먹었다.
그리사가 열어 주는 여관 문 안으로 들어온 아트리스는 극도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읽었다.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들어오는 이들을 쳐다만 보는 마벤과 시네라 때문이었다.
어제부터 작정한 것처럼 나디사 이야기를 하던 둘은 기대와 달리 잔뜩 얼어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여관 식당 가운데에 자리한 동료들에게 걸어갔다.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의 손에 들린 검은 편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시네라에게 하나. 마벤에게 하나. 겉모양부터 인장까지 똑같은 편지였다.
그에 관한 보고를 들은 적 없던 아트리스는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뭔데.”
편지를 열어 본 흔적이 있으니 두 사람 모두 내용을 알 것이었다.
그때 까악, 까악, 하고 불길하게 까마귀가 울었다. 이 편지를 전해 준 까마귀 두 마리가 창가에 앉아 감시하는 듯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트리스는 분위기를 깨는 까마귀를 잠시 노려본 후에 그리사를 불렀다.
“그리사.”
나디사의 옆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그리사는 짧고 굵은 말로 침묵을 끝냈다.
“왕이 서거했다고 하네요. 오늘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