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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01화 (101/210)

101화

나디사는 수비타 왕국에 큰 애착이 있거나 애국심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본디 마음이라는 건 받은 만큼 주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말에 무정할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와 그녀는 나라의 자랑인 라드군 소속이었다. 해가 떠오르면 출발하여 동료와 합류하기로 약속까지 해 두었다. 한데 그의 말은 마치 이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첩자처럼 해석할 여지가 있었다. 아니, 틀림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말을 하면서도 나디사는 서둘러 가방을 열어 외출복을 찾아 입기 시작했다. 히아신은 하나둘 옷을 갖추어 입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면서도 만류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치마 허리끈을 묶은 그녀는 뒤돌아 혼자서 평화로운 히아신을 마주 보았다.

“네가 첩자라도 된다는 소리처럼 들려. 알아?”

제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끝이 떨리고 있는 목소리는 단추가 다 채워질 때까지 원래의 덤덤한 목소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단추를 잠근 나디사는 한 걸음 그에게서 물러섰다. 침대에 앉아 그녀가 갈아입는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본 히아신은 다리를 천천히 반대로 꼬았다.

그가 아무리 생각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히아신은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바닥에 떨어져 있는 셔츠를 주워 천천히 껴입었다. 팔을 넣고, 단추를 잠그는 동안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그 시선의 올가미에 묶인 것처럼 굳어 있던 나디사는 손을 내려 짐 가방을 잠갔다. 밝아지는 새벽의 빛이 창문으로 들어와 두 사람 사이에 선을 만들었다.

그사이 옷 갈아입기를 끝낸 히아신은 아침 식사를 하는 것처럼 차분하게 그녀의 옆으로 걸어왔다. 쪽, 고개를 숙여 뺨에 입을 맞추고 그녀의 짐 가방을 대신 들어 주려 했다.

“하지 마.”

“응.”

히아신은 복종하는 수하처럼 곧바로 손을 놓았다. 가방끈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지자마자 나디사는 그를 지나쳐 방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심한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동안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히아신이 저를 두고 무언가를 시험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그것밖에 없었다. 이처럼 불을 저질러 놓고도 태평한 이유 말이다. 두 사람은 어젯밤과 달리 취객이 사라져 조용한 여관 식당을 가로질러 빠져나왔다.

여관 문을 열자마자 마구간으로 향한 나디사는 얌전히 따라오고 있는 히아신에게 신경이 쏠려 있었다.

다행히 그녀를 제외한 모든 건 문제가 없었나 보다. 배가 볼록해진 로마가 고개를 들며 반기었다.

그러나 그에 반해 히아신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디디가 보였다. 전에는 그저 디디의 수줍음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주인과 꽤 오랜 시간을 보냈음에도 저 라드는 큰 교감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생각에 잠겨 마구간 우리를 열다가 말았다. 그러던 그녀의 몸이 움찔 굳은 건 뒤에서 끌어안는 팔을 느낀 후였다.

“우리 하루만 더 늦게 가면 안 돼?”

그때 든 생각은 하나였다. 자신의 천 근 같은 고민은 참으로 그에게 가볍다는걸. 그의 손을 뿌리치며 나디사는 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거기엔 웃지 않는 히아신이 있었다.

억울한 듯 눈썹을 구부린 그를 보며 나디사는 우리의 문을 마저 열었다. 따라 나오는 로마의 목줄을 잡고 빠르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뒤이어 그의 디디도 우리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고 판단했을 즈음 나디사는 로마의 허리에 짐을 묶어 두었다.

하지만 히아신은 발이 빨랐다. 그새를 못 참고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며 거리를 좁혔다. 바로 옆까지 온 구두를 힐끔 내려다본 나디사는 문득 시간이 궁금해졌다. 고개를 들어 밝아지기 시작하는 새벽하늘을 올려다봤다.

답 없이 엉킨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새까맣게 만들었다. 남의 마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정작 본인은 고요한 그가 진심으로 미워지려고 했다. 나디사는 떠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왕국을 망하게 한다는 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의 소리야.”

“그럼 넌 도대체 무언데.”

“알고 있잖아, 나디사.”

두 마리의 라드는 말을 나누는 주인들을 기다리느라 푹 땅에 주저앉았다.

어리석고 영악한 남자였다. 그 와중에도 히아신은 그녀를 사랑하는 눈을 감추지 못했다. 나디사는 그런 그의 눈을 오래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네가 파르난의 사람이라는 걸 알아.”

그 말을 듣고 히아신은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작게 웃었다.

“아니, 넌 모르는 것 같아, 나디사. 그러니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지.”

“네가 누구인지가 그렇게 중요한지 난 몰랐어.”

“어떤 사람에게는 중요한 문제였지. 네가 날 숨겨 준 덕분에 이제는 알려져도 상관없는 문제가 됐지만.”

숨겨 줬다는 말에 나디사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가 어딘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누군가에게 일러바쳤어야 했다는 건가.

히아신은 지금까지 평범한 라드군 신입인 것처럼 위장했다. 그렇다면 숨겨 줬다는 말은 두 사람에게 맞지 않았다. 그는 황당해하는 나디사의 뺨을 손등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이런 식으로, 만지지 마.”

나디사는 마음대로 구는 그의 손을 잡았다. 히아신은 그녀가 하는 행동에 반항하는 법이 없었다. 잡힌 대로 내버려 두었다가, 그녀가 그의 손을 놓아도 가만히 받아들였다.

무슨 짓을 해도 받아 줄 것처럼 아량 있게 군다. 나디사는 그 지점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속 뒤집혔다.

“너는 나한테 라드군을 그만두라고 그랬어.”

“맞아.”

“그리고 왕국을 망하게 하고, 내가 너를 숨겨 줬다고 그랬고.”

“응.”

“그런데 어쩜 그렇게 평온하지? 내가 너를 밀고하면 어떡하려고. 아니면 지금이라도 너를 잡아가게 내버려 두면 어떡하려고. 내가 그렇게 온화하게 보였니? 아니면 너를 그만큼 사랑하는 건가 싶어?”

히아신은 기분 좋은 노랫소리를 듣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사랑에 관련된 말이 나오면 그는 쓰고 있던 천진한 가면을 벗어 던졌다.

세상에서 가장 못된 사람이 되기로 작정한 것처럼 포악해졌다. 그만의 방식으로.

“물론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해서 계속 눈감아 주리라는 기대를 할 만큼 순진하진 않아, 나디사. 그래서 말하잖아. 가서 말해도 좋다고.”

“너는 참……. 당당하구나. 네 말을 듣다 보면 내가 이유 없이 너에게 화를 내고 다그치는 사람 같아.”

“괜찮아. 나한테 화를 내도 좋고 다그쳐도 좋아.”

“네가 그런 운명이니까?”

그런 상상을 해 보았다. 그가 사랑에 굴복하여 과거를 참회하는 거라면 어땠을까. 왕국을 망하게 할 마음을 먹고 있던 걸 눈물 흘리며 고백했다면 달랐을까.

그의 사랑은 누군가의 조종에 의한 것. 그러니 그 감정에 후회나 참회가 있을 리 없었다. 오로지 나아갈 앞만 있을 뿐.

“어찌 보면 참 불쌍하구나, 너도.”

나디사는 그 말을 끝으로 안장을 고치며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나 히아신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여관 앞에서 히아신의 숨소리만이 크게 들려왔다.

“나디사.”

“너는 복귀도 안 할 생각인가 보지. 그리고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나는 네가 적군이든 첩자든, 이 일을 그만둘 생각 없어. 그러니 두 번 다시 내게 묻지 마.”

안장을 제대로 맞추는 그녀의 손을 탁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그는 한 번에 그녀의 몸을 돌려 본인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놓으라는 눈빛을 보내자 그는 이번에도 선선히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눈빛이 그녀의 숨을 조여 오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난 고작 여섯 살이었어, 나디사. 왕국 누구도 멸족한 종족의 어린아이에겐 관심이 없었고. 나는 너처럼 다정한 어른들이 없었거든.”

“그게 왕국을 망하게 할 이유야?”

“다시 말하자면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거야. 그걸 동정해 달라는 건 더더욱 아니고. 그럴 필요 없어.”

히아신은 손가락으로 제 셔츠를 살짝 내렸다. 그동안은 보이지 않았던 그 검은 문양이 다시 그의 상체를 뒤덮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꿈처럼 느껴지는 그날 밤의 거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파르난의 사람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계약했어. 그저 무언갈 먹고 편히 잘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을 뿐이지. 파르난의 사람으로 자랐으니 나는 그대로 살 뿐이야. 네가 수비타 왕국의 어여쁜 소녀로 자라난 것처럼.”

“……그래서?”

“너의 왕국에는 내가 있을 자리가 없고. 오로지 사툰과 사툰 뿐이지. 너처럼 아름답고 유능한 사람이 말단으로 있는 그런 나라야. 하지만 파르난은 달라, 나디사. 여기엔 내가 있을 곳이 있고, 네가 있을 곳이 있어.”

“그런 말, 믿지 않아. 나는 파르난에 대해 좋은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어.”

“그래? 그럼 너의 종족은 어때. 좋은 말을 들어 본 적 있어?”

“…….”

“여기는 사툰의 세상이고. 너는 곧 시들 거야, 나디사.”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얼어 있는 나디사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누른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아름답고 강인한 시선에 사로잡히기 전 나디사는 가까스로 손을 빼냈다. 하지만 그는 아쉬운 듯 입술을 휘며 어디로 가지 못하게 두 팔로 그녀의 양옆을 막았다.

“오래된 계획이야, 나디사. 너희는 서서히 안에서부터 썩고 있어. 이제 와 그걸 막을 수도, 없앨 수도 없어.”

히아신은 눈가가 떨리는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댔다. 어두운 하늘이 물러가고 있지만 그의 그늘에 가려진 그녀는 여전히 침잠해 있었다.

그의 입술에서 차가운 숨이 퍼져 나왔다. 남자용 군화가 빗물 냄새가 가시지 않은 촉촉한 땅을 짓밟고 있었다. 나디사는 그 비정한 발끝만 바라보았다.

“나를 믿어. 너에게 세상을 줄게, 나디사.”

아름다운 목소리로 누구나 혹할 만한 말을 전했다. 나디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려 했으나 그의 손이 막았다.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잡은 그가 입술을 내렸다. 쪽, 하고 떨어진 그의 입술은 간절한 듯이 부탁했다.

“한 마디면 돼. 그러면 정말로 모든 이가 네 앞에 무릎을 꿇게 할 거야. 네가 갖고 싶어 하는 것, 네가 바라는 것. 전부 이뤄 줄 수 있어.”

배신을 아름답게 포장해 봤자 그는 동료를 속인 첩자였다. 그리고 이 왕국의 반역자이자 배신자였다.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여섯 살의 남자아이를 떠올린 나디사는 질끈 눈을 감았다.

이래서 나쁜 악당들의 사연은 듣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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