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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98화 (98/210)
  • 98화

    거짓말이 세 번을 넘으면 더 이상 그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히아신을 두고 만든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장난을 가장하여 그녀를 속인 이력이 안 세어 봐도 세 번을 넘을 것이다. 재밌자고 친 장난이었겠지만,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만들었다.

    첫 만남부터 회색 안개에 가려진 사람. 그렇게 그는 지금 이 순간까지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그런 사람이 하는 사랑 고백 따위가 믿기지 않는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서서히 숨통을 조이듯 그의 손은 위험한 곳을 넘나들었다. 가령 속옷 끈이나 그 밑에 가려진 살결 같은 것들을.

    아마도 사랑이라는 말에 실망할 틈은 없었다. 그는 그 말을 하고 금방 잊었지만, 그녀는 아직도 그 아마도에 머무르는 것처럼. 그녀와 그의 마음은 그 순간부터 갈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히아신의 사랑은 그 아마도에서 더 나아가지 않을 거다. 그의 신이 됐다는 걸 알고서도 큰 기쁨은 없었다. 입술이 마르고 심장이 배 밑으로 내려앉는 느낌. 그건 충격에 가까웠다.

    신이기에 그가 억지로, 그의 의지를 배반하여 일으킨 사랑들이었다.

    나디사는 실망감에 빠진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었다. 그에게 특별한 여자가 생긴 것에 질투했으면서, 그의 특별한 여자가 자신이라는 것에 실망할 이유가 무언가. 그가 말한 아마도 사랑. 자신이 외면하고 싶은 그 아마도 때문일 것이다.

    신이라는 말은 맹목적이고 언뜻 보면 낭만 가득해 보이지만, 결국 그에게 구속과 명령밖에 되지 않는다. 만약 그 전부터 두 사람이 연인이었다면, 그리하여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거라면 다르겠지만.

    그는 이 운명을 끔찍이 저주하는 사람이었다. 아직도 그날 그 식당 창문에 기대어 있던 그의 휑한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화려한 거리를 바라보던 그 녹색 눈동자는 허허벌판인 사막처럼 황량했었다.

    “히아신.”

    제 손가락이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입을 연신 맞추고 있는 그는 행복해 보였다. 이 못된 망아지 같은 남자가 어째서 자신을 쫓아다녔는지 이해가 갔다.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의 대접은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그처럼 자유로운 바람 같은 남자가 어느 날 우연히도 목줄을 찼을 터였다. 그 목줄 이름표에는 나디사 마로닌이라 적혀 있었을 테고.

    “내 이름은 그만 부르고.”

    손바닥에 자국이 남도록 입술을 누른 그가 말했다. 그의 눈은 속옷 끈이 없어진 흰 어깨를 보고 있었다.

    “이제 말해 줄 차례지. 나를 사랑한다고 말이야.”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데.”

    그는 많은 것이 달라질 거라고 그랬다. 하지만 그 많은 것이 무언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나디사는 몸을 들이미는 그를 피해서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히아신은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댄 그녀를 보며 아쉬운 듯 눈을 감았다 떴다.

    “이리 와. 얘기를 해도 꼭 안고서 얘기하면 좋잖아.”

    “여기서 할래.”

    그는 잠시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그녀의 앞으로 몸을 당겨와 앉았다. 순식간에 차이가 좁혀지자 그의 매력적인 녹색 눈에 또 홀라당 넘어갈 듯싶었다. 그는 이런 마음도 모르고 도망친 그녀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왜 그래? 아, 혹시. 내가 또 거칠게 굴까 봐? 절대 안 그럴게. 이번에는 그만 부드럽게 해 달라고 울면 또 모를까. 그것도 재미있겠지?”

    그녀는 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흘러가고 있는 조용한 물살에 그가 들어와 큰 격랑이 일었다. 그리고 그녀에겐 그 격랑을 막을 만한 경험이 없었다.

    “히아신. 너를 못 믿겠어.”

    그녀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누르고 놀던 히아신은 웃음을 굳힌 채로 갸웃거렸다.

    “어떤 부분이? 네가 나의 신이라는 부분? 아니면 죽이지 않는다는 부분?”

    “전부.”

    “옛날식 맹세라도 해 달라고 하면 해 줄게. 아니면 요즘식으로?”

    “나는 맹세를 바라는 게 아니야.”

    “그럼.”

    “네 진심이 알고 싶어.”

    이번에는 나디사가 굳어 있는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거의 입을 맞출 것처럼 가까운 두 사람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나디사는 장난을 치듯 까닥거리는 그의 손을 잡았다.

    “너는 지금껏 나한테 아무것도 설명한 게 없어. 처음부터 지금까지. 어느 날은 그 여자를 죽여 달랬다가, 갑자기 나한테 미워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다가, 지금은 내가 그 여자라고 말하고 있어.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그 말이 왜 중요한지도 모르고 나는 해야 해? 너는…….”

    아마도 사랑이면서 말이지.

    등가 교환 같은 것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눌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누군가에게 조종당해서 나오는 것, 혹은 누군가를 너무 미워하다가 나오는 것. 그런 것에 그녀의 진심을 줄 순 없었다.

    “나디사.”

    대답은 느렸다. 그는 나디사의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눌렀다. 손을 붙든 악력과 달리 그의 눈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옛날식 맹세가 뭔지 알아?”

    그는 그녀의 손등을 잡아서 위로 들어 올렸다. 천천히 그의 입술이 떨어져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

    “네가 원하는 게 진실일 줄 알았어. 그래서 내가 준비했다니까? 아주 아름답고 끔찍한 나의 진실을.”

    “얘기해.”

    “그러기 전에 나도 받아야 될 게 있어서. 그러게 맛 보여 주지 말았어야지. 그러면 나도 얌전히 너에게 순종만 하고 살았잖아.”

    “내가 뭘 맛 보였는데?”

    손등에서 떨어진 그의 입술을 노려보았다. 매번 그녀에게 실망과 환희를 동시에 안겨 주던 입술이 떨고 있었다.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기대?”

    그제야 그가 뒤로 숨긴 손이 보였다. 약간씩 떠는 그의 손끝을 보며 나디사는 마침내 격랑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 어떤 말보다 신뢰할 수 있는 지표였다. 아마도라는 말에 방향을 잡지 못하던 마음이 그 순간 정해진 듯 직진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종족은 모두 사랑 때문에 절단이 난 상태였다. 사랑을 모른다는 그녀보다 더 모르는 사람이 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이런 방면에서 무서웠다. 상대방이 말해 주지 않아도 그녀가 이유와 변명을 알아서 가져다 붙여 주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 그 떨리는 손을 보았다고.

    “당신이 좋아, 히아신.”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훗날 그럴 마음이 들면 해 줄 터였다. 마지막까지 벗겨지지 않은 의심이 그 말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간절하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척에 있는 그의 입술을 꾀부림 없이 핥고, 머금었다. 조금 당황하는 듯하던 히아신은 곧 표정을 바꾸고 이 서툰 입맞춤에 진지하게 임했다.

    그녀의 허리를 안아 들면서 제 위로 데려갔다. 그의 허벅지를 편안히 깔고 앉은 나디사는 머릿속에 들려오는 여러 의문을 무시했다. 이대로 그를 가져도 되는 것인가. 그는 신뢰할 수 없는 남자였다.

    마침 혀가 그녀의 입천장을 가볍게 쓸었다. 그 순간 정신이 든 나디사는 속옷이 그의 손에 덜렁 들려 있는 것을 확인했다. 마술을 부린 그는 한 손으로 거칠게 본인의 셔츠 단추를 푸는 중이었다.

    아버지나 다름없는 로단은 그녀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 남자에 관해서는 믿을 수 없는 족속이라며 여러 말을 했었다. 세탁소 일을 하느라 남자는 구경도 못 한 그녀야 그런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만.

    ‘나디사. 제 이름도 말하지 못하는 어중이하고는 말도 섞지 말거라. 알았지?’

    셔츠로 싸매고 있던 그의 고운 살갗을 눈으로 구경하는 중이었다. 나쁜 의도를 갖고 올라오는 그의 손을 느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입술에서 더운 숨이 흘렀다. 나디사는 그가 입맞춤하려고 고개를 트는 차에 무심코 질문을 꺼냈다.

    “진짜 이름이 히아신 아스야?”

    키스하고 싶다는 눈치로 그녀의 입술만 바라보던 그가 시선을 바꿨다. 파동이 지나고 진정된 그의 눈은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반짝 빛났다.

    “그거 빌렸지. 내 이름은…….”

    “…….”

    “히아신. 그거밖에 없어.”

    그를 믿어 보는 게 어떠냐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마 그건 그녀의 막 시작된 사랑일 거다.

    나디사는 말없이 히아신의 못된 입술을 삼켰다. 헛된 믿음인지는 몰라도 오늘부로 그가 진실만을 이야기할 것 같았다.

    이 밤이 지나면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 키스가 깊어질수록 그와의 행복한 앞날이 그려졌다. 자신의 건조한 삶에 있을 수 없는 달콤한 나날들. 언제 그를 의심했냐는 듯이 그 달콤한 꿈은 키스의 맛을 더욱 흐뭇하게 만들었다. 나디사는 제 허벅지로 들어오는 손을 모른 척했다.

    히아신. 얻어 낸 것은 그의 이름뿐이면서도 전부를 얻은 것처럼 기뻤다.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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