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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95화 (95/210)

95화

라드를 타고 있으니 크리신에서 랭보까지 하루면 충분할 줄 알았다. 나디사는 같이 타자는 그의 제의를 거절하고 본인의 로마에 올랐다.

성장한 두 마리의 라드는 이제 빗길을 헤쳐 나가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잘 여문 날갯짓 소리가 더운 바람을 베고 다녔다. 내년이면 그들도 어엿한 성인 라드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여름의 후텁지근함이 불쾌한 수준까지 올라갔다. 땀이 마르지 않는 가운데 빗물은 체온을 앗아 갔다. 다소 성급한 출발 탓에 로브를 입지 못한 나디사의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더욱이 밤눈이 어두워 랭보까지 가는 길이 헷갈렸다. 어서 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부른 증세였다.

“나디사.”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던 히아신이 적당한 거리로 라드를 붙여 왔다.

“응.”

“저기 여관 보여?”

나디사의 시선이 연기가 나고 있는 굴뚝으로 갔다. 붉고 아담한 벽돌집은 이 마을의 마지막 여관인 듯했다. 아무리 눈을 부라려도 이 근방에 더는 여관이 없었다.

파래진 나디사의 입술은 아쉬움을 토했다. 빠르게 하강하겠다는 뜻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그는 뜻을 잘못 받아먹은 모양이었다. 이 상황에도 헛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그럼 오늘이 우리 두 번째 밤인가?”

입술을 앙다문 나디사는 라드의 목줄을 당겨 아래로 내려갔다. 빗방울보다 빨리 떨어지는데도 그의 웃음소리가 자신을 쫓아오는 기분이었다.

복귀. 랭보. 새로운 임무. 그것만 고려해도 머릿속이 바빴다. 히아신과 둘만 있는 상황은 그 바쁜 머릿속을 아군 없는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녀의 뒤로 따라쟁이 같은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하강을 맞이하는 심장은 언제나 그랬듯 크게 뛰고 있었다.

* * *

“방 하나 남았어요.”

중년의 여관 주인은 몹시 퉁명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의 마지막 여관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돈 없는 손님은 아쉽지 않다는 소리였다. 젖은 걸레처럼 들어온 두 사람은 라드를 마구간 뒤편에 묶어 놓고 오는 길이었다.

마구간에 말이 없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말값까지 생으로 변상할 뻔했다. 그리하여 신분을 밝히고 라드의 식성에 관해 설명하려 했으나 여관 주인은 보자마자 방이 하나 남았다는 소리뿐이었다.

“욕탕도 하나고.”

그게 싫으면 나가도 좋다고 거드름을 피웠다. 그때 히아신이 금화 3개를 꺼내 탁상에 올려 뒀다. 교만하던 여관 주인의 눈빛이 바뀌었다.

“뒤에 우리 말 묶어 놨는데. 말이 좀 커. 걔네한테 양고기든 염소고기든 내주면 세 개 더 주고.”

“당연히 남는 고기가 있지요. 부위는 상관없고요?”

말이 고기를 먹는다는데 의심 한번 하지 않는 그녀는 가장 중요한 금화부터 챙겼다. 총 6개의 금화를 세고 또 세어 보다가 방을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그녀를 따라서 난장판이나 다름없는 식탁 사이를 지나쳤다. 여관의 손님들은 잔을 부딪치고 음식을 먹어 치우는 도중에 할 말이 생기면 거의 악을 질렀다. 쟤가 악을 지르니 나도 지르겠다, 같은 복수심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으면 하도 시끄러워 대화가 통하질 않았다.

계단을 오르던 나디사는 식당 소음 때문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그 난장판이 익숙한 여관 주인은 기분이 좋은지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3층 끝방 열쇠를 주고 아부하듯 알랑거렸다.

“물은 비가 와서 미리 덥혀 놨어요. 왠지 이런 손님이 있을 거 같더라니.”

괜히 히아신에게 눈웃음치며 떠나갔다. 여관 주인이 내준 방은 식탁보와 꽃병으로 구색을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크기도 컸다. 여차하면 바닥에서도 한 명이 잘 수 있을 듯싶었다.

“먼저 씻어도 돼?”

하지만 방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닌 나디사는 몸을 데울 욕탕만이 간절했다.

“그럼.”

“고마워.”

짐 가방을 열어 속옷과 파자마를 챙기고 욕탕으로 들어갔다. 차분히 옷을 벗고 나무 욕조에 발을 들였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늦저녁까지 이곳으로 날아오느라 쌓인 피로가 한 번에 녹았다. 뜨거운 물로 얼굴을 씻으며 한숨을 쉬는데 문득 바깥이 시끄러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동작을 멈추고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그녀의 기분이 가라앉은 걸 알고 자중하는 듯하던 히아신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과히 조용해지자 마음이 불안했다. 아까 일 층 식당에서 험상궂은 얼굴로 술을 마시던 남자들이 자꾸 떠올라 언짢았다.

똑똑, 소리와 함께 히아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디사.’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나디사는 다시 주저앉았다.

“응.”

‘여기 욕탕 하나 더 비었다지 뭐야? 나는 거기 갔다 올게.’

“알았어.”

그녀의 걱정이 무언지 아는 듯 안심시키려 들었다. 그때 가지 않고 떠도는 그의 발소리가 문 앞에 있었다. 나디사는 조용히 그를 기다리다가 물었다.

“왜 안 가고.”

그는 들켰다는 것을 몰랐는지, 갑자기 화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들켰어?’

“얼른 씻어.”

‘말해 둘 게 있어서. 네가 떨어트리는 물소리를 들은 건 절대 아니고.’

그렇게 말하니 더 수상쩍었다. 비누를 집어 들다 말고 나디사는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뭔데.”

‘나 오기 전까지 아무도 문 열어 주지 마. 그러면 안 돼.’

당연한 말을 하고 간다. 그는 막무가내로 나서다가 산 미움을 이렇게 천천히 웃음으로 갚아 나갔다.

그게 답이 됐는지 히아신은 떠나갔다. 나디사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욕탕에서 빠져나왔다.

의식을 치르듯 머리를 감고 몸을 닦았다. 그 동작 하나하나에 힘이 없음에도 나디사는 모든 과정을 거르지 않고 끝냈다.

마른 사포 같은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나서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나디사는 아까 그 부스럭거리던 소음의 정체가 무언지 알았다.

작은 식탁에 두 사람분의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빵과 수프, 그리고 간이 된 고기까지 둔 식사였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히아신이 끓여 준 스튜 한 입 말고는 먹은 게 없었다.

다리를 움직여 식탁 앞에 앉았다. 맛보듯 그 음식들을 눈에 담았다. 머리를 수건으로 눌러서 말리며 그를 기다렸다. 히아신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방 돌아온 그는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식탁을 보고 볼에 팬 우물이 깊어졌다.

“왜 안 먹고 있어? 음식들이 네 입으로 들어가는 영광을 주지.”

어느새 뒤로 온 그가 그녀의 머리를 마른 천으로 꾹꾹 눌러 댔다. 그의 개인용 수건인 듯 거칠거칠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같이 먹으려고.”

“응, 먼저 먹어.”

“같이 먹어.”

“여자들 머리는 길어서 말리는 데에 하녀가 필요하잖아. 나 얼마 전에 나디사네 하녀로 들어왔고. 기억 안 나?”

어느 하녀가 이렇게 머리를 못 말릴까. 나디사는 목욕 마친 개처럼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그러자 포기한 그가 손을 잠시 놓았다.

“그냥 먹어.”

히아신은 끝까지 그녀의 어깨에 수건을 둘러 주고 자리에 앉았다. 앉자마자 빵부터 집어서 노란 치즈를 얹곤 그녀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생각 없이 받아먹으려던 나디사는 천천히 그 빵을 내려놓았다.

그의 목적 있는 친절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 나디사는 그 빵을 그의 접시에 다시 놓았다. 그러자 조용히 수프를 떠먹던 히아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 상했어?”

“아니. 너 먹으라고.”

“그거 나디사 먹으라고 준 건데.”

“괜찮으니까 먹어.”

그가 친절해질수록 배신감은 더욱더 짙어졌다. 그쪽은 신앙심이고 몸은 이쪽이라는 건가 싶었다. 인내의 테두리를 건드리는 이 감정이 무언지 몰랐다. 사사건건 그에게 감정 상한 티를 내고 싶었다.

조용히 새 빵을 가져와 수프에 찍어 먹는 순간이었다. 그녀를 지켜보던 히아신이 높낮이 없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이상하네.”

그 목소리가 데려온 싸늘한 공기에 나디사는 등골이 움찔거렸다. 고집스레 빵을 베어 물며 그를 바라봤다. 그는 정색한 그 순간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우리 되게 알콩달콩해야 하는데. 아까는 그래, 내가 실수해서 화가 났지? 그런데 지금은 뭘까.”

나디사는 그가 말하는 기세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히아신은 이 상황이 재밌는 듯이 비정한 얼굴로 그녀를 몰았다.

“말해 줘. 이쯤 되면.”

“무얼 말이야.”

“네가 원하는 거. 네가 나한테 말하고 싶은 거. 랭보로 혼자 떠나고 싶은데 내가 쫓아와서 자꾸 이렇게 성질부리는 거야?”

“그런 거 아니니까 그냥 먹으면 안 돼?”

목소리 끝이 떨리고 말았다. 고단한 몸과 허기진 배 속이 배신했다. 만약 몸이 쌩쌩했거나 배가 든든했다면 달랐을 거다. 저쪽에서 먼저 꺼내기 전에는 묻지 않으려 했던 질문이었다. 새까만 감정이 나디사가 둘러 둔 인내의 테두리를 벗어났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그래. 그렇게 해 줘.”

원망하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서 말하고 싶었다. 나디사는 본인의 생각보다도 더 뻔뻔하게 연기를 했다.

“가져와 달라는 여자. 누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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