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92화 (92/210)

92화

그와 다투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장난은 사절이었다. 화풀이 삼아 문고리를 여러 번 당겼다. 이번엔 저쪽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침은 먹고 가.”

“히아신.”

“맞다. 간 좀 볼래?”

솥에 이상한 것을 넣어서 끓이더니만. 그걸 한 숟가락 퍼내었다. 그 숟가락을 든 채로 천천히 그가 걸어왔다. 쨍쨍한 해가 들어와 눈이 부실 지경인데 이 남자는 어떻게 아무 걱정이 없을까.

지난밤의 어떤 역사를 이루었건, 아침이 되면 복귀를 해야 한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잊었다는 건가.

멍하니 그를 보고 있는 차였다. 정체 모를 것을 담은 숟가락이 가까워졌다. 문을 등지고 선 나디사의 입으로 친절하게 가져다줬다.

히아신의 말에 맞장구쳐 주고 싶지 않지만, 음식 냄새를 맡자마자 위장이 쓰려 왔다.

침이 저절로 꼴깍 넘어가는 건 그녀의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흔들리는 눈을 본 그가 웃으며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은수저 위에 있는 노란 국물은 호박으로 낸 듯했다. 숟가락을 자꾸 들이밀기에 살며시 입을 벌렸다. 바로 숟가락이 그녀의 입으로 들어왔다.

“삼켜.”

숟가락을 입에 넣어 주고 그는 한동안 나가지 않았다. 숟가락을 문 채로 가만히 있었던 나디사는 천천히 그것을 빨았다. 달콤한 맛의 수프가 혀를 자극했다. 손수 먹여 주던 히아신은 점점 딴생각에 빠졌다. 풀린 눈을 보니 좋은 생각은 아닌 듯싶었다.

“어때? 한 입 더 하고 싶지?”

천천히 빠져나가는 숟가락이 입술을 훑고서 나갔다. 히아신은 그 벌려진 입술 사이를 빤히 쳐다봤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은 없었다.

담백한 손길로 그녀의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는 제 손에 묻은 것을 남기지 않고 핥았다.

“끓인 사람 성의가 있는데. 한 그릇은 하고 가.”

그녀의 입에 들어갔다 나온 숟가락을 그가 물었다. 그걸 물고서 히아신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음, 음, 음.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시선은 어긋나게 맨 단추에 가 있었다.

잠시 기다려 보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였다. 그의 큰 손이 단추를 톡톡 풀었다.

“이런…….”

얼굴이 붉어진 나디사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히아신은 웃을 뿐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말간 얼굴로 단추를 죄다 풀었다.

그다음 다시 제대로 맞추어 하나씩 잠그기 시작했다. 구멍을 통과하는 작은 단추 여섯 개. 그것을 끼워 넣는 손가락은 세심하고 다정했다.

배에서부터 올라와 어느덧 가슴 단추를 닫고 있었다. 정갈하게 단추를 잠그던 그 손은 가슴 부근에서 멈추었다. 마음 편히 숨도 쉬지 못하겠다. 나디사는 슬그머니 그를 올려다봤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정적인 그의 눈은 다시금 단추를 끼는 것에 집중했다.

“자, 다 됐다.”

사심 없이 일을 끝마쳤다. 나디사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와 보낸 시간은 그녀에게도 특별한 의미였다. 조금 집요하고, 조금 무례하긴 했지만.

그 모든 것을 덮을 만큼 황홀한 느낌과 벅찬 감정이 존재했다. 나디사는 껑충 뛰는 마음을 다스렸다. 그와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의 심정이 됐다.

“너랑 아침을 먹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야. 지금 가야 되잖아.”

“그게 걱정이었구나! 그래, 그거라면 걱정 마.”

“왜 걱정을 마?”

히아신은 어깨를 으쓱하며 부엌으로 다시 걸음 했다. 잘라 놓은 재료를 솥에 추가하려나 보다. 나디사는 잡고 있던 문고리를 놓았다.

한창 요리 중인 히아신은 오는 발소리만 듣고도 상황을 아는 양 말했다.

“중간에 앉아, 공주님. 맨 왼쪽 말고. 거기는 안 닦았어.”

“왜 걱정을 안 해도 돼?”

히아신은 솥에 마지막 채소를 넣다가 그녀를 돌아보며 킬킬 웃었다.

“하여간 집요해.”

“누가 할 소리.”

“내가 집요했나? 되게 다정하게 물어본 기억밖에 없는데. 아, 혹시.”

히아신은 국자를 들고 그녀를 가리켰다.

“어젯밤 때문에? 아니면 그제 밤? 새벽? 내가 언제 집요했어?”

불경한 기억을 자꾸 불러왔다. 나디사는 한숨을 내쉬며 식탁에 앉았다. 그에게 더한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지정해 준 중앙에 앉은 참이었다. 한가하게 농담할 때냐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의 말에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그제 밤이라니?”

“응?”

“우리 여기 어제 왔는데.”

국자로 스튜를 들고 후후, 불던 히아신은 눈을 휘며 말했다.

“우리 두 밤을 보냈어, 나디사. 하룻밤은 네가 거의 기절하긴 했지. 원래 첫 경험을 치르면…….”

“뭐라고?”

“아우, 깜짝이야.”

그러면서도 히아신은 제 스튜를 맛보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꽤나 만족스러운 맛이었는지 눈썹이 올라갔다. 그의 표정이 말해 줬다. 스튜는 합격. 식기 전에 담아 주겠다며 새 그릇을 찬장에서 꺼냈다.

“두 그릇 달라고 해도 눈 감아 줄게. 세 그릇도 물론 가능해.”

빵과 호박 스튜, 갖가지 채소를 곁든 완벽한 아침을 차리는 동안 나디사의 머릿속은 비비 꼬였다.

이틀. 이틀이라니. 그럴 리 없었다.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는 나디사의 앞에 단정한 그릇이 놓였다.

혹시나 잊을까 싶어 숟가락도 놓아 준다. 나디사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눈치를 보듯 조용히 앞자리에 앉은 히아신이 갑자기 눈을 감았다. 기도하는 눈치였다.

“기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눈을 떴다. 히아신은 그녀의 뜻을 간파한 듯 말했다.

“말 안 했구나. 나 종교 생겼어.”

“축하해.”

나디사는 기운이 빠져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얼른 먹어 봐. 식으면 안 그래도 맛없는 게 차갑기까지 해.”

그렇게 자신 있게 아침을 먹으라고 하더니 맛이 없다고. 호기심 때문인지 뭔지. 나디사는 그럴 정신이 아님에도 숟가락을 들었다. 푹, 스튜를 떠서 한입에 넣은 순간 눈이 커졌다.

“맛있는데?”

“그게 내 전략이야.”

“무슨……. 전략?”

“맛없다고 해서 기대를 떨어트린 다음, 맛있는 걸 먹이면 놀랍고 기분이 좋잖아.”

히아신의 말장난을 들은 나디사는 미소 비슷한 것을 지었다. 히아신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웃어 주기도 하고. 이런 거짓말은 확실히 남는 장사란 말이야.”

차도 마시라면서 끓는 주전자를 가져왔다. 이러고 보니 잘 배운 시종 같았다. 아니지. 저 말투나 생긴 것을 보면 막돼먹은 시종이었다. 나디사는 스튜를 먹다가 말고 숟가락을 놓았다.

“그래서. 우리 복귀는 어떻게 되는 건데. 왜 안 깨웠어?”

“하하하. 당연히 난 안 깨우지! 너랑 보내는 달콤한 밤과 남자들한테 둘러싸여 보내는 칙칙한 밤. 후자가 끔찍한 건 당연하잖아.”

나디사는 고개를 저으며 완전히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손목을 꼭 잡아 왔다.

“안 먹고 가? 어디로?”

“모세스 가문의 저택에.”

“나만 두고?”

“같이 가려면 얼른 짐 챙겨서 나와.”

“이런, 무언가 섭섭하다.”

히아신의 말에 나디사는 뒤로 빼던 동작을 멈추었다. 그의 눈은 싸우기 직전처럼 사납게 번뜩이고 있었다.

“나랑 같이 입도 맞추고, 끌어안고, 사랑도 나눴는데. 왜 나한테 쌀쌀맞지?”

“놔. 일단.”

저도 힘이 많이 들어간 걸 알았는지 천천히 손목을 놓아주었다. 격화된 감정이 가라앉고 원래의 눈을 찾아갔다. 그 포악한 기세에 눌려 있었던 나디사는 몰래 아린 손목을 주물렀다.

“내가 기대한 아침하고 조금, 아주 조금 달라서 실망했어. 놀랐어? 공주님?”

번개처럼 다가온 그가 나디사의 어깨를 폭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끌려간 나디사는 지난밤과 똑같은 냄새, 온기를 느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은 천지 차이로 달라졌다.

쪽,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는 조금 전의 일을 만회해 보려는 듯이 간지럽게 굴었다. 그 속셈이 빤했다. 나디사는 결심을 굳힌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나 가야겠어.”

“가.”

붙잡을 때는 언제고 미련 없이 놓아준다. 같은 동기면서 그는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만 웃는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가도 아무도 없겠지만.”

나디사는 그들이 이틀 밤을 지냈다는 것보다 더 놀라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는 조금도 당황해하는 법이 없었다. 이마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치워 주며 상냥한 연인 행세를 했다.

“말 그대로지. 네가 사랑하고 아끼는 동료들은 떠났어. 오늘 새벽. 우리가 뜨거웠던 그 시간에.”

나디사는 그의 말에 속지 않았다. 그의 얄팍한 진심은 언제나 눈에 있었다. 미소와 달리 흉하게 어그러진 눈빛이 그렇다. 어제의 설렘이, 아니, 아까까지의 설렘이 가슴에서 식어 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