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87화 (87/210)
  • 87화

    알아서 길을 내어 주는 수풀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찰랑거리는 물이 발목에 잠겨왔다.

    나디사는 빌린 치마가 젖지 않게 살며시 들어 올렸다.

    별의 호수. 그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오두막. 들어가면 안락할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그 오두막은 노란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바깥에서 본 수많은 별을 모두 끌어모아다가 이 호수에 떨어트린 것 같았다.

    반짝반짝 진주알처럼 빛나는 호수를 보며 나디사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

    “크리신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음, 누군가의 꿈을 조금 빌려다 썼지. 나는 상상력이 빈약한 편이라.”

    “누군가의 꿈?”

    “발 조심해, 공주님.”

    히아신의 손짓에 호수를 가로지르는 나무배가 다가왔다.

    스스로 노를 저어서 다가오는 배를 보며 나디사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자.”

    히아신은 그녀의 손을 잡고서 배에 오르기 쉽게 도왔다.

    통통 튀는 나룻배에 발을 디딘 나디사는 한쪽에 조심스레 자리했다.

    이윽고 올라온 히아신 때문에 배가 살짝 기우뚱하자 자신도 모르게 양옆을 꼭 잡았다.

    “하하하.”

    겁먹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나룻배에 앉으며 히아신이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도 배가 흔들리는 것 같아 나디사는 엄청난 긴장 상태였다.

    히아신은 직접 노를 저어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노에 쓸려 나가는 물소리가 밤하늘과 잘 어울렸다.

    나디사는 홀린 듯 별이 반짝이는 호수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물의 느낌이 손끝에 느껴졌다.

    “너무 예쁘다.”

    그리고 히아신에게 고마웠다. 그녀가 이 별의 호수를 감상할 수 있게 시간을 내주듯 그는 묵묵히 노를 젓는 중이었다.

    움직이는 그의 두 팔과 저를 바라보는 시선. 은은한 미소와 이처럼 빛나는 별들이 모두.

    눈을 감는 그날까지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나디사는 이 나룻배가 조금 더 느긋하게 오두막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히아신은 천천히 노를 놓았다. 오두막으로 이어진 계단 쪽에 세워 두고서 그녀보다 먼저 일어나 손을 잡아 주었다.

    히아신의 손을 잡고서 무사히 계단에 오른 나디사는 그의 안내에 따라가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와…….”

    천장이 유리로 된 것처럼, 누워서도 별을 볼 수 있게 만들어 두었다.

    따듯한 불과 아름다운 유리잔, 그 앞에 놓인 과일들을 보며 나디사는 설레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안 들어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디사는 잔뜩 긴장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가 하나밖에 없는 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히아신은 들어오자마자 옷걸이에 재킷을 걸어 두고 자연스럽게 셔츠 단추를 풀었다.

    나디사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배가 고프진 않지만, 할 게 없었다.

    작은 포도알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돌린 순간. 나디사는 포도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상반신을 벗은 히아신이 욕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씻으려고?”

    “왜 씻어?”

    “씻기 싫으면 안 씻어도 돼. 그런데 나는 자기 전에 씻지 않으면 잠이 안 와서. 슬퍼도 잠시만 혼자 있어.”

    그러고는 욕실 문이 닫혔다. 나디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보니 식탁 위에 있는 촛불도 모두 음탕한 의미인 것 같았다. 사라지고 있던 긴장감이 다시 나디사의 몸을 지배했다.

    나디사는 급히 후, 불어서 촛불을 껐다.

    괜한 의심이길 바랄 뿐이었다.

    * * *

    결국 지고 만 나디사는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나왔다. 순간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히아신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씻고 나온 히아신은 웬일로 멀쩡한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그만큼 멀쩡한 잠옷을 건넸다. 하얀색에, 긴팔에, 프릴이 달린 그런 잠옷은 입어 본 적이 없지만.

    그의 취향이 이렇게 소녀스러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씻지 못한다는 핑계는 없어졌다.

    욕조에서 나와 몸에 묻은 물기를 닦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실크 잠옷을 입은 적은 처음이라서 원래 이렇게 하늘하늘한 것인가 했다.

    입은 모습을 비추어 보고 싶은데 이 오두막에는 거울이 없었다.

    살금살금 문을 열고 나온 나디사는 웃으며 저를 기다리고 있는 히아신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나도 거기로 갈까?”

    “아니……. 여기가 덜 더워서.”

    하지만 히아신은 그녀의 얕은수를 간파한 것처럼 자리를 옮겨, 그녀의 앞으로 왔다.

    의자도 여섯 개나 있는 식탁이었다. 과일 접시와 가벼운 포도주도 옮겨 왔다. 히아신은 자리에 앉아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다.

    “안 마시고 싶어.”

    “응. 안 마셔도 돼.”

    히아신은 웃는 얼굴로 정말 저만 마셨다.

    나디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계속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지금 이 상황이 적기일지 모른다. 나디사는 천천히 일어섰다.

    제 옷을 곱게 개어 둔 히아신 때문에 약간 민망했지만, 그곳으로 가서 치마 안쪽을 살며시 뒤졌다. 가지고 나온 낡은 가방을 열고, 그 안에 두었던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이러니 꼭 청혼하는 사람 같았다. 이건 전혀,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지만. 자꾸 자신에게 변명을 하게 된다.

    이건 그를 향한 마음 같은 게 아니라, 잘 어울려 보여서 산 것뿐이라고.

    제 행동을 쭉 지켜본 히아신의 시선은 앉은 후에도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깊어졌으면 깊어졌지. 자신의 행동이 평가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 나한테 상 주려고?”

    바로 이렇게. 애써 등 뒤에 숨기고 온 행동이 다 소용없는 짓들이었다.

    깜짝 선물이나 감동적인 멘트 같은 것은 생각도 안 한 주제였다. 그저 동료가 동료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여러 일이 있어, 줄 만한 시간이 없었을 뿐이었다.

    “심장이 멎기 직전이지만 난 백 년도 기다릴 수 있어.”

    장난스러운 말을 잊지 않는 그를 보며 나디사도 억지로 웃었다.

    쟤는 저렇게 덤덤하고 여유로운데 자기 혼자 끙끙 앓는 것이 이상하기도 했다.

    나디사는 예상과는 다르게 케이스를 식탁에 툭 내려놓았다.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불친절한 상점 주인 같은 태도였지만. 어쨌든 케이스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언제 산 거야? 오늘 종일 붙어 있었는데.”

    “예전에, 샀어. 많이 예전은 아니고, 여기 크리신에 와서.”

    “무한한 영광을…….”

    웃는 얼굴로 시계 케이스를 열어 본 히아신의 웃음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큰 낭패였다.

    나디사는 목이 타서, 마시지 않는다고 했던 포도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말았다.

    입가에 묻은 술을 닦고서 잔을 내려놓았다. 그동안에도 히아신의 표정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부드럽게 연 케이스에서 시계 줄을 꺼낸 그가 금색의 시계를 보고 첫 마디를 꺼냈다.

    “히아신에게.”

    따라 했다고 기분 나빠하는 건가. 이제 나디사는 스스로 술병을 잡고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잔에 가득 따르기 전, 술병을 잡아 막는 손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술병을 뺏어간 히아신은 손에 그 시계를 감고서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입맞춤을 시계 위에 남기고는 나디사를 바라봤다.

    “내 심장보다 아껴 주며 쓸게.”

    그리고 그 말에 나디사의 심장도 멈추는 것 같았다.

    나디사는 잔에 반 정도 따라진 술을 찔끔 마시곤 용기를 얻었다.

    “한 여자를, 따라서 여기에 왔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대고. 비웃어 주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여기에 들어와서 한 번도 그 여자를 비웃을 수 없었어.”

    나디사는 약간 술에 취한 자신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리고 조금 나불거린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저 선물을 주게 된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히아신은 묵묵히 그 말을 들어 주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질문한 것을 듣고……. 내가 진짜 바라던 게 무언지 깨달았어.”

    물론 이 선물은 그 깨달음을 얻기 전에, 그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의미가 컸지만. 선물을 주는 이유로는 이 말이 가장 적당할 것 같았다.

    선물을 산 후부터 계속 든 생각이었다. 무슨 말을 하며 전해줄까.

    “난 그 여자를 알고 싶어. 어렸을 때부터 쭉 그랬었나봐. 그 여자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알고 싶었어. 진실을.”

    그걸 늦게 알았다. 비웃으러, 부정하려고 들어왔다고 하지만.

    나디사는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증오심보다는 호기심, 그리고 그녀를 아는 이들에게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진실을 택하기로 선택한 그 밤, 제 마음에게도 솔직해지기로 했다.

    “고마워. 진실과 거짓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줬어. 그건, 그에 대한 선물…….”

    “그것뿐이야?”

    나디사는 손끝이 움찔 떨렸다. 그리고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제 심장보다 아끼겠다던 시계를 조심히 케이스에 넣어 두었다. 히아신은 천천히 상체를 들어 그녀의 앞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나디사는 조용히, 마음이 시키는 대로, 이 마음이 끌리는 대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순간 히아신은 식탁 위 촛불을 손으로 눌렀다. 꺼지며, 그녀의 눈도 감겼다.

    다가오는 입술, 그리고 언제 왔는지 모를 팔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