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육즙 많은 고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문은 히아신이 했기 때문에 나디사는 이게 무슨 고기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맛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지금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 식당에서 자연스럽게, 구두를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냐는 거였다.
“이것도.”
히아신은 무척 배가 고프다는 나디사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서 이 식당의 메뉴란 메뉴는 다 시킨 것 같았다.
그녀의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는 히아신은 그녀가 먹는 모습만 지켜보는 중이었다.
새 모이만큼 잘라서 먹고 있던 나디사는 정말로 식탁을 먹는 퍼포먼스라도 보여 주어야 하나 고민했다.
“많이 먹어. 뛰어온 만큼 살이 빠져서 속상하거든.”
“더부룩해.”
그 말은 진짜였다.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쑤셔 넣다가 보니 기존의 먹던 양보다 두세 배는 더 많이 먹은 듯했다.
그만큼 제 신경이 온통 구두에 가 있음을 깨닫고 나디사는 나이프를 놓았다.
이 모든 게 자신이 저지르는 멍청한 일들의 총집합인 것 같아 화가 났다.
구두가 뭐라고 체할 정도로 음식을 먹고 앉아 있냔 말이다.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계산하려고요.”
“아…….”
그사이 직원을 부른 듯한 히아신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본 직원은 하얗게 변한 안색으로 물었다.
“혹시 음식이 별로셨는지.”
“가까이 와 봐요.”
히아신의 부드러운 손가락 까닥임에 넘어간 직원이 허리를 숙인 순간이었다. 나디사의 귀는 불안함으로 쫑긋거렸다.
음식은 최악인 데다가 내가 주문한 것은 아직 반도 안 나왔잖아. 그의 입 모양을 보고 읽어 낸 말소리. 그리고 그는 멍한 직원과 억지로 악수를 나눴다.
“그랬다는 이야기예요. 맛있게 잘 먹었어요.”
그는 악수하던 손을 털고서 재킷을 챙겨 일어났다.
나디사는 따라서 일어나려다가, 그가 먼저 앞서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다시 주저앉았다.
“더 먹게?”
엉뚱한 오해를 하는 히아신에게 솔직히 고백할 시기는 지났다.
나디사는 이제 반쯤 포기하는 심정으로 일어나 그의 옆에서 걸었다.
히아신은 시무룩한 나디사의 뺨을 손등으로 툭 건드렸다.
“음식이 나빴던 건 내 잘못. 하지만 온전히 내 잘못이라고 하기엔 억울하니까. 만든 요리사 잘못도 참작해 주면 안 되려나.”
히아신은 좋은 식당을 많이 다녀봐서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음식은 훌륭했다. 음식은 죄가 없었다.
나디사는 밤하늘이 꺼질세라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아, 오늘만큼은 정말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종일 이렇게 미친 사람처럼 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이제 돌아가자.”
“당신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공주님.”
공주는 무슨. 나디사는 낡아빠진 구두를 바라보며 다음 봉급일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날짜를 셌다.
눈치 빠른 히아신의 시선도 그 구두에 닿았다.
“아, 그거 알아? 나는 물건을 오래 쓰는 사람이 매력적으로 느껴져. 내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변덕이 심해, 고쳐야 되겠지?”
“……창피해. 구두, 사려고 했었는데.”
옷도 사려고 했었다. 정말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주머니에 있는 이 금색의 시계가 모든 걸 방해했다. 히아신의 이름까지 새겨 넣느라 더 비싸졌다. 탈탈 털고도 비상금까지 써야만 했었다.
그래 놓고 전해 주지 않으니. 이건 비싼 장식품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멈추어 선 히아신이 돌발 행동을 했다.
돌바닥에 제 구두 앞코를 문지르더니, 어느새 가죽이 상할 정도로 망가트리고 있었다.
그의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디사는 그의 구두 한 짝이 망가지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러지 말고, 가자.”
“아직 하나 남았는데?”
“빨리.”
당황스러웠다. 행인들이 미친놈 보듯 보는 시선을 이해했다.
그러면서도 나디사는 걷는 동안 그의 망가진 구두에 시선을 몇 번이나 줬는지 모른다.
그래서 눈 감은 걸 수도 있었다.
히아신이 올바르지 않은 방향 쪽으로 걸어도. 그가 점점 모세스 가문의 저택에서 먼 방향으로 데려가도.
산책을 더 하고 싶은 것인가. 단순히 그건 나디사의 생각이었다.
더 하자면 못할 것도 없는 게 산책이지만, 그는 상가와 광장 쪽을 넘어서, 어떠한 작은 숲길로 그녀를 안내하고 있었다.
히아신은 쉬지 않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어 주며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던 나디사는 잠시 멈추어 서서 하늘을 바라봤다.
별이 쏟아질 것처럼 많이도 있었다. 나디사는 노랗게 뜬 달이 나무 뒤에 걸쳐 있는 것을 보고 그날의 파티를 떠올렸다.
즐겁고 행복한. 웃는 얼굴로 히아신의 옆에서 걷던 나디사는 뒤를 힐끔거렸다.
“너무 깊이 들어온 거 아니야?”
“다리 아파?”
“아니, 이제 들어가 봐야 할 때 아닌가 해서.”
스르르, 손이 내려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돌아가자는 말이 쏙 들어갔다. 손을 잡고 더 안쪽으로, 사람의 인기척이 끊긴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히아신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숲은 확실히 두려운 감이 없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저 수풀 사이로 누군가 튀어나와 가진 것을 다 내놓으라고 할 느낌이었다.
나디사는 침을 꿀꺽 삼키며 경계를 강화했다.
콧노래를 부르는 중인 히아신은 전혀 심각성이 없어 보이니. 누가 나타나면 대처할 수 있도록 주머니에 손이 갔는데.
아, 노디를 두고 나왔었다.
더 큰 일이었다. 이 위기감 없는 남자는 강도가 나타나도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 시간을 보낼 것 같았다.
“오늘 어땠어?”
머릿속에서 살인 사건 한 편이 써지고 있었던 나디사는 낭만적인 질문에 그 소설을 지워 버렸다.
기대감이 잔뜩 넘치는 그의 눈가를 보며 나디사는 피식 웃었다.
“좋았어. 내가 조금 멍청하게 굴긴 했지만.”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건 반칙 아닐지. 그는 모든 데이트 장소에서 허둥거린 기억밖에 없는 자신과 대비됐다.
“너는.”
“응?”
“이런 데이트, 많이 해 봤겠지?”
부끄럽게도 이건 그리사가 전에 지적한 적이 있었다.
이 나이 먹고서 데이트에 서투른 것은 그녀가 처음 같았다. 마벤도, 시네라도 어른의 데이트를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사실 나디사는 오늘 그에게 할 말이 있었다. 그의 데이트 제안에 덥석 그러자 한 것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단 얘기다.
주고 싶은 물건도 있었다. 이건 충동 구매한 것이 맞으나 이왕 산 것 주인에게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와는 황당한 일도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고마웠다. 돈을 빌려줘 라드군에 올 수 있었고, 그 이후로 돈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도 않는 중이었다.
“나는 여자랑 데이트해 본 건 나디사가 처음인걸.”
“……정말?”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진짜라는 듯이 웃고 있지만 히아신을 믿을 수 있겠나.
분명 저를 위로하려고 그러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기분은 좋았다. 나디사가 빨개진 뺨을 손등으로 누르며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는 그 순간.
길이 없다. 사람 키만 한 수풀에 뒤덮여 끝이 나 있는 길이었다.
“이제 가자.”
“나디사.”
그러나 히아신은 그 수풀을 굳이 손으로 거두어 내며 작은 틈새를 만들어 냈다.
그 틈새 사이로 무엇을 엿보고 있는 히아신이 빨리 보라는 듯이 그녀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어지간히도 들어가기 싫은가 보다. 아마 아무것도 없을 건너편을 보여 주고 싶은 그의 마음. 이날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
나디사는 그 마음에 동의하며 잡혀 주었다.
작게 벌린 틈새로 눈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나디사는 아무것도 없어야 할 수풀 건너편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이게…….”
이게 뭐람.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나디사가 멍한 표정으로 옆에 선 그를 돌아봤다.
히아신은 웃으며 수풀을 완전히 거두어 냈다. 수풀은 알아서 고개를 수그리는 듯했다.
계획적이었다. 이곳은 히아신이 준비한 마지막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