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나디사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땋은 머리를 살살 풀었다. 마벤의 도움은 고마우나 아무리 보아도 이건 아니지 싶은 것이다.
마른 천으로 입술에 바른 것까지 지우고 나니 봐 줄 만했었다.
그래도 마벤이 빌려준 머리 끈을 그냥 두기엔 아까워 하나로 질끈 묶었다.
“……이상한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히아신과 데이트 약속을 잡은 후부터 작은 소리에도 이렇게 놀라고 있었다.
혹시 몰라서 마벤에게 금화를 얼마 꾸기도 했다. 히아신이 돈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정작 본인이 맨 처음 그에게 돈을 빌린 것은 생각지 못하는 중이었다.
‘데이트하자.’
그 말에 자꾸 남은 돈을 세어 본 것도, 유리 진열장에 보이는 옷들에 눈이 가게 된 것도. 결국 마벤의 옷을 빌려 입었지만, 그와 만남을 조금 더 나중으로 미루고 싶어서 어물쩍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문고리를 힘없이 잡아서 연 나디사는 햇살이 쏟아지는 줄 알았다.
눈이 부시게 웃고 있는 히아신이 문 옆에 기대어 서서 추근거렸다.
“아까 그 머리 마음에 들었는데. 왜 풀었어?”
“이상해서.”
“하나도 안 이상했는데. 나는 어때? 이상해?”
히아신의 옷은 단정했다. 그답지 않게. 적당히 구겨진 하얀 셔츠와 단정한 회색의 바지는 그를 신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히아신은 팔 하나를 내밀었다. 나디사는 그걸 잡지 않았다. 경주하는 말처럼 그의 옆을 빠르게 지나쳐 걸었다.
“나디사!”
그는 뒤따라오며 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별관 복도를 뛰어가는 그녀와 바짝 따라붙는 발소리는 이내 정원에서 합이 맞았다.
나디사는 포기했고,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데이트는 환한 오전부터 시작됐다.
* * *
나디사는 화창한 햇살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비라도 오면, 그 핑계로 얼른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데이트를 해 본 적이 많지는 않으나, 오늘처럼 일찍 들어가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그와는 두 번째 외출이었다.
처음은 자의가 아니어서 그러한가.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히아신과 연극을 보러 들어온 뒤부터 가만히 있지 못하겠다. 나디사는 자꾸만 치마 끝을 늘이듯이 잡고서 이 시간을 견디는 중이었다.
의자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덕분에 누구 하나 말을 하면 연극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것치고 나디사는 꽤 집중해서 연극을 보았으나, 앞자리 연인이 입을 맞추는 장면을 본 후부터는 집중력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엇보다 자꾸 옆자리서 어깨를 붙여 와 불편해진 나머지 히아신 쪽으로 움직였다.
그 불편을 알아차린 히아신이 제 어깨를 감싸 안고 가슴에 기대게 한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확실히 히아신의 품에 있으니 사람끼리 부대끼는 것도 없고, 그의 팔을 등 받침 삼아 앉으면 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나디사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대고 완전히 그녀의 몸을 제 두 팔로 감싸서 안았다.
연극이 아니라 그의 숨소리와 향기 때문에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연극 중반에 오자 모든 연인들이 이렇게 붙어 있었다. 심지어 이 연극의 태반이 연인들이라서 입맞춤이나 포옹이 자유롭다는 사실도 그제야 안 것이다.
‘나디사.’
귓가에 거의 붙어서 이야기하는 히아신 때문에 나디사는 목을 살짝 움츠렸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어. 요약해서 알려 줘.’
나디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와 이렇게 붙어 있는 게 불편했지만, 자리 이동을 할 수 없을 만큼 빽빽한지라.
나디사는 억울한 눈빛으로 그를 슬쩍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재빠르게 눈길을 원래 자리로 돌렸지만, 뜨거운 입술이 따라와 그녀를 놀렸다.
쪽, 쪽, 지나치게 음탕한 소리가 제 볼에서 나고 있었다. 그가 입을 맞추는 소리에 목이 거북이처럼 들어갔다.
나디사가 거의 구겨져 있자, 히아신은 웃으면서 입맞춤을 그만두었다.
‘사랑해.’
연극의 클라이맥스.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파고듦과 동시에 무대 장치인 듯한 불꽃이 환하게 켜졌다.
옴짝달싹 못 하게 그에게 안겨서, 이 고통스러운 고백을 듣고 있는 건 정말이지 고행의 연속이었다.
나디사는 숨을 가느다랗게 내쉬며 치마를 쥐어짤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귓속말은 그만두라고 할 참이었다.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히아신의 고개가 비스듬히 내려왔다.
그의 얼굴 그림자에 먹혔다. 히아신은 손쉽게 달싹이는 입술을 핥고선, 그 입 안으로 들어왔다.
가벼운 데이트를 생각했다. 식사를 하고, 길거리를 걷고, 가끔 색다른 볼거리를 보면서.
그러나 이런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그와 입을 맞추고 있을 줄이야.
코끝을 스치는 향기와 제 뒷머리를 잡고 있는 손 때문이라고 하고 싶지만. 그런 것치고 나디사 또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연극을 보는 내내 뛰고 있던 심장과 불편한 마음은 그와 입을 맞추는 순간에 해소되었다.
달콤한 말과 더 달콤한 입술. 나디사는 감상적인 사람이 아님에도 이 극적인 대사만이 흐르고 있는 극장의 분위기에 취했다.
얼마쯤 그의 품에 안겨서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배우가 나와서 인사를 한 뒤 커튼이 닫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순간의 끝이 찾아왔다.
나디사는 아쉬움을 느끼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을 지경이었다.
연극 내용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옆자리가 일어나자마자 나디사 또한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입구에 몰린 관객들이 해가 저물고 있는 상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부유한 크리신의 사람들은 대체로 이 상가 거리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모양이었다.
이 천막 극단은 젊은 연인들을 위해 열리는 장소로, 체면이 중요한 젊은이들이 이처럼 깜깜한 곳에서 애정 표현을 하다가 가는 곳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나디사는 떠오르지도 않는 연극 내용을 열심히 기억하려 애썼다.
“배에서 소리 나.”
손을 잡아서 제 배로 끌고 간 히아신은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백이면 백. 사이 좋은 연인으로 알 것이었다. 그때 나디사는 헤지고 까진 자신의 구두 끝을 보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신발을 빌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매일 군화만 신고 다녀서 이 구두가 이만큼 닳았는지 몰랐었다.
히아신이 알아차리기 전 나디사는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아무 가게나 가리킨 뒤 그에게 말했다. 앉아야 한다. 얼른.
“저기 어때?”
“나는 나디사의 어떤 취향도 전부 존중하지만, 저기는 양초 가게 아닌가? 내 눈이 잘못됐나 봐.”
“배가 고파서. 얼른 아무 곳이나 가고 싶어.”
히아신의 눈에 약간의 당황스러운 기운이 스쳤다.
“음……. 아무 곳이나?”
“아무 곳이나 상관없어. 그냥 앉아만 있으면 돼.”
“내가 예약해 놓은 데가 있는데.”
“멀어?”
“어느 정도 거리가 나디사에게 먼 지 모르겠네. 저기 끝에 있는데.”
“빨리 가자.”
나디사는 불이 난 사람처럼 구두 앞쪽을 숨기기 위해 그의 팔목을 잡고서 잡아끌었다.
뜀박질하다시피 하는 그녀에게 히아신이 끌려갔다. 그는 웃으며 그녀와 보폭을 맞추었다.
“배 많이 고프구나. 우리 공주님.”
그러나 나디사는 그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히아신은 가뿐하게 그녀와 속도를 맞추었다.
구두 앞은 절대로, 절대로 들키기 싫은 나디사는 더 빠르게 달렸다.
어느새 두 사람은 상가 거리부터 광장까지 이어지는 길을 마차에 비견되는 속도로 달려올 수 있었다.
나디사는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눈을 질끈 감았지만, 히아신은 그런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농담이나 따먹고 있었다.
“가게를 통째로 먹겠다고 해도 괜찮아.”
솔직히 그렇게 배가 고프진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뛰어왔으면, 그의 말대로 식당까지는 아니더라도 식탁 먹는 시늉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나디사는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제발 비가 오거나, 아니면 이 데이트를 시작하기 전으로 시간을 돌리거나.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에 빌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