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복귀 명령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전서구를 날려도 답이 오지 않아, 그들은 약속했던 이틀을 넘어 사흘째 이 숙소에서 머무르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부대가 없어진 것 아니야?”
여름을 보내기 좋은 크리신의 숲이었지만 복귀 명령 없이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을 순 없었다.
과거에 복귀 명령이 없어도, 그것을 직접 알아보지 못했다고 호되게 혼이 난 적이 있었지 않은가.
아트리스는 과오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수시로 전서구를 날리고 밖으로 나가 수도의 소식을 알아보는 등 전방위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복귀 명령 없이 모레를 출발 날짜로 잡았다.
모세스 가문의 가주는 아이의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들 덕인 것 같다고 헤어짐을 아쉬워했지만, 군인인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듯했다.
덕분에 그들은 전례 없던 행복한 휴가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경치는 끝내주고 음식과 침구는 최상위의 것만을 쓰는 중이었다.
“여기에 익숙해져서, 돌아가면 짜증부터 나겠는걸.”
“그러게.”
“식사도 내 입맛에 딱인데.”
“그러게.”
“그리고…….”
마벤은 나디사의 방에 놀러 와 테라스에 테이블을 펴 놓았다. 그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려 둔 채로 차가운 멜론을 먹던 마벤은 고개를 휙 들었다.
테스트하는 심정으로 마벤은 말을 막 내뱉었다.
“여기 사람들이 전 재산을 나한테 주면 좋을 텐데.”
“그러게.”
“아트리스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그러게.”
“야!”
마벤의 날카로운 외침에 몽롱한 꿈을 거닐던 그녀의 정신이 돌아왔다.
마벤은 딱 걸렸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이거 봐, 이거 봐. 관심 없다더니? 어?”
“뭐가?”
“지금까지 내 말 안 듣고 있었지!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빨리 말 안 해?”
마벤은 저 답답한 여자가 말하지 않더라도 말을 하게 만들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녀를 괴롭힐 방법은 많았다. 간지럼을 잘 참지 못하는 나디사의 발에 깃털로 간질간질하면 못 참고 얘기할 터인데.
“마벤.”
“어?”
망설이는 나디사가 한숨을 폭 내쉬고는 빨개진 뺨으로 말을 이었다.
고문하지도 않았는데 순순히 불기 시작하는 포로를 보며 마벤은 흥미가 살아났다.
“나 옷 좀, 빌려줄래.”
“뭐? 뭐를 빌려줘?”
“옷 좀…….”
마벤은 정말로, 진심으로, 올해 들었던 이야기 중에 가장 놀라고 있었다.
이 더운 여름날 맛이 가 버린 게 아니고서야 나디사 마로닌이 저런 얼굴을 할 수 없었다.
“데이트 상대가 누군데?”
이번에는 나디사가 경악하듯 눈을 굴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마벤을 향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이 멍청이! 당연히 여자가 옷 빌려 달라고 하면 데이트하는 거지!”
마벤은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이 격의 없이, 동료로 지내고 있긴 하지만 나이로 따지자면 그리사 다음밖에 되지 않았다. 어린 축에 속한다는 소리였다.
그에 반해 아트리스, 시네라, 그리고 히아신은 나이가 꽤 있었다. 꽤라고 해 봤자 서너 살 차이지만.
여하튼 지금 서너 살 차이라고 해도 나디사처럼 물정 모르고 산골에서 살다 온 여자애가 당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마벤은 목이 말라 테이블 위에 있던 물잔을 한 번에 비우고 일어서서 테라스를 서성거렸다.
그 정도로 나쁜 놈은 이 부대에 없다고 믿고 싶으나 남자는 믿을 수가 없는지라.
“마벤. 옷, 못 빌려주겠어?”
“지금 옷이 문제야? 그딴 건 백 벌도 빌려줄 수 있지만, 그, 데이트 상대가 누군데.”
마벤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었다. 제발, 부디, 그런 싸구려 연극처럼 남자 하나를 두고 친구와 싸우고 싶진 않았다.
나디사의 입에서 아트리스가 튀어나올까 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히아신.”
하아, 마벤은 안도감에 난관을 잡고서 섰다. 반쯤 드러누워 뜨거운 태양을 바라본 마벤은 이내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왜 걔랑 데이트 나가는데 옷까지 빌려 입어?”
히아신 아스의 치근덕거림은 오늘 내일이 아니었기에, 아트리스와 마벤을 제외하면 익숙해진 참이었다. 당사자인 나디사조차도.
아트리스는 히아신과 자주 말다툼을 했고, 서로 비꼬는 수준이 넘어가면 마벤이 들어가 아트리스를 끌고 나왔기에 마벤도 히아신이 오면 저절로 긴장감이 들었다.
게다가 그는 이상한 물약으로 그녀를 회유하려 한 적도 있으므로. 같은 동료라고 하지만 그는 어쩐지 동료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디사.”
“응.”
“그 데이트, 안 하면 안 돼?”
“왜.”
하지만 아뿔싸. 친구의 마음은 보지 못했었다.
실망한 듯 눈꼬리가 내려간 나디사는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이 데이트를 고대한 모양이었다.
물론 히아신 아스가 반반하긴 했지만, 마벤은 그처럼 뱀과 같이 음흉한 남자에게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아트리스처럼 단정하고 금욕적인 남자가 그녀의 취향이었다.
“너랑 안 어울려.”
본심을 숨기고 대충 얼버무리며 말하자 나디사는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로 말했다.
“계속하자고 그러니까…….”
말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아트리스나 그리사나 시네라가 데이트하자고 그랬다면 옷은 뭐 입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벤은 나디사의 변화가 기쁘면서 아쉬웠다.
하필 많고 많은 남자 중에 그런 것이란 말인가. 로사 가문의 이름으로 꽤 괜찮은 상대들과 연결시켜 주고팠다.
“이리 와 봐.”
마벤은 나디사의 손목을 잡고서 제 침실로 이끌었다. 가지고 온 커다란 가방을 열었다. 가장 길고, 입지 않는 옷을 빌려줬다.
그것만 해도 나디사는 좋아서 웃는다.
“고마워, 옷 살 돈이 없어서.”
“매달 집으로 보내는 것 말고도 따로 모아 두었잖아. 어디다 썼어?”
술도, 담배도 크게 흥미가 없는 나디사는 거의 신관처럼 아끼고 살았다.
나디사는 그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치마를 그 자리에서 갈아입었다.
셔츠는 제 것을 입으려고 하기에, 윗도리도 하나 빌려주었다. 그런데 저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여기 앉아 봐.”
마벤은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하여 가지고 다니던 치장 도구와 머리 끈을 꺼내었다.
빗질도 잘 하지 않는지, 나디사의 머리카락은 뻣뻣했다.
빗질을 여러 번 공을 들여 해 주자 그제야 빗이 머리를 부드럽게 빗어 주었다.
“빗질 좀 하고 살아.”
“응.”
“이게 요즘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이야.”
거짓말이었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고서, 치마와 색 조합이 맞지 않는 갈색 머리 끈으로 묶어 두었다.
한순간 소녀처럼 된 나디사는 거울을 보면서도 갸웃거렸지만, 큰 반항을 하진 않았다.
“입술은 이걸로.”
거기에 빨간 립까지 칠해 주니 나디사의 얼굴은 길 잃은 소녀가 갓 화장을 배운 것처럼 변해 있었다.
“음……. 조금 이상해 보이는데.”
“전혀. 이게 요즘 유행 스타일이라니까?”
“유행 상관없이 옷만 빌릴게.”
“너, 너 히아신이 어? 그, 같이 다니는데? 어? 예쁘게 하고 가야 될 거 아니야!”
히아신이 이 얼굴을 보고 오늘은 데이트하지 못하겠다고, 다음에 하자고 했으면 좋겠다.
마벤의 말에 의심을 하지 못하는 나디사는 조용히 끄덕거릴 뿐이었다.
“하긴.”
뭐가 하긴이야. 어디 가서 사기당하기 좋은 그녀의 친구는 거울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일어나.”
“왜?”
“가서 몇 시에 만날 건지, 어디에 갈 건지. 어? 묻고 와야 될 거 아니야.”
그런 것은 보통 남자 측에서 통보하는 일이지만.
마벤은 그녀가 빨리 차이길 바라는 마음에 작품이 완성되자마자 그녀의 손목을 잡고 남자들이 있는 방으로 건너갔다.
“마벤, 나디…….”
복도 창가에 서서 셔벗을 먹고 있던 시네라가 나디사의 얼굴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는 또 어떻고.
시네라의 표정을 보고 확신을 얻은 마벤은 히아신의 문을 쾅, 쾅, 두드렸다.
“히아신!”
감히 데이트 신청을 해? 아스 가문이라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양아치 같은 놈. 쿵, 쿵, 그녀의 거친 노크가 계속되자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나디사는 퍽 곤란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연 히아신은 마벤을 보자마자 무표정하였으나, 그 바로 옆에 선 나디사를 보고 잠에서 깬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때. 이 꼴을 보고도 데이트 소리가 나오나 보자.
하지만 충격은 끊이지 않는다. 바로 꽃처럼 해사하게 웃은 히아신은 팔을 뻗어 나디사를 꼭 끌어안았다.
“아, 예뻐.”
미친놈. 미친놈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