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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83화 (83/210)

83화

라이는 갑작스레 쓰러졌다. 계부는 아이를 쓰러트린 히아신을 바라보고는 큰 충격에 빠진 얼굴로 손을 떨었다.

“지금,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슬픈 건가, 기쁜 건가. 알 수가 없다, 진짜.”

“뭐라고?”

“요즘 사람들은 연기를 워낙 잘해서 말이지. 나도 헷갈려, 가끔.”

라이의 계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일어섰다.

두 다리는 달달 떨리고,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히아신은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것을 꺼냈다. 그의 손수건이자 솔직한 마음을.

그러자 덜덜 떨고 있던 그의 다리는 평정을 되찾았다.

아들을 걱정하던 눈동자는 차분해지고, 입술은 긴장하여 마르기 시작했지만 걱정 때문은 아닐 거다.

손수건에 밴 향기를 맡은 히아신은 웃으며 그것을 흔들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라이의 계부는 알아차린 것처럼 혀를 놀렸다.

“무엇을 원하지?”

협상의 테이블을 깐다. 하기야. 사랑하는 연인에게, 그이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게 알려진다면, 그는 아마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돈, 명예, 지위.”

그러다가 눈빛이 변하여 금방이라도 히아신의 목을 조를 것처럼 살기를 띠었다.

“어떻게 알았지? 또 누가 알고 있어. 너희 동료들은 다 알고 있어? 설마, 설마 그녀가 그것 때문에 너희들을 불렀나?”

“아우, 시끄러워.”

가만히 들어 줄 수 없다는 태도로 히아신은 손수건을 떨어트린 뒤, 그것을 발로 잘근잘근 짓밟았다.

“식당에서부터, 아니, 너희를 소개받았을 때부터. 결정적인 건 식당이긴 했지. 코도 안 나오는 애한테 굳이 같은 손수건으로 닦아 주는 게, 좀? 그렇잖아?”

파르난에서 나는 약 냄새가 그 손수건에서 날 때부터 전말은 파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친절할 수 없는 상황인데 과하게 친절하단 말이지. 사랑할 수 없는 아이를 사랑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부들거리는 손을 숨기지 못한 남자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무얼, 무얼 해도 좋으니 그녀에게 알리지만 말아 줘. 부탁이야, 부탁을…….”

라이에게 이 장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은, 아마도 신의 뜻을 그가 너무도 잘 따랐기 때문이었다.

흉측한 진실은 숨기고, 아름다운 거짓은 그가 깨트리도록.

히아신은 무릎 꿇고 울고 있는 사내의 앞으로 느긋이 걸어갔다.

“네 아내의 잔에 독을 넣었어.”

“……뭐라고?”

“내가 손가락만 튕기면 네 아내는 즉시 목숨을 잃을 거야. 내 것은 네 것보다 효과가 좋거든.”

이게 진짜 모습이었다. 양아들이 쓰러졌을 때는 나오지 않던 진심으로 공포에 질린 얼굴.

엎드려 빌던 그가 말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기에, 진심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는 거겠지.

오, 그런 사람은 질리도록 보았다. 너무 질려서, 누군가와 정상적으로 헤어지고 사랑에 권태를 느끼는 이들이 대단해 보일 정도였다.

“제발, 그녀를, 차라리 나를…….”

“당연하지. 나 은근히 다정해.”

경악하는 그의 턱을 붙잡았다. 별의 호수를 탐험하고 있는 양아들을 바라보도록 했다.

“네 벌이다. 평생, 죽을 때까지, 저 아이가 아버지의 질투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사랑해 주도록.”

“뭐, 뭐…….”

“한순간이라도 소홀해지면 내가 생각날 거야. 이건 그런 마법이거든.”

한번 눈을 감아도 떠도 생생한 지옥에서 살아 보라지. 몇 달만 더 고생하면 죽일 수 있었을 텐데.

그 안타까운 후회를 가슴에 품고서 사는 것도, 누군가를 때리고 할퀴고 싶은 손으로 사랑하는 척 끌어안고 사는 것도.

그런 삶도 괜찮다면 기꺼이.

그리고 남자는 그 삶을 받아들였다.

다행히 사랑하는 사람의 지옥보다 제 지옥이 낫다고 판단한 부류였다.

멍청하고 저질스러운 이가 여기에 또 하나 있었다.

히아신은 콧노래를 부르며 그 지옥 같은 삶을 받아들인 남자와 은하수 왕자의 옆에서 떠나갔다.

얼마 안 봤다고 벌써 보고 싶었다.

그 작은 날개를 단 요정 옷을 입으며 뛰어다니던 그녀를 떠올리자 히아신은 웃을 수 없었다.

너무 그 여자하고 똑같은 것 아니야. 춤이나 편지, 다정한 성품까지.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은 어머니가 종종 그녀 때문에 머릿속에 나타났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은 여자가. 말수도 별로 없는 여자가. 떠오를 때마다 안 좋은 기억들뿐이라서 감탄이 나왔다.

“히아신.”

작은 별관으로 돌아가려던 히아신은 숲길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나디사를 보며 두 다리가 풀릴 뻔했다.

해벗 종족은 누구나 이 운명을 증오했다. 하지만 제 신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행복을 주장하고 다녔다.

이런 삶을 초월하는 감각을 느끼게 해 주는 상대. 그 상대를 창조한 이 세상에 무한한 감사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왜 그쪽에서 오는 거야.”

“음, 산책?”

아, 도저히 껴안지 않고는 못 살겠다. 히아신은 그녀를 꼭 끌어안고 온몸을 그녀에게 묻힐 기세로 늘어졌다. 무거운 제 몸을 이게 된 나디사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무거, 워.”

히아신은 가여운 그녀의 몸에게서 자신을 떼어 냈다.

그사이 힘을 주느라 빨개진 볼에 입술을 묻고 깊게 눌렀다. 나디사는 아마 그럴 것이다. 미쳤구나.

저를 기다렸다. 제 부재를 알아차리고, 어디서 올지 짐작까지 하고, 여기에 서서 제 이름을 불렀다. 히아신.

그 일련의 행동들 하나하나가, 그리고 그 생각을 굴린 머리와 시행한 두 다리와 저를 보는 눈까지.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부수고 싶은지. 나디사는 모르고 있었다. 모르니 웃고 있지.

“나, 생각해 봤어.”

“내 생각을?”

“아니……. 네가 질문한 것.”

그때 히아신은 조금 긴장하고 말았다. 그녀가 답을 주지 않았기에 그가 답을 내리고 온 길이었다.

만약 그녀의 답이 그의 답과 다르면 어쩌지. 다른 걸 바랐다면.

그건 조금 끔찍한 일이었다. 히아신은 지금의 답이 마음에 들어, 바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신과 자신의 의견이 부딪친다면 가슴이 아파 올 것이었다.

하지만 히아신은 티 내지 않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대답을 종용했다.

“나는, 흉측할지라도 진실을 택하겠어.”

히아신은 기쁘게 웃었다. 맞추었다. 자신이 정답을 맞히었다.

신의 뜻이 그것임을 알지만 히아신은 사실 두 개의 선택지를 전부 모른 척 살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제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해 그녀에게 안겨 주었다.

그녀는 비록 이 선물이 무언지 모를 테지만. 그 소년을 퍽 안쓰럽게 바라보지 않았던가.

이런 쓸데없는 일에 나서게 하는 데에 그 눈빛이면 족하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그 변화가 증오스럽고,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러니 말해 줘. 흉측한 진실이 무엇인지.”

히아신은 사랑하는 신의 뺨에 입술을 묻고서 아쉬워하며 떼었다. 감도 좋으시다.

그가 장난삼아 던진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이 작은 머리로 죽어라 고민하고 있었을 것 아닌가.

상상만으로도 몸이 떨리게 귀여웠다.

“음, 계부가 제 양아들을 질투해서 독이 묻은 물건으로 암살을 시도하려고 해.”

그리고 진실을 들은 그녀의 눈에는 찬란하던 별이 하나, 둘 부서졌다. 이렇듯 진실을 감당할 수도 없으면서, 진실을 탐내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나디사는 이성에 제어를 걸고, 그의 말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농담하는 거지.”

히아신은 생각했다. 왜 굳이 선택을 해야 하는가. 상황에 맞게, 입맛에 맞게 골라 먹으면 되는데.

하지만 히아신은 나디사의 식성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특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적당히 덮어 두는 게 잡음이 나지 않는다.

“라는 상상을 해 봤어.”

“……진짜야.”

“진짜야. 하늘에 계신 수비교의 신께 맹세해.”

히아신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조금은 안심한 듯 나디사는 제 가슴을 눌렀다.

그러고는 여기에 온 이유가 생각난 것처럼 주머니 속에 있던 펜던트를 꺼냈다.

“이거 네 거.”

“나디사가 내 것을 챙겨 줬어? 고마워.”

나디사는 표정을 풀지 않은 채로 다시 한번 물었다.

“아까 그거 정말 농담이지.”

“그럼.”

“그래…….”

히아신은 그녀와 손을 잡고 숲길을 걸어 그들의 별관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흉측한 진실이라도,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것일 터. 환술쟁이가 준비하는 진실. 과연 그녀의 입맛에 맞을지 걱정이었다.

걱정일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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