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남은 시간은 닷새. 상가를 각자 들려 아이디어를 찾아보던 건은 갑자기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고로 인하여 두 팀으로 갈라지게 되고 말았다.
그리해서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마주한 이들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히아신은 능청스럽게 포도를 먹으며 대화에 참여했지만, 아트리스는 그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히아신은 마벤이 핀잔을 주려고 눈을 뜰 때마다 제 입술에 앉은 딱지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한 마디 얹었다가 두 마디가 되고, 공들여 이 댁 하녀들이 만든 식탁이 어지러워질까 봐 말을 삼켰다.
테이블은 히아신과 아트리스가 싸우는 이유에 대해 은근히 그 기류를 눈치챈 이들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이들로 나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 일등인 나디사가 목소리로 살얼음을 깼다.
“이건 어떨까.”
가주가 아들인 라이가 하고 싶은 것을 적어 준 쪽지였다.
밤하늘의 별. 그리고 라드. 그가 좋아하는 것을 조합하던 나디사는 그 쪽지를 식탁에 올려 뒀다.
“아니, 계속 보던 게 그거야?”
“다들 이거 생각하고 있었잖아.”
한숨을 아무도 쉬지 않는데도 한숨이 들리는 기분이었다.
오로지 히아신만이 건들건들 의자를 뒤로 젖혔다.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만지고 떠난 그는 얼굴에 웃음이 넘쳐흘렀다.
“나디사의 계획은 무엇인지 들어보자.”
히아신은 의자를 흔들거리며 나디사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꼬았다.
그러면서 은근히 아트리스를 쳐다보며 비웃었다. 아트리스 메놈의 눈꼬리에 점점 불길이 일던 찰나.
“저녁 즈음에 노디로 숨결을 이끈 다음, 거기에 불꽃을 붙이면 멀리서 별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걸로 우리끼리 별을 따 왔다고 하던가, 그렇게 말을 맞추면 어때.”
포도 껍질을 벗기며 성의 없이 듣고 있던 마벤은 눈썹을 찡긋 올렸다.
“꽤, 괜찮은 계획인데.”
“나쁘지 않아요.”
“나도, 동의야.”
그리고 나디사는 아까부터 벌처럼 꼬여서, 제 머리카락을 가지고 노는 손을 보지도 않고 잡아서 치웠다.
부드럽게 물러간 손의 주인은 웃으며 답했다.
“그게 무엇이든 찬성할게.”
나머지는 아트리스. 제게 시선이 몰린 것을 안 아트리스는 고개를 들어 나디사를 바라봤다.
그는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 얼굴임에도 친절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잠시 빌려주겠어.”
나디사는 들고 있던 펜과 메모지를 그에게 건넸다.
아트리스는 빠르게 진용을 짜서 그리고, 나디사의 말대로 언제쯤 불이 들어오게 하는 게 좋을지 적어 넣고 있었다.
안 들은 척하면서 다 듣고 있었구나. 아트리스의 옆에 앉아 있던 마벤은 상큼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마음은 다 풀린 것처럼 보이는데?”
“마음 상한 적 없어.”
아트리스의 냉담한 대답에도 마벤은 타격이 없었다.
그걸 본 그리사는 살짝 고개를 기울여, 나디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벤이 대단해 보이지 않아요?”
“동감이야.”
아트리스가 쓴 계획서를 유심히 보던 시네라는 손뼉을 가볍게 쳤다.
“그럼 어, 가주님에게 보고도 올려야겠다. 그리고, 음, 뭐 하지.”
“보고는 내가 올리고 오겠어. 너희는 이 대형에 맞춰서 연습하고. 이 댁 아들 눈에 띄면 안 되니까 가주에게 연습할 만한 장소가 있는지 물어보고…….”
정신을 차린 듯 빠릿빠릿해진 아트리스가 지시하는 동안 야외에는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지금처럼 적당한 날이 생일 파티 전까지 이어지면 더 바랄 게 없으련만.
그 바람이 식탁 위를 지날 때 즈음 발톱 부대는 낯선 기척을 느끼고 대화를 멈추었다.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
도련님 담당 하녀로 보이는 이가 그들의 시선에 꾸벅 허리를 숙였다.
하녀 치마 뒤에서 얼굴을 내민 라이를 보며 모두 제멋대로이던 자세를 바르게 바꾸었다.
나이는 어려도 그들의 의뢰인이자, 이 집 주인이나 다름없는 이였다.
“라드를 보여 준다고 했어요.”
“불편하시면 편하신 시간에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식사가 한창이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식기를 다시 드는 이는 없었다.
시시각각 깎이고 있는 저 아이의 수명만큼이나 창백한 피부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게 했다.
“아닙니다. 식사는 끝났습니다.”
아트리스는 일어나 장갑을 끼며 그들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가주에게 간다는 의미였다.
아트리스는 라이를 지나치며 그에게도 인사를 했다.
라이는 아트리스가 무서운 듯 하녀의 등에 숨었지만, 그 여린 시선은 그가 입은 하얀 군복을 동경하고 있었다.
“언제 다시 올까요?”
아트리스가 떠난 게 거절의 의미라고 생각했는지 하녀가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모두 일어나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지금 가죠? 혹시 라이 님이 걷기 어려우면 이리로 라드를 부르고요.”
“아닙니다. 너무 가만히만 있으셔도 몸에 좋지 않거든요.”
마벤과의 대화에 한시름 놓은 표정인 하녀는 라이의 손을 잡고 그들 앞으로 걸어왔다.
몸은 약하지만 라드를 본다는 생각에 눈을 빛내며 힘차게 걸어오는 소년을 보고 마음이 따듯해졌다.
나디사는 어린 금발의 소년을 보며 슬픔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다른 어떤 임무보다 이 임무에 몰입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샤포드에서는 어린아이가 누구보다 귀했다. 추위를 견디고서 자라난 가녀린 새싹 같은 아이들은 그 가난한 지역에서도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어제, 그 행복한 식탁. 좋은 아버지와 사랑스러운 아들의 모습이었다. 아이가 제 운명을 모르고 행복해하는 게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나디사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 * *
하녀는 어린 소년이 움직여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뙤약볕이 심한 정오에 가까워지자 소년은 땀을 비 오듯 흘렸다.
결국 직접 마구간에 가서 본인들의 라드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별관의 정원은 라드 다섯 마리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으며, 소년이 쉴 만한 그늘막도 만들어져 있었다.
그늘막 의자 위에 소년이 앉았다.
제 앞에 모인 다섯 마리의 라드를 보며 상기된 소년은 수줍음을 이기고 질문 공세를 했다.
“만져도 되나요?”
“네.”
그리사의 말에 에이가 라이의 발밑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목이 긴 라드를 보며 처음엔 꺄아 비명을 지르던 라이도 용기를 냈다. 손을 내밀어 천천히 에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매끈매끈해.”
손을 움츠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라이는 아픈 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밝은 얼굴이었다.
“라이.”
그때 계부의 목소리가 소년의 웃음을 한층 더 키웠다. 소년은 의자에서 내려와 계부에게로 달려갔다.
행복하게 포옹하는 부자를 보고 그리사는 휘파람으로 에이를 일으켰다.
“어머, 그건 또 언제 훈련시켰대.”
“훈련하지 않아도 주인의 뜻을 아는 게 라드거든요.”
“또 잘난 척은.”
그리사와 마벤의 말다툼을 듣고 하녀는 코를 닦는 척하며 웃음을 참았다.
나디사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라드에 대해 쫑알거리는 라이를 볼 때마다 쓰린 마음을 다잡았다.
“나디사.”
아이의 웃음소리가 정원을 밝혀 주고 있는 여름날. 뱀처럼 속삭이는 소리는 나디사의 머리카락 사이로 기어 들어왔다.
“아름다운 거짓과 흉측한 진실 중에 무엇이 나을까.”
녹은 사탕보다 더 끈적거리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이 임무는 나디사에게 어떤 의미를 찾는 과정 같은 것이었다.
친모처럼 이 일에 목숨 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자신은 어느덧 이 일이 너무 소중해져 버렸고.
그런데도 왕세자의 파티에 끌려다니며 이 일에 대한 의미를 퇴색시켰고, 지금에서야 다시 라드를 모는 건 누군가의 꿈이었다는 걸 상기시키는 중이었다.
이 여름날을 뚫고 들어온 그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불길한 예감을 가져왔다. 나디사는 그를 보지 않고서 대답했다.
“왜 묻는 건데.”
“네 의사를 존중하고 싶어서. 나는 관심 없는 일이지만, 너는 관심을 갖고 있는 중이잖아. 그게 나한테는 중요해.”
나디사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단순한 질문 같아 보이지만, 이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건 그 질문이 저 아름다운 부자를 겨냥한 것 같아서였다.
“내 생각대로 해도 된다는 거군. 알겠어.”
그리고 대답을 미룬 사이 히아신은 결정을 내렸다.
나디사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여름날 아래, 그의 녹색 눈은 더없이 이 날씨와 잘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