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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78화 (78/210)

78화

모세스 가문의 가주는 영지 일로만 해도 바빠서 죽겠는 입장이었다.

무엇보다 가족끼리 남은 시간을 보내는 것에 집중하느라 생일 파티에서 열리는 라드군의 입장 같은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기는 했다.

차라리 지시라도 해 주면 편할 텐데. 라드군만이 보여 줄 수 있는 특별한 공연 같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상가를 발 아프게 돌아다녀 봤자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나디사는 히아신의 입술에 약을 발라 주고선 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사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히아신과 나디사 사이에서 걸었다. 이유는 이랬다.

“걷다 보면 또 마주칠지도 모르고. 때린 것 때문에 편을 들긴 했지만 그쪽이 어떻게 말했을지 예상이 안 가는 것도 아니거든요.”

라는 이유로 히아신은 그리사의 옆에 서서 걸었다. 하지만 그는 나디사와 눈만 마주쳐도 난리인지라.

“나디사하고 데이트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반 정도 나고 있어.”

“나도 있으니까 허튼짓 말아요.”

“그러니까 반만.”

나디사는 꽃집에 들러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것도 딱 마음에 꽂히지는 않았다.

아이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생일이 되게 하고 싶었다. 꽃은 평범한 듯했다.

나디사는 하얀 꽃망울을 스치듯 만지고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마벤이 말한 게 제일 나을까.”

“설마 아이를 태우고 한 바퀴 날자는 그거요.”

“그거 말고는…….”

의외로 의견이 맞는 듯 히아신과 그리사가 시선을 교환했다.

히아신은 꽃집 앞에 쪼그려 있는 나디사의 손을 잡아 천천히 일으켜 줬다.

“나디사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고 따라 주고 싶어. 그런데 그 애가 죽으면 곤란하지 않겠어?”

“나도 동의해요. 만에 하나 날고 있다가 죽으면 그 책임은 우리가 지게 된다고요. 너무 무모한 일이죠.”

라드군이 되고 싶다는 것 치고 수줍음이 많던 아이. 나디사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생일 파티 같은 것을 해 본 적이 있어야 알지…….”

“파티를 해 본 적이 없다고요?”

“정식으로 해 본 적은 없어. 다들 그렇잖아.”

“다들 그렇지 않죠.”

그리사의 말에 나디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가 생일마다 파티를 치를 형편이 되는 건 아닐 거다. 그렇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리사의 표정은 그 반대를 말하고 있었다. 하지 않는 쪽이 소수라고 말하는 것이다.

“……생일이 언제인데요.”

“12월 1일.”

대답은 나디사가 아닌, 히아신에게서 나왔다.

대답이 나온 쪽을 어처구니없는 눈길로 보던 그리사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재킷을 거칠게 내렸다.

“둘이 무슨 사이예요?”

히아신은 달콤한 눈빛으로 그리사의 옆에 서서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모시고 있어.”

“뭐라고요?”

“이 가슴에.”

나디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그리사가 구역질 난다는 듯이 혀를 내밀고 있을 때였다.

여름철의 하얀 돌길을 지나는 마차가 굴러왔다.

저녁 식탁에서 히아신과 아트리스를 붙여 놓을 수는 없으니 바깥에서 먹고 가자고 얘기가 나온 참이었다.

반만 데이트하는 것 같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이 시끄러운 모임은 마차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경들.”

마부가 문을 열어 준 마차 안에는 황금빛의 여인이 타고 있었다. 모세스 가문의 가주와 그의 새 남편. 그리고 어린 아들이 호숫가로 마실을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 같았다.

“지나가다가 보았는데 정말이었네요.”

“조사차 나왔습니다.”

“라이, 입이 닳도록 라드에 대해 얘기하더니 왜 또 조용해졌니.”

계부의 뒤로 숨은 라이를 보며 셋은 각자 다른 표정을 지었다.

나디사는 안쓰러움을, 그리사는 관찰을, 히아신은 무표정이었다.

“괜찮으시면 같이 식사하시죠.”

계부와는 처음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었다. 모세스 가주는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재차 권했다.

“식사를 이미 하셨거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요.”

그녀는 막대한 금액을 라드군에 내어 주고 그들을 얻어 왔다.

단순한 어린애 생일 파티라고 하기엔 그 금액과 가문의 위상이 장난이 아니었다.

활동비라고 내어 준 금액이 평상시와는 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를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저녁 메뉴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 *

예약한 식당이 있다기에 가볍게 따라나섰으나 모세스 가문의 가주는 통째로 빌려 둔 참이었다.

빈 테이블이 즐비한 가운데에 그들만이 있다는 것이 몹시 어색했다. 모세스 가문의 가주는 익숙한 듯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크라신에는 처음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여기저기 여행해 봤지만 동부에서도 크리신만큼 아름답고 살기 좋은 데는 없어요. 내가 영주라서가 아니라.”

히아신은 비싼 포도주를 잔에 가득 따라 준 직원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모세스 가주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요즘 라드군은 평가 항목에 외모를 넣어 두기라도 하나요.”

식사를 하던 나디사와 그리사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 그녀를 쳐다보자, 유쾌한 모세스의 가주는 포도주를 입에 머금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만난 수장도 그렇고. 여기 앉아 계신 다른 분들도 그렇고. 모두 외모가 하나같이 출중하시니 말이에요.”

“부인.”

“나쁜 말도 아닌데요.”

“그렇지만…….”

부인을 대신해서 사과한다는 듯이 눈을 찡긋거린 그녀의 남편은 어린 아들을 챙기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또 코가 나왔구나.”

손수건으로 더러워진 입가와 코를 풀게 하는 그는 계부로 보이지 않았다.

여덟 살이 가까워지는 나이치고는 몸집이 작은 라이는 계부의 손에 고 작은 얼굴이 찰흙처럼 뭉개지면서도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진 모양인지 라이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라드, 이름 있어요?”

워낙 조그마한 목소리로 웅얼거려 정확히는 들리지 않았지만, 상황으로 유추해 낸 그리사가 대답했다.

“있습니다.”

“뭐예요.”

“저는 에이라고 불러요.”

그리사는 옆에 있는 두 사람의 로마와 디디까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안색이 확 밝아진 라이는 발을 흔들며 상체를 식탁 가까이에 붙였다.

“내일 보러 가도 돼요?”

이제껏 라드들이 마구간에 있어도 비가 와서 보러 가지 못했다고 들었다.

라드는 주인이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이빨을 드러내는 이들이 아니니 큰 위협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어 주인 외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았다.

“오, 그것 좋겠다. 그런데 시간이 되실지 모르겠네?”

“시간이 나면 연락 넣도록 하겠습니다. 수장에게 이야기해야겠지만 오래는 빼지 못할 듯하구요.”

“당연하죠. 그나저나 말이 나와서 말인데 다른 분들은 어디에 있죠?”

수장을 눈으로 찾는 느낌이긴 했다. 내부 사정이긴 하지만, 그리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나디사, 히아신보다는 저가 대답하는 게 나을 듯해서.

“따로 나눠서 일을 하기 때문에.”

“아, 그렇구나.”

“그리 캐묻지 마세요, 부인.”

“알겠어요, 남편.”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는 모세스 부부는 사랑이 가득했다.

보기에 좋아서 저 두 남녀가 비로소 부부가 된 것을, 축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 불러 놓고 뭐 하냐고 하겠다. 창피하긴 한데 우리가 서로를 부인, 남편으로 부르는 게 워낙 감격적이라서.”

“보기 좋아 보입니다.”

그리사의 감정 없는 칭찬을 듣고 모세스 가주는 피식 웃었다.

“사툰 종족은 사툰이랑 해야 한다고 아버지가 어찌나 반대를 하던지. 음? 입맛에 안 맞으세요?”

“아……. 아닙니다.”

모세스 가주는 식기를 내려놓은 나디사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사가 먹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귀엣말을 전하려 하는 순간, 나디사는 라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라이 님께 질문이 있어서요.”

아버지에게 고기를 얻어먹던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상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모세스 가주의 눈이 흔들렸다. 마지막을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 생일 파티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오는 눈이었다.

라이는 제 어미의 심정을 모르는 듯이 천진하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음, 그렇구나.”

모세스 가주의 눈이 빛났다. 라이의 말을 다 들은 가주는 슬픔을 감추며 그들에게 눈인사를 했다.

물어보길 잘했다. 가주는 곧 곁에 있던 직원을 시켜 메모장과 펜을 가져오게 했다.

유려한 글씨체로 메모를 적어 앞자리로 넘긴 그녀는 이 슬픔을 잊으려는 것처럼 행복하게 웃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돈으로 가질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걸, 그들에게 알려 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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