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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76화 (76/210)
  • 76화

    오늘도 문전 박대 당할 것을 각오하고 기도회에 참석한 란은 그날 이후로 따라붙게 된 하급 신관을 물렸다.

    “더 들어오지 마.”

    “하지만 윗분들 명이…….”

    “여기는 가장 안전한 신전 기도소 아니야. 더 말해야 해?”

    그 가장 안전한 신전 처소 앞마당에서 기절하여 발견된 장본인이 할 말은 아니지만, 란이 오랫동안 참았다는 걸 안 하급 신관이 한발 물러섰다.

    그의 말대로 이번 주는 안전한 기도회 주간이니 말이다.

    왕세자의 건강 회복을 위해 가장 큰 신전에서 진행하게 된 기도회에 란도 참석을 허락받았다.

    신경질적으로 신전 내부로 들어가고 있던 란은 뒤따라오는 하급 신관을 따돌리기 위하여 일부러 좁은 길로만 택하여 다녔다.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지.

    정작 만나 주지는 않는 록은 저따위 하급 신관이나 그에게 붙여 두고 있었다.

    아마 기억을 엿보았을 것이다. 라드군에서 나디사 마로닌이 잡혀갔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으니, 그녀는 범인이 아닐 거고.

    하물며 이쪽도 살해 의도가 있었기에 서로서로 묻고 가자는 쪽으로 결론이 난 듯싶었다.

    마지막에 그 어둠만 아니었다면, 정신을 잃을 일도 없었을 텐데. 제게 실망한 아버지가 영영 자신을 만나 주지 않으면 어쩌지.

    란은 불안한 듯 손톱을 씹으며 신전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고위 신전들 전용으로 모이는 이 한적한 곳에 분명 그의 아버지도 있을 것이었다.

    란은 치렁거리는 신전 의복을 손으로 치우며 뒤를 돌아봤다.

    그사이 길을 잃은 하급 신관이 쩔쩔매다가 딴 길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어릴 때부터 밥 먹듯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그가 아니면 길을 잃는 게 당연했다.

    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걷다가, 불온한 짐승의 울음소리에 앞을 바라봤다.

    본능적으로 신전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그를 알아본 날개 달린 짐승, 라드는 으르릉거리며 그쪽으로 눈을 부라렸다. 하여간 저 짜증 나는 짐승들. 감은 쓸데없이 좋아서.

    란은 손에서 피어난 금빛으로 몸의 기척을 숨겼다. 그제야 으르릉거리던 라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낮추었다. 이윽고 꼬리를 빙빙 흔드는 라드의 주인이 나타났다.

    전에 보던 이와 다른 이군.

    하지만 라드군을 이 신성한 기도회 주간에 부른 이는 한 사람일 거다.

    주위를 경계하던 라드군은 하늘로 떠나고, 하급 신관 하나가 나와서 그를 배웅했다. 하급 신관 하나가 나와서 주위를 경계했다.

    뒤이어 나오는 이는 첫 번째 신관인 랍이었다.

    한창 왕세자 문제로 바빠서 라드군을 만날 일이 없는 그가 하급 신관에게 무어라 명을 내렸다.

    하지만 그때, 랍의 시선이 기둥 뒤로 왔다.

    란의 기척을 아는 것처럼 유심히 지켜보던 그는 이내 픽 웃고는 다시 기도를 드리는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발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던 란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기척을 풀었다. 커다란 길을 향해 뛰어갔다.

    무더운 기도회 주간. 말소리조차 소곤소곤 나누는 이 시기에 란 혼자서 땀을 흘리며 신전 복도를 뛰어가고 있었다.

    나풀나풀한 하얀 신복을 휘날리며 달리던 란은 커다란 어깨를 맞닥뜨리고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란?”

    기도회 예배를 위해서 교리 책을 들고나오던 록을 마주쳤다. 하급 신관들에게 다음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는 땀에 전 란을 보고서 당황한 눈치를 숨기지 못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네.”

    “네.”

    록은 들고 있던 교리 책을 뒤에 선 하급 신관들에게 넘기고, 그들이 떠나갈 때까지 온화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턱으로 흐르는 땀을 닦은 란은 모두가 물러갈 때까지 벌 받는 죄인처럼 서 있었다.

    이내 하급 신관 무리가 생기발랄한 청년들처럼 웃으며 복도를 떠나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있었다.

    “들어와.”

    예전에 그 냉정한 눈빛이 아닌, 조금은 살얼음이 녹은 태도로 록이 기도실 문을 열었다.

    초라한 기도실이 아니라, 새로 중축한 이 신전 기도실은 얼음물과 약간의 과일도 준비되어 있었다.

    록은 잔에 얼음물을 따라서 그에게 건넸다.

    “몸도 성치 않은 애가 낮부터 어디를 그리 쏘다니니.”

    란은 대꾸 한마디 못 하고 그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저를 바라보고 있는 록에게 꾸벅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어제까지 편지를 주고받은 걸로 기억하는데.”

    “저한테 화가 덜 풀리신 줄 알았어요. 얼굴 보기가 싫으셔서 그런 거라고.”

    란이 다 마신 잔을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록은 수비교의 상징인 깃발을 보면서 두 손을 모았다.

    “네 스스로 떳떳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으니 더 그런 것이었겠지. 내 편지에 있는 마음을 읽지 못할 정도로 네 눈이 어두워졌다니.”

    또 시작이었다. 잔소리를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란의 눈이 어둡게 침잠하려던 순간 록이 그를 돌아보았다.

    “내 잘못이다.”

    “……네?”

    “너를 안 보려 했다. 꽤 오랫동안. 그러려고 마음먹었는데, 나디사 경이 찾아와 부자지간인데 네가 그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고 하지 않니.”

    록은 란을 손으로 불렀다. 주춤주춤 그에게 다가간 란은 오랜만에 느끼는 아버지의 향기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얼음처럼 얼어붙어 있던 그의 마음은 포옹 한 번에 쉽사리 녹았다. 눈물이 되어 그의 뺨을 지나쳤다.

    “근래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어. 과거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여 자꾸 뒤만 보았더니, 앞에 있는 너를 차마 보지 못했다. 미안하였어.”

    “…….”

    란은 저가 바라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와 마음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의 과거가 무엇이었든, 그 이야기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았다.

    피로 이어진 부모도 저를 버리는데, 피로 이어지지 않은 록도 언젠가는 저를 떠날 것 같아서.

    하지만 저에게 미안하다는 진심 어린 말에 란은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얼른 닦아 내었다.

    “사과하겠어요.”

    “나디사 경에게?”

    “그래야 더 마음을 푸실 거 아니에요.”

    “진심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리고 너는 교리 책 오십 권을 모조리 베껴 써 오도록 해.”

    “그건 문제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잘못하던 그에게 내린 벌이니까.

    신력이 많다고 모두 쩔쩔맸지만, 그만은 항상 벌을 내렸다. 란은 그 벌이 무척이나 기뻤다.

    모시고 아부하는 건 사랑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상대를 사랑하면 쓴소리도 해 주는 법이니 말이다.

    그 바보 같은 라드군. 나디사 마로닌이 떠올랐다.

    저와 싸우고 곧장 쓰러져 라드가 숙소로 데려갔다는데. 미심쩍은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건 추후 알아내면 될 문제였다.

    “그러면 선물은요?”

    “선물?”

    좋은 것을 알아냈다. 란은 웃으며 제 아버지를 바라봤다.

    “저번에 그 얌체같이 숨어든 라드군이요. 누군지, 누구 명령으로 왔는지 알았거든요. 알려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요.”

    “누구지.”

    “제가 잠입해서 더 알아 올 수 있어요.”

    그렇다. 아버지의 말대로 그에게 진심 어린 사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진심 어린 선물이면 몰라도.

    * * *

    동부 끝에 부유한 마을은 모세스 가문의 보호 아래서 더 없이 활기 넘치고 행복한 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바닥에 깔아 둔 돌은 근래에 간 것인지 길바닥이 반질반질했다.

    냄새 좋은 빵집에 이끌린 마벤이 몇 개 포장해 가자고 하자, 그리사는 어처구니없는 듯이 웃었다.

    “머리가 나쁜 건지, 이해심이 넓은 건지. 어떻게 그렇게 바로 웃어요?”

    “이해심이 넓다. 이 머리 나쁜 그리사 같으니라고.”

    주먹을 든 마벤이 쫓아가자 그리사는 웃으며 마벤이 말한 빵집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그들을 쫓아가던 나디사는 문득 시계상 유리 진열장 앞에서 멈추었다.

    예쁜 금색의 회중시계를 보고서 그 앞을 떠날 수 없었다.

    그때 사툰 종족으로 보이는 시계 집 주인이 밖으로 나와 나디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살 거요?”

    이런 시선은 오랜만이었다. 군복을 입고 다니느라 이렇게 대놓고 종족으로 차별하는 이는 오랜만에 겪었다.

    나디사는 그 시계가 단순히 예뻐서 보고 있었음이었다.

    수도에서 멀어질수록 이런 시선은 많아질 거다. 한숨을 내쉰 나디사는 그럴 생각이 없었음에도 금화를 꺼냈다.

    “저걸로 주세요. 이름도 넣어서.”

    진짜로 살 줄은 몰랐는지 굽신거리는 주인장을 보고 느낀 만족감은 1초 정도.

    나디사는 지난 몇 달간 개인적으로 모아 온 용돈을 한 번에 날릴 가격을 듣고 말았다.

    낭패를 겪었다. 아, 모아서 꽤 괜찮은 옷을 한 벌 사고 싶었는데. 어떤 망할 데이트를 위해.

    정말로 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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